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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10> 조마면(助馬面)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06.03 19:33 수정 2015.06.03 07:33

가야와 교류한 삼한시대 소국 주조마국의 땅
지역 제일의 사과·대파 산지 부자농촌으로 도약

↑↑ 조마면 지도
ⓒ 김천신문
동쪽으로 감천면과 성주군 벽진면, 남쪽으로 지례면과 성주군 금수면, 서쪽으로 구성면, 북쪽으로 양천동과 접하고 있는 조마면은 염속산과 가제산에서 발원하는 강곡천이 감천으로 합류하고 하천변에 도암들, 장암들, 신안들 등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조마면은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 장군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김산향교를 중수한 강설(姜渫)과 충무공의 부장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배흥립(裵興立), 효부 함양오씨와 덕산이씨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기도 하다.
조마면은 특히 감문국과 함께 삼한시대 소국인 주조마국(走漕馬國)의 터전으로 중국사서인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誌東夷傳)’에 기록된 변한계 12국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장암리와 강곡리에서 가야토기가 출토되고 서기 562년에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할 때 주조마국이 함께 토멸된 사실로 미뤄 이 지방이 가야와 밀접한 교류를 맺어왔음을 알 수 있다.
    
□마을과 전설
    
조마면의 중심 강곡리
↑↑ 자동서원
ⓒ 김천신문

조마면소재지인 강곡1리는 구곡과 엉거실 두 마을로 나눠져 있는데 삼한시대 조마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소국 주조마국(走漕馬國)의 터전이다. 서기 562년 주조마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래 조마부곡(助馬部曲)을 거쳐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에 속한 구곡(九曲)이라 하다가 1914년 이웃한 강평과 합할 때 강평(江坪)의 강(江)자와 구곡(九曲)의 곡(曲)을 따서 강곡(江曲)이라 했다.
구곡이라는 지명은 마을을 세울 때 아홉구비의 산모퉁이를 돌아 자리를 잡았다는 뜻에서 구곡(九曲)이라 했다고 하며 달리 금단(錦丹)이라 한 것은 마을 앞 감천이 비단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워 비단금(錦)자에 붉을단(丹)자를 써서 금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금다이로도 불린다.
구곡마을과 이웃하고 있는 엉거실은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인근 장암마을이 큰 수해를 입게 되자 주민들이 이전해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앞 감천에 비친 달이 아름답다고 월곡(月谷)이라고도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엉거실 또는 얼거실이라 불리게 됐다.
구곡으로부터 성주방면 901호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강곡천변에 강곡2리 강바대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강평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강곡천변의 들판이 예로부터 기름지고 넓어 강강(江)자에 평평할평(坪)자를 써서 강평(江坪)이라 했다. 또 ‘호은공(湖隱公)문집’에 마을 지명을 강해촌(江海村)이라 기록한 점으로 미뤄볼 때 마을의 들이 바다처럼 넓어 강강(江)자에 바다해(海)자를 합해 강바다라 한 것이 강바대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주강씨의 김천입향은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역임한 14세손 강부(姜符)의 손자 남와(南窩) 강설(姜渫 1583~1651)이 구성의 명문가이자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지례현감을 역임한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1552~1619)의 사위가 된 사연과 무관치 않다.
강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김산향교의 중건을 위해 헌신했는데 선친의 유훈을 받든 아들 강여구, 강여호 대에 이르러 향교의 면모를 일신해 김천의 흥학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들 부자의 문덕(文德)을 추앙하던 안동 병산서원장 이제를 비롯한 영남유림 555인의 발의로 1804년(순조4년) 자동서원(紫東書院)이 세워졌다.
↑↑ 메기바위
ⓒ 김천신문

이 마을에는 빗내바위와 메기바위로 불리는 바위 두 개가 있는데 마을이 강곡천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다른 마을과 달리 수해를 입지 않은 이유를 마을 위 강곡천변에 버티고 있는 빗내바위 때문으로 믿고 있다.
주민들은 빗내바위가 남성을, 메기바위는 여성을 상징한다 해서 신성시하며 메기바위에서 득남을 기원하거나 비가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장수바위 전설이 전하는 장암리
↑↑ 장수바위
ⓒ 김천신문

