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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김천의 어제와 오늘<11> 구성면(龜城面)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06.17 17:43 수정 2015.06.17 05:43

신석기시대 최초로 사람이 정착한 김천 선사시대의 뿌리
연안이씨, 성산여씨, 은진송씨 등 유서 깊은 집성촌 즐비

↑↑ 구성면 지도
ⓒ 김천신문

구성면은 조선시대 김산군 과곡외면, 과곡내면과 지례현 상북면, 하북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과곡면과 석현면으로 김천군에 편입됐다. 1933년 홍수로 석현면 청사가 유실되자 과곡면과 석현면을 합해 구성면으로 했고 1934년 상좌원을 면소재지로 삼아 청사를 신축했다.
감천이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류하며 무릉천, 하원천 등 크고 작은 지류가 많아 토질이 비옥해 양파 주산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구성(龜城)이라는 지명은 현 지례면 상부리에 작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서 거북 형상의 바위가 나왔다고 못 이름을 구연(龜淵)이라 했고 마을 뒷산을 구산(龜山)이라 했다.
신라시대 때 이 산에 산성이 있어 구산성 또는 줄여 구성(龜城)이라 불렀는데 1934년 석현면과 과곡면을 합하면서 구성면으로 정했다.
상원리 원터와 광명리 기를마을은 조선시대 김산 5대 반촌으로 불리며 많은 과거 급제자와 명현거유를 배출했다. 또 송죽리 고목마을에서는 1990년 신석기와 청동기 유적이 발견돼 구성이 김천역사의 원류가 됐음이 밝혀졌다.
    
▢구성면의 마을과 전설
    
치마바위 전설이 전하는 하강리
↑↑ 치마바위
ⓒ 김천신문

하강(夏江)1리에 속한 여름실(夏谷), 모리이(新基), 안마는 조선시대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했던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곡, 강성, 신기를 통합해 하강동이라 하고 과곡면에 속했다가 1934년 구성면이 됐으며 1971년 하곡, 신기, 안마를 하강1리로 분동했다. 여름실(夏谷)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에 과일나무가 많아 열매과(果)자를 써서 과곡(果谷)이라 하고 열매실, 열음실, 여름실이라 불렀고 조선시대에 과곡면의 면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이웃한 모리마을은 관저산(冠底山) 아래 새로 자리를 잡았다고 새터(新基)라 불리며 또 관저산 모퉁이를 돌아간다 해서 모리라고도 한다.
그 옆으로 안마, 묘곡(妙谷), 밋골이라 불리는 마을에는 옛날 한 사내가 타처에서 양반댁의 아리따운 무남독녀를 꾀어 데려와 살았는데 뒤에 후손이 번창해 마을을 이루게 되자 마을이름을 아름다웠던 그 여인의 용모를 생각하며 묘할묘(妙)자를 넣어 묘곡(妙谷)이라 했다고 전한다.                 
하강2리 강성과 서당마는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했으며 1914년 하곡, 신기, 강성, 서당마를 묶어 하강동이라 하고 과곡면에 속하게 했다가 1934년 구성면 소관이 되고 1971년 강성과 서당마가 따로 하강2리로 분동했다.
옛날 이 마을에 강씨(康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위세를 떨치며 살아 강성(康姓)이라 했는데 나중에 강씨들이 모두 떠나자 강성(江城)으로 고쳤다는 설도 있다.
서당마는 과거 오봉서당(五峰書堂)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진 지명. 오봉서당은 안동김씨 김선이란 진사가 처향(妻鄕)인 양천 하로에 들어와 살면서 1701년부터 1703년까지 증산 쌍계사 승려 목수로 하여금 10칸짜리 건물을 지어 석간정사(石磵情舍)라 이름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또 서당마 뒷산인 병밭골에는 치마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옛날 이 마을에 살다가 버려졌던 남매가 성장한 후 남매인지 모르고 혼인하려하자 벼락이 이 바위에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와우형의 길지에 자리잡은 양각리
↑↑ 수문암
ⓒ 김천신문