신안리와 장암교 사이에 드넓은 장암들을 배경으로 나눠져 있는 마을이 장암1리 장바우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에 속해 상장(上壯), 하장(下壯)으로 불렸는데 1914년 이웃한 도암(새말), 예동, 점동을 합해 조마면 장암동으로 고쳤고 1962년 상장과 하장을 장암1동으로 분동했다.
마을 뒤로는 구성면 덕대산에서 내려뻗은 지맥이 매봉산으로 이어져 뒷골과 마당골, 배암골, 새암골을 이루며 끊어질듯 달려와 장암교 앞에서 장암대(壯岩坮)로 멈춰 섰는데 풍수지리로 볼 때 목마른 말이 물을 먹고 있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형국이라고 한다.
장바우는 안동권씨 20세손인 권세호(權世豪)라는 선비가 단종이 폐위됨을 탄식하며 가족을 거느리고 은거한 후 대대로 안동권씨가 집성촌을 이뤘다.
장암 또는 장바우라는 지명은 현재 아랫장바우와 웃장바우 사이 지방도변에 위치한 바위에서 비롯됐다. 전설에 의하면 개령 출신으로 고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허직(許稷)이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후 힘센 장사에게 바위를 3층으로 쌓게 했다고 장수바위, 삼층바위로 불렀는데 장수바위가 음이 변해 장바우가 됐고 한자로 굳셀장(壯)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장암(壯岩)이라 했다는 것이다.
마을 앞 드넓은 장암들은 일제시대에 다까세농장 또는 고려농장으로 불렸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감천이 범람해 장암들이 수몰되자 자력으로 수습할 수 없는 주민들이 연명으로 제방축조와 농지복구를 청원했다고 한다.
↑↑ 장암들
ⓒ 김천신문

이를 접수한 총독부에서 연명청원서를 농경지포기각서로 위조해 오사카의 유력자인 다까세라는 인물에게 불하했다. 당시 부산 동래에 지점을 두고 조선 각지에 농장을 경영하던 다까세는 장암들 1천300마지기를 현대식으로 경지정리해 관리인을 두고 경작했다. 수확물을 보관할 창고가 필요하자 봉계출신으로 고종 때 김산소모사(金山召募使)와 경상남도관찰사를 역임한 조시영(曺始永)의 저택을 허물고 그 목재로 지금의 창고를 지었다.
장바우로부터 조마면소재지 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가다 장암교 직전에서 우측으로 바위절벽을 끼고 난 샛길을 따라 돌면 아랫새말, 가운뜸, 윗새말이라 불리는 장암2리 새말이 위치하고 있다.
멀리 구성면 바랫들과 도지미 마을이 감천을 경계로 마주하고 성황재, 뒷골, 배암골, 새암골을 경계로 점동, 장바우와 나눠진 새말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해 도암(道岩)으로 불렸다.
도암은 조선시대 성종조로부터 연산조에 이르기까지 형제 정승으로 유명한 허종(許琮), 허침(許琛)을 배출한 반촌(班村)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 형제가 이 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아버지 양천부원군 허손(許蓀)이 조마면 신안리 화순최씨 최안선(崔安善)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웃새말에는 이 마을출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임진왜란 때 왜병에게 죽임을 당한 진사 정일(鄭鎰)과 투신자살한 부인 덕산윤씨, 세 살 난 주인의 아들을 키워 대(代)를 잇게 한 노비 막개(莫介)와 계화(戒花)를 삼강세가(三綱世家)라 칭송하고 1707년(숙종33년)에 정려가 내렸다.
새말과는 성황고개를 사이로 두고 이웃하고 있는 예동, 사창, 점동마을이 장암3리로 속한다.
도로변의 예동은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장바우에서 권씨일가들이 이주해 정착한 후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이웃한 사창은 옛날 곡식을 저장하며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사창(社倉)이 있었다고 얻어진 이름이다.
    
화순최씨, 성산배씨 집성촌 신안리
↑↑ 신안리 석불입상
ⓒ 김천신문

양천동으로부터 조마면 방면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신안1리 죽정마을이 있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에 속해 죽정리로 불렸는데 1914년 인근의 신동, 구미, 지동, 신하, 안서, 신기, 신촌을 통합해 신동(新洞)의 신(新)자와 안서(安棲)의 안(安)자를 따서 신안동(新安洞)이라 했다가 1962년 죽정을 신안1동으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사간원승지(司諫院承旨)를 역임한 성산배씨 10세손 배한(裵閑)의 차남 진사 배윤순(裵允詢)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 충신들을 주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세상을 한탄하며 식솔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안새래로 낙향해 입향조가 됐다. 뒤에 후손들이 1890년(고종27년) 죽정으로 이주한 후 성산배씨 신안파가 집성촌을 이뤘다.
조선시대까지 신하리(新下里) 또는 내신(內新), 안새래로 불린 신안3리는 마늘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로 만력골짜기 입구에 있다고 만력동(萬曆洞)으로도 불렸다.
새래라는 지명은 새신(新)의 변음으로 보이며 1658년(효종9년) 성산배씨 배금겸(裵今謙)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성산배씨 집성촌을 이뤘다.
마을안쪽에는 배흥립(裵興立) 삼대(三代) 정려각이 섰는데 1617년(광해군9년) 사별한 남편을 따라 자결한 경주김씨 부인과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아들 배흥립, 병자호란 때 공신이 된 손자 배명순(裵命純) 등 3대에 걸쳐 정려가 내렸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해 신하(新下), 안서(安棲)로 불렸는데 1914년 인근마을과 합해 김천군 조마면 신안동으로 개칭되고 1962년 밧새래, 안서동, 저목골이 신안4동으로 분동됐다.
이 마을은 연산군 때 형조참의와 전라감사를 역임한 화순최씨 10세손 최중홍(崔重洪)의 손자인 최세영(崔世英)이 선조 때 낙향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화순최씨 집성촌을 형성해왔다.
안서(安捿)라고 하는 지명은 화순최씨 일가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편안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를 기원하며 편안할안(安)자와 머무를서(棲)자를 써서 안서동(安棲洞)이라 했다고 하며 화순최씨 집성촌답게 선조를 제향하는 남애정(南厓亭)과 백원당(百源堂)이 세워져 있다.
밧새래라는 지명은 입향조 최세영이 내려와 새로 정착했다고 새신(新)에 아래하(下)자를 써서 신하(新下)라고 했다. 이 마을이 신하로 통칭되는 마을의 외곽에 있다고 외신(外新)이라 적고 바깥신하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밧새래로 불리게 됐다.
마을 뒤 영탑골로 불리는 골짜기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1호인 고려시대 양식의 거대한 석불이 감천을 굽어보고 섰다.
이 불상은 사찰이 폐사된 후 땅속에 묻혀 있다가 밭을 일구던 중 발견돼 1987년 문화재로 지정되고 1996년 현재의 보호각이 설치됐다.
조마면소재지로 향하는 지방도에서 안새래로 가기 전에 위치한 마을로 지동, 새터, 새래숲 등 세 마을은 1962년 신안5리로 분동했다.
마을회관이 있는 지동은 마을 앞에 조선시대에 성산배씨 집안에서 주동이 축조됐다는 큰 저수지가 있음으로 해서 못지(池)자를 써서 지동(池洞)이라 했다고 하며 어조사지(只)자를 써서 지동(只洞)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름난 효자 효부를 배출한 신곡리
↑↑ 상친사
ⓒ 김천신문