양각(陽角里)1리 냉수정(冷水亭)은 차고 맑은 물이 솟아난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뒤에 샘 주변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름이 됐다.
황각(黃角)은 그 지명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의 지세에서 비롯됐다. 옛날 어느 도사가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는 마을 앞 관저봉은 구유(槽)모양의 식조형(食槽形)이고 마을 뒤 덕대산자락 밧줄봉(꼬부랑재)은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이라 대명당터라 했다는 것이다.
양지마(陽村)와 모산(茅山)으로 불리는 두 마을은 1579년(선조12년) 안치덕(安致德)이란 선비가 처음으로 이거한 후 순흥안씨 집성촌을 이뤘는데 뒤에 모두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화순최씨와 합천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도로 중간에 수문암(守門巖)이라 불리는 사람형상을 한 바위가 버티고 섰는데 1900년대 초 잡귀들의 마을 근접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양촌(陽村)으로도 불리는 양지마는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양지마 위쪽 모산마을은 마을 뒤 덕대산 자락인 시주골(侍中谷)에 띠풀(茅)이 잘 자란다고 모산(茅山)이라 했다 하며 마을 한가운데 못(池)이 있어 지산(池山)으로도 불린다.
    
김천지역 선사시대의 뿌리 송죽리
송죽리(松竹里)는 조선시대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했다가 1914년 대방, 송평, 죽방과 과곡내면의 내방, 광천, 일부를 합해 송평(松坪)의 송(松)자와 죽방(竹方)의 죽(竹)자를 따서 송죽동(松竹洞)이라 하고 과곡면이 됐다. 1934년 석현, 과곡면이 통합되면서 구성면으로 속하고 1971년 궁장, 덤밑, 고목, 백일대, 개정지, 날끝이 송죽1리로 분동됐는데 고목마을은 1991년 구성공단 부지조성 공사로 폐동되고 지금은 골프장이 자리하고 있다.
궁장(弓將)마을은 예전 공단이 조성되기 전 마을 앞을 굽이쳐 돌아가는 감천의 형세가 활에 해당하고 마을 앞 여우골산이 길게 뻗어 화살에 해당돼 어느 장수가 마을에서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마을 이름을 궁장(弓將)이라 했다고 한다.
궁장마을에서 제석골과 박자골을 지나 덤밑마을로 가다보면 도로변 우측 산허리에 선사시대 바위그늘(岩蔭) 유적이 있는데 1991년 공단 조성공사 때 폐동된 고목마을 터에서 신석기,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대량 출토돼 김천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임이 증명됐다.
대방재와 송죽재 사이에서 동쪽으로 광명2리와 접하고 있는 송죽2리는 죽방, 황새말, 주막으로 구성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했고 1971년 주막, 죽방, 황새말이 송죽2리로 분동했다.
특히 국도 3호선 도로에서 죽방과 광명2리로 나뉘는 사거리 형태의 갈림길 일대를 주막이라 부르는데 이는 주막이 들어서고 연일 길손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과곡초등학교 안쪽에는 황새말이 있는데 이 지명은 마을 뒷산의 형세가 학이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것 같다 해서 황새마을이라 한 것이 황새말로 변했다.
    
성산여씨 집성촌 광명리
↑↑ 무송정
ⓒ 김천신문

광명리(光明里)는 조선시대에 김산군 과곡내면에 속했던 기를(耆老)과 바랫들(排坪)이었는데 1914년 인근의 광천, 내방, 덕마루, 봉대마을을 합해 광명(光明)동이라 고쳐 과곡면으로 삼았다가 1934년 석현면과 과곡면을 합해 구성면이 됐고 1971년 기를과 배평, 도지미를 광명1리로 분동했다.
원래 기를마을의 상리는 성산여씨, 중리는 고성이씨, 인천이씨, 하리는 성산배씨, 고령신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많은 인재를 배출해 조선시대 김산군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손꼽혀 왔다.
하리에 있는 무송정(撫松亭)은 1729년 조마 신곡에 세워졌다가 174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철원최씨 문종 소유의 정자로 철원최씨 집송촌인 하촌마을의 송설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도지미(道峴)는 1936년 병자년 수해로 기를이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이곳에 마을을 세우면서 고개 이름인 도지미를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성산여씨 종택은 독립운동가 여환옥(呂煥玉 1896~1963) 선생의 생가로서 1690년 여명옥(呂命沃)에 의해 건립됐는데 안주인이 안동 하회에서 시집을 왔기 때문에 하회댁(河回宅)으로 택호(宅號)를 삼았다.
    
이미숭 장군의 기상이 서린 흥평리
흥평(興平)은 조선시대에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했었는데 1914년 진흥, 고노실, 점터와 합해 진흥(眞興)의 흥(興)자와 평전(平田)의 평(平)자를 따서 흥평(興平)이라 고쳐 과곡면에 속하게 했고 1934년 구성면이 됐다가 1971년 평전이 흥평1리로 분동했다.
마을 입구에는 김종하가 1860년(철종11년) 벗 5인과 뜻을 모아 우정의 증표로 5그루의 나무를 한다발로 묶어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김해김씨 김건휘(金建彙)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남 김각(金珏)을 비롯한 4형제를 데리고 난을 피해 이주한 후 밭(田)을 개간하며 평화롭게(平) 살았다고 마을 이름을 평전(平田)이라 했다.
송죽1리 날끝에서 개정지, 백일대를 지나 덕대산 자락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다 보면 고노실(외고), 점터(내고), 옥수, 진흥마을로 이뤄진 진주강씨 집성촌 흥평2리가 나온다.
이 마을은 고려 말인 1390년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이미숭(李美崇)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해 덕대산으로 들어가 성을 쌓으며 항거했는데 마을은 이때 개척됐다고 한다.
평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도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하다 1934년 구성면이 되고 1971년 고노실, 점터, 진흥이 평전과 분리돼 흥평2리가 됐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진흥마을은 마을 뒤 덕대산 자락에 신라시대 고찰인 진흥사(眞興寺)가 있어 진흥(眞興)이라 했다. 마을의 안쪽에 있다고 내고(內古)로도 불리는 점터(店基)는 30가구 정도가 있는 흥평리의 큰 마을로 옛날 이 곳에 쇠를 다루는 점(店)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방초정 스토리가 전하는 상원리
↑↑ 가례증혜판목
ⓒ 김천신문

상원리(上院里)는 조선시대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원터(院基)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원터, 마두리, 무티실(수도곡)을 합해 상원리로 석현면이 됐고 1934년 석현면과 과곡면이 통합되면서 구성면에 속하게 됐다.
마을이 처음 생긴 것은 연성부원군 이말정(李末丁)이 지례면 지품마을로 낙향해 살면서 후손들이 주변마을로 분가하게 됐는데 이말정의 아들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琡琦 1429~1489)의 차남인 진사 이세칙(李世則)이 원터에 정착해 마을을 개척한 후 대대로 연안이씨 집성촌을 이뤄왔다
상원리에 속한 세 마을 중 원터는 마을 인근에 옛날 상좌원(上佐院)이라는 관용숙소가 있어 원터라 했고 상좌원의 위쪽에 있다 해서 상원(上院)이라 했다.
상원리에 속한 또 다른 마을인 마두리(馬斗里)는 과거 상좌원이 있을 때 원(院)에 머물던 길손들이 말(馬)을 매어두고 여물을 먹이던 곳이라 마두리라 했다고 하는데 두릉(杜陵)으로도 불린다.
또 원터 안쪽 수도곡에는 옛날 수두사(水豆寺)라는 절이 있었고 스님들이 도(道)를 닦아 수도곡(修道谷)이라 했다가 뒤에 마을이름이 됐으며 달리 무티실로도 불린다.
원터마을 입구에는 방초정(芳草亭)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는데 1625년(인조3년) 이정복(李廷馥)이 자신의 호(號)를 따서 방초정이라 이름하고 원래 지금의 자리보다 감천쪽으로 더 가깝게 지었었는데 1736년 감천의 범람으로 유실되자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 건립했다.
    