조마면과 지례면 경계를 이루는 꿀고개 아래 위치한 신곡1리는 나부리와 마와리 두 마을로 이뤄져있다.
두 마을은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했는데 1914년 나부리, 마와리, 미실, 철수동, 중리, 신석, 백화동이 합해져 김천군 조마면 신곡동으로 바뀌었고 1962년 나부리와 마와리가 신곡1동으로 분동했다.
나부리 맞은편 염속산자락에 위치한 마와리는 마을일대의 지형이 말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말마(馬)자에 엎드릴와(臥)자를 써서 마와리(馬臥里)라 했고 또 말의 이빨에 해당된다고 어금니아(牙)자를 써서 마아리(馬牙里)라고도 불렀다.
미실은 임진왜란 이후 성주이씨와 파평윤씨가 정착해 마을이 형성됐다고 하는데 과거 조마면소재지 일대의 경작지가 감천의 잦은 범람과 가뭄으로 흉년이 들 때도 물이 좋은 이 마을은 쌀농사가 잘돼 쌀미(米)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미곡(米谷)이라 적고 미실이라 했다는 것이다.
철수동은 철이 생산되고 바람골, 큰골, 목골, 두리봉 등 크고 작은 골짜기에서 흘러드는 계곡물이 사시사철 흘러 쇠붙이를 생산하는 철점(鐵店)이 있었다.
강곡리 강바대마을에서 성주방면 지방도를따라 가다보면 가제산과 시루봉사이에 백화동, 신석, 중리 등 세 마을로 이뤄진 신곡3리가 자리 잡고 있다.
백화동은 성주이씨 13세손으로 숙종 때 진주병마절제사를 역임한 이유항(李維杭)이 거창군 가북면에서 입향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성주이씨 백화동파 집성촌을 이뤄왔다.
백화동이라는 지명은 영조 때 입향조인 이유항의 아들 남강(南岡) 이세간(李世幹 1724~1795)이 부친의 병환을 지성으로 구환하자 엄동설한에 살구꽃을 비롯한 많은 꽃이 피어 이를 약으로 썼다 해서 백화동(百花洞)이라 했다 하고 또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할 때는 호랑이가 나타나 감싸준 만고의 효자로 칭송이 자자했는데 이후부터 효자동(孝子洞)으로 불렸다.
마을에는 이세간을 비롯한 성주이씨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상친사(尙親祠)가 섰는데 시묘살이 할 때의 인연으로 함께 살던 호랑이는 이세간이 졸하자 울면서 굶어죽었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후손들이 호랑이 그림을 상친사 벽에 그리고 뒤뜰에 의호신령비(義虎神靈碑)를 세워 호랑이와 이세간을 추모했다고 한다.
신석동은 명종 때 군기사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한 박경순(朴景淳)의 차남 박홍발(朴鴻發)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순천박씨 군수공파 집성촌을 이뤄왔다.
마을중앙에는 이 마을 출신으로 박홍발의 후손이며 영조 때 사헌부감찰을 증직 받은 박윤(朴贇)의 처 함양오씨를 기리는 효열각이 있다.
    
용바위 전설이 전하는 신왕리
↑↑ 용바위
ⓒ 김천신문

조선시대 때 김산군 남천면(南川面)에 속했던 이 마을은 1914년 이웃한 신계, 송정과 합해 김천군 조마면으로 개편되면서 신계(新溪)의 신(新)자와 수왕(水旺)의 왕(旺)자를 써서 신왕동(新旺洞)이라 했고 1962년 박리, 수왕, 용암 세 마을을 신왕1동으로 분동했다.
성주방면 997번 지방도변에 자리한 박리마을은 현재는 진주강씨 집성촌이지만 원래 김해김씨 일가들이 정착해 살면서 일대 들판이 넓고 살기 좋아 넓을박(博)자를 써서 박리(博里)라고 했다고 한다.
박리 안쪽마을인 수왕은 물왕실로도 불리는데 조선 순조 때 의성김씨 김처율(金處律)이 성주 벽진에서 이주해 살면서 물이 흔해야 후손들이 번창한다는 염원을 담아 물수(水)자에 성할왕(旺)자를 써서 수왕(水旺)이라 했다.
박리로부터 하천을 넘어 매봉산 아래에 자리 잡은 용암마을은 하빈이씨 집성촌으로 마을 앞 대방천에 용의 머리를 닮은 용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가 있어 용용(龍)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용암(龍岩), 용바우라 했다.
풍수지리로 볼 때 용암마을 뒷산이 용의 몸통이며 이 바위가 용의 머리에 해당해 신성시했는데 이 같은 믿음은 현재도 지켜져 수년 전 하천변에 도로포장을 하면서 용의 몸과 머리를 단절시키면 안 된다고 목에 해당하는 지점을 포장하지 않고 남겨두기까지 했다.
1962년 신왕2동으로 분동된 송정, 신계 두 마을은 신왕2동에 속한다.
감천면 용호리와 조마면의 경계에 자리 잡은 신계마을은 1600년대 말 밀양박씨가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 부유한 양반들이 주로 살았는데 풍수적으로 볼 때 마을의 기운이 너무 강해 인근에 살던 하층민인 백정들을 의도적으로 살게 해 지기(地氣)를 눌렀다고 전한다.
이후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마을 앞 대방천이 범람해 마을이 매몰된 후 물길이 변해 하천이 새로 생겼다고 새신(新)자에 하천계(溪)자를 써서 신계(新溪) 또는 하신계(下新溪)라 했다.
신계 안쪽의 송정마을은 칠곡에서 진주강씨 강상식(姜尙植)이 입향한 이래 대대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뤘는데 마을입구에 큰 소나무가 있어 소나무송(松)자에 정자정(亭)자를 써서 송정(松亭)이라 했다.
    