구성면의 중심 상좌원리
↑↑ 모성정
ⓒ 김천신문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해 상좌원(上佐院)이라 했고 하원(下院), 좌원(佐院) 으로도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북, 하북면이 통합된 석현면에 편입돼 상좌원과 도동, 원앞(주막)을 합해 하원리(下院里)로 명명했으며 이후 주민들이 줄기차게 상좌원으로의 동명환원을 요구해 마침내 1983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주민청원에 의한 동명환원이 이뤄졌다.
1933년의 홍수로 구미리에 있던 석현면사무소 청사가 유실되자 면의회의 결의에 따라 석현, 과곡 두 면을 합해 지례현의 별호인 구성(龜城)이라 하고 1934년 지금의 자리에 면사무소를 신축했다.
이 마을은 이름난 학자와 독립투사를 배출해 원터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김천의 반촌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지금도 연안이씨 문중과 관계된 서원과 재실, 고택이 보존돼 있다.
상좌원이라는 지명은 과거 마을 앞 노상에 관용숙소인 상좌원(上佐院)이라는 원이 있음으로 해서 얻은 지명이다.
현재의 구성면사무소 일대는 과거 상좌원이 있음으로 해서 원앞이라 했고 또 거창, 김천간 주통로인 관계로 주막이 번성해 주막마을로도 불렸는데 1960년대 초까지도 시장이 열렸었다.
상좌원을 지나 황계천 건너에 있는 도동마을은 문도동(聞道洞)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也)”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따왔다고  한다.
상좌원과 도동마을 중간 모성산 끝자락에는 1625년 상좌원 출신인 이장원(李長源)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처음 세웠다가 1949년 다시 세운 모성정(慕聖亭)이 높이 서 있다.
    
김천 최대의 대나무밭이 있는 금평리
↑↑ 광암정
ⓒ 김천신문

금평리(金坪里)는 조선시대로부터 1914년까지 김산군 과곡면에 속했었는데 1934년 구성면이 되고 1971년 금곡(팔고개), 광수(넘머리)를 금평1리로  두곡(파실), 새터(고숲)를 금평2리로 분동했다.
마을의 형성은 조선 선조 때 이웃한 기를에서 의병장 여대로(呂大老)가 임진왜란 직전에 이거해 마을을 개척한 후 성산여씨 집성촌을 이뤘다.
가제산과 송림산 사이에 위치하며 조마면, 지례면과 경계를 이루는 금평1리는 넘머리로 불리는 광수(廣首), 팔고개로 불리는 금곡(金谷) 두 마을로 구성돼 있다. 광수라는 지명은 마을의 형세가 병과 같이 생겨 입구는 협소하지만 들어갈수록 넓어진다는 뜻으로 넓은머리, 넘머리라 하고 한자로 넓을광(廣)자에 머리수(首)자를 써서 광수(廣首)라 했다. 광수마을 성산여씨 재실인 광암정(廣岩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1872년 건립됐으며 여영건(呂永建)이 세운 서당 야귀재(夜歸齋)도 마을의 자랑이다.
팔고개는 지례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뒤 가제산 자락 똥재와 송림산 자락 초롱산 사이의 고개가 여덟팔(八)자를 뒤집어 놓은 형세인지라 팔고개라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 마을에서 지례로 넘어가자면 여덟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팔고개라 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의 유허비가 섰는데 여대로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지례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파실은 옛날 두릉(杜陵)으로도 불렸는데 1900년대 초부터 마을에 콩(豆)이나 팥을 많이 심어 두곡(豆谷) 또는 팥실이라 했다가 나중에 파실로 변했다고 전한다. 
    