지역 최대의 사과산지 대방리
↑↑ 살치재
ⓒ 김천신문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남천면으로 속했던 옥계, 유촌, 수방, 사점, 궁항마을은 백계산, 염속산, 글씨산에 둘러싸여 있다. 1914년 인근의 성궁, 가곡, 대평, 원곡 등의 마을과 통합해 대평(大坪)의 대(大)자와 수방(水坊)의 방(坊)자를 따서 대방동(大坊洞)이라 개칭해 조마면에 속했고 1962년 대방1동으로 분동했다.
현재의 마을 지명인 옥계는 마을 앞을 흐르는 대방천의 옛 이름으로 구슬처럼 맑고 깨끗하다고 구슬옥(玉)자에 시내계(溪)자를 써서 옥계(玉溪)라 했는데 이것이 마을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성주 방면으로 가다가 대방저수지에 접해있는 수방마을은 물이 흔해 큰 물레방앗간이 있어 물수(水)자에 마을방(坊)자를 써서 수방(水坊)이라 했다고 하며 1970년대 마을에 저수지가 축조돼 대부분 타처로 이주하고 지금은 두 가구만이 남아있다.
성주군 벽진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살치재는 주음실이라고도 불렸는데 대방3리 성궁(省弓)에서 쏜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에 위치해 쏜 화살을 주워왔다고 주음시라고도 했고 화살전(箭)자에 고개령(嶺)자를 써서 전령(箭嶺)이라 적고 화살재라고 했는데 뒤에 음이 변해 활티재, 살치재 등으로 불리고 있다.
살치재에는 1700년대 말 김해김씨가 정상 인근에 살았는데 산적이 자주 출몰하자 지금의 염속산 자락으로 이주해 사기그릇을 구우며 살아 사기점(沙器店) 또는 사점(沙店)으로 불렸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남천면으로 속했던 성궁과 가곡은 1914년 인근마을과 합해 조마면 대방동이라 했다가 1962년 성궁, 가곡이 대방2동으로 분동했다.
성궁은 지금의 마을회관자리에 활을 쏘는 활터가 있었다고 살필성(省)자에 활궁(弓)자를 써서 성궁(省弓)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효행으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성궁에서 가곡마을 방향의 옛 도로변에 청풍김씨 효행비가 높이 서 있다.
↑↑ 청풍김씨 효행비
ⓒ 김천신문

청풍김씨는 김해김씨 김상인(金相仁)의 처(妻)로 앞을 보지 못하는 시조모를 지극정성으로 간병해 칭송이 자자했고 지역유림에서 공론을 모아 표려비(表閭碑)를 내려 귀감을 삼게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또 다른 지명인 가곡은 마을에 예로부터 가죽나무가 많아 가죽골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을 줄여 가곡이라 하고 한자로 나뭇가지가(柯)자를 써서 가곡(柯谷)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남천면으로 속했던 대평, 원곡마을은 1914년 인근의 옥계, 수방, 유촌, 궁항, 가곡과 함께 김천군 조마면 대방동으로 개칭했고 1962년 대평, 원곡을 대방 3동으로 분동했다.
대평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성궁에 살던 밀양박씨 일가들이 대방천을 따라 내려오다 대방천이 감돌아 흐르며 형성한 국개들과 섬들 일대에 새롭게 마을을 이뤄 큰대(大)자에 평평할평(坪)자를 써서 대평(大坪)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세 산에 둘러싸인 삼산리
@IMG11@
삼산리는 조선시대에 김산군 남천면에 속했고 1914년 유산과 삼정리를 통합해 김천군 조마면 삼산동으로 고쳤다.
대방리와 용호리, 강곡리 사이에 자리 잡은 삼산리는 삼정리와 유산 두 마을로 이뤄졌는데 흰닭매(백계산), 불두산, 팔악골 등 3개의 큰 산에 둘러싸여 삼산리(三山里)로 했다고 한다.
입구의 삼정리는 마을에 세 그루의 정자나무와 세 개의 저수지가 있어 삼정지(三亭池)라 했다가 뒤에 삼정리로 변했다. 삼정리를 싱징하던 세 그루의 정자나무 중 두 그루는 고사하고 지금은 한 그루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삼정마을 뒤 오도재(五道嶺)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유산마을은 옛날 마을자리에 큰 늪이 있어 너배로 불렸다. 뒤에 마을이 위치한 터가 오두재로 오르는 고갯길에 있어 다락과 같이 높다고 다락루(樓)자에 뫼산(山)자를 써서 루산(樓山)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유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유산마을은 뒷산인 불두산(佛頭山)을 중심으로 지방박골, 점골, 가파락골, 피락골, 각골, 장각골, 부치골, 장바우골, 작은손옥골, 방아다리골, 도둑골 등 무수한 골짜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자매지간에 지극한 효행을 실천한 감천면 도평리 문랑효랑이효각의 주인공인 효녀 문랑의 묘가 유산마을 뒤 새팔학골에 있다고 한다.
    
□조마면의 산
    
부처의 머리를 닮았다는 불두산
불두산은 해발 428m로 강곡리 구곡마을에서 삼산리 유산마을 일대에 걸쳐있는 산으로 삼한시대 조마면 일대를 근거로 나라를 열었던 주조마국의 진산이다.
불두라는 이름은 산의 모양이 부처의 두상을 닮았다고 붙여진 지명으로 옛날 산내에 절이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주와의 경계인 살치재에서 염속산, 연석산, 동대산, 신달이산으로 연결되며 불두산으로부터 용두산과 응봉산이 갈라져 감천에 접한다.
불두산은 별도로 정비된 등산로가 없고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산길이 있는 정도다. 유산마을과 구곡마을, 신곡, 철수동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구곡마을에서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임도가 산 중턱까지 개설돼 접근성이 그나마 좋은 편이다.
산의 수종의 거의 소나무인데 수령은 오래되지 않아 보이며 곳곳에 오동나무군락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마면의 문화유산
    
배흥립 삼대삼강 정려각
조마면 신안리 1089번지 안새래마을에 있는 정려각으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배흥립장군과 모친인 경주김씨 부인, 손자 배명순 등 3대에 걸쳐 정려가 내린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이다.
배흥립은 본관이 성산(星山)으로 영산현감을 역임하고 좌찬성으로 추증된 배인범(裵仁範)과 정경부인 경주김씨 사이에서 1546년(명종1) 김산군 조마면 새래(신안)에서 태어나 자를 백기(伯起), 호를 동포(東圃)라 했다.
1572년(선조5)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봉직하다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여진족을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무장, 경성, 흥양 등 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권율, 이순신 장군과 함께 행주, 당포, 옥포, 견내량, 진도, 칠전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고 이순신장군의 천거로 공신에 오른 후 장흥부사와 전라도방어사,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올랐다.
1605년(선조38) 선무공신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1607년 영흥부사로 나갔다가 득병했으며 그 이듬해 졸하니 선조는 예관을 보내어 조문케 하고 효숙(孝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효숙공의 모친인 경주김씨 또한 만고의 열부로서 남편이 병사하자 3년상을 마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니 1656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정경부인으로 증직됐다.
    
정일 부부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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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면 장암리 587번지 새말에 위치한 이 정려각은 임진왜란 때 왜적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진사 정일(鄭鎰)과 남편을 지키려 자결한 부인 덕산윤씨를 기리는 부부 정려각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왜적이 마을로 들어오자 병환 중에 있던 남편 정일을 윤씨부인이 이불에 싸서 업고 마을 앞 감천 용머리 부근으로 피난했다.
왜병이 추격하자 남편을 갈대밭에 숨기고 적을 유인해 남편으로 멀어지게 한 후 감천에 투신 자결했고 뒤따라온 여종 막개(莫介)도 따라 죽었다. 사로잡힌 정일은 왜병이 회유하려하자 “내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찌 금수(禽獸)를 따르겠느냐”라고 호통 치며 반항하다 칼에 찔려 죽었는데 이때 정일의 나이 36세였다. 6일 후 다른 여종 계화(桂花)가 정일과 윤씨부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주인의 세 살 된 외아들을 업고 외가인 예안으로 가서 살면서 주인의 대를 잇게 했다.
1635년(인조13) 정일에게 사헌부 지평(持平)벼슬이 증직되고 정려가 내렸으며 1707년(숙종33) 윤씨부인에게도 정려가 내렸다. 원래의 정려각은 새말 입구에 있었는데 감천이 범람해 수해를 입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정려각 앞에는 두 개의 작은 비가 나란히 서 있는데 주인을 위해 따라죽은 여종 막개와 주인의 어린 아들을 키워 대를 잇게 한 계화의 비석이다.
    
박윤 부부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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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면 신곡리 신석동에 있는 정려각으로 사헌부 감찰로 추정된 박윤(朴贇 1723~?)과 처 함양오씨부인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는 부부 정려각이다.
‘교남지’에 “박윤은 홍발(鴻發)의 후손으로 1888년(고종25) 효행으로서 감찰을 증직 받았다”라고 기록돼있다. 순천박씨 족보에는 졸한 후 조정에서 정려를 받고 통훈대부 사헌부감찰을 증직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부인 함양오씨는 개령면 덕촌리 자방마을에서 박윤의 후처로 시집와 남편 박윤이 병사하자 자결을 택한 열부로 ‘교남지’에 “함양오씨는 박윤의 처로 정순하고 덕이 있었는데 시집가서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다 남편이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하고 상을 당하자 스스로 장례준비를 마친 후 목을 매어 죽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조마면의 특산물
    
대파·감자·사과 전국적인 명성 확보
    
조마면은 감자, 사과, 대파 등 특산물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참여농가로 보면 대파가 가장 많아 160농가가 80ha에서 3천96톤을 생산했으며 그 다음이 양파로 120농가가 58ha에서 5천741톤, 자두는 108농가가 72ha에서 712톤을 생산했다. 김천 관내 생산량 1위의 사과는 75농가가 58ha에서 5천220톤을 생산했으며 비닐하우스 수막재배 등으로 품질이 우수해 전국적인 명성을 확보한 감자 역시 51농가가 60ha에서 1천800톤을 생산했는데 연작 피해 등으로 재배면적이 줄고 있다.
조마면 관내엔 쌈채소도 적지 않게 생산된다. 일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재배면적은 13ha에 불과하지만 105농가가 쌈채소 재배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조마면의 산업체
    
수출단지(제6농장)까지 갖춘 백산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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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면 신왕리 450번지에 위치한 백산농산은 새송이버섯 재배 농장 5개소와 1개소의 수출단지까지 갖추고 있는 기업이다.
“버섯은 나의 삶이요, 스승이요, 꿈입니다. 항상 나의 가족이 먹는다는 마음으로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버섯생산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송이산 자락에 위치한 농장에서 친환경 버섯을 생산해 고객과 행복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으로 농장을 운영하는 여상규 회장의 말이다.
1985년 백산농산을 창립해 오늘에 이른 30년 역사의 백산농산은 2004년 제2농장, 2005년 제3농장, 2006년 제4농장·제5농장을 건립하고 2010년 신왕리에 제6농장(수출단지)을 건립했다. 백산농산은 특히 경북우수농산물 상표사용 지정(2006년), FDA미국식약청 승인(2007년), ISO9001·ISO14001 인증승인(2008년) 등으로 품질을 인정받은 자랑스러운 기업이기도 하다. 
최첨단 자동화시스템을 구축, 새송이버섯 종균을 배양하는 한편 버섯을 재배하고 있는 백산농산. 이곳에서는 1일 14만병의 종균을 배양해 일부는 버섯재배농가에 분양하고 나머지는 백산농산에서 재배해 국내 서울가락동시장, 서울청과 등에 출하하고 캐나다 등 외국에도 수출함으로 지역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기업이다. @IMG14@  

□조마면의 학교
    
조마초등학교
조마면 강곡리 237번지에 위치한 조마초등학교는 1935년 7월 1일 개교됐다. 1985년 3월 1일 신곡국민학교가 조마국민학교 신곡분교장으로 흡수된데 이어 1994년 3월 1일 통합됐으며 1996년 3월 1일 조마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99년 9월 1일 신안초등학교가 조마초등학교 신안분교장으로 흡수됐다가 2002년 2월 28일 통합됐으며 2008년 3월 1일 대방초등학교가 통합돼 면내 유일한 학교가 됐다. 조마초등학교는 2015년 현재 제77회에 걸쳐 2천65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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