옛날 역이 있던 작내리
↑↑ 의산서당
ⓒ 김천신문

작내리(作乃里)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장천, 관평마을로 불렸는데 1914년 두 마을을 합해 작내(作乃)라 하고 석현면에 소속됐다가 1934년 구성면 작내리가 됐다.
울안 마을은 의성김씨 10세손 김승조(金承組)가 조선 중종 때 울안으로 이거한 후 의성김씨 집성촌을 이루며 대이어 살았다. 울안이라는 지명은 의성김씨가 한 울타리 안에 살았다 해서 붙여졌으며 한자로는 담장장(墻)자를 써서 장내(墻內)라 했고 넓은 들판을 보고 모여들어 이룬 마을이란 뜻으로 관평(觀坪)으로도 불리는 새터는 1800년대 말 달성서씨 서정복(徐正福)이 이거한 이래 달성서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았다.
새터 위쪽에는 역촌, 역마, 평지마 등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시대 때 설치돼 김천역에 딸린 속역이었던 작내역(作乃驛)이 있던 마을로 평지마 못 미쳐 길 좌측 장승배기라 불리는 곳에 조선시대 말까지 역이 있었다고 한다.
울안마을에는 의산서당(義山書堂)이 있는데 1864년(고종1년) 의성김씨 문중에서 선조인 김여권(金汝權)을 제향하고자 경인사(景仁祠)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문중 자제 교육을 위해 서당을 함께 건립했다고 한다. 경인사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유명하다.
    
쌀 창고가 있었던 미평리
↑↑ 미호정
ⓒ 김천신문

미평(米坪)1리는 통상 미평으로 불린다. 마을에 쌀이 많이 생산돼 쌀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 쌀미(米)자를 써서 미평(米坪)이라 했다고도 하고 마을 뒷산인 송림산 아래의 들판이란 의미로 ‘밑들’로 부르고 한자로 미평(美坪)으로 썼는데 뒤에 미평(米坪)으로 바뀌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마을은 1600년대 초 은진송씨 송천상(宋天祥)의 차남 송해조(宋海祚)가 대덕 조룡에서 미평으로 이거해 마을을 개척한 후 대대로 은진송씨 집성촌을 이뤘다.
마을 입구에는 미호정(美湖亭)이라는 은진송씨 문중의 재실이 있어 유서 깊은 마을임을 짐작하게 한다.
미평2리 지품(知品) 마을은 남평문씨 집성촌으로 신라시대까지 지례현의 옛 이름인 지품천현(知品川縣)의 관아가 있던 소재지 마을로 ‘지품’이라는 지명은 ‘지푸다’라는 이 고장의 사투리에서 나온 것으로 마을 앞 감천물이 깊다는 데서 연유된 것이다.
지품마을 아래쪽의 운동은 마을 앞에 큰 웅덩이가 있어 웅동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운동(雲洞)으로 바뀌었다.
    
장저와 걸익의 고사에서 따온 상거리
상거(上擧)1리 벽계(碧溪)는 마을 앞 하원천의 냇물이 맑고 푸르다고 푸를벽(碧)에 시내계(溪)자를 써서 이름 한 것이다.
벽계 위에 있는 저익촌(沮溺村)은 대표적인 김녕김씨 집성촌으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 김문기(金文起)의 증손인 김숙연(金淑蓮)이 상주 관노(官奴)로 있다가 목사의 배려로 피신해 정착한 마을이다. 후손 김진원씨에 따르면 김숙연은 신분을 속이고 은거하면서 마을이름을 저익촌이라 했는데 이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에서 따온 것이다. 저익촌을 달리 지리대(知理臺)라고도 하는데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알고자 하는 옛 선인들의 교훈을 따르고자 함이다.
하원천 건너 상거2리로 오르는 길에 위치한 명덕마을은 이웃하고 있는 공자동과 백어동이 성현들의 이름을 딴 연유로 그 덕을 널리 밝힌다는 의미로 밝을명(明)자를 써서 명덕(明德)이라 했다고 전한다.
명덕마을로부터 한참 위쪽인 호초당산 아래 상거리로 속하는 백어와 대림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백어(伯魚)는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대항면에 속했었는데 1914년 석현면 상거리가 되고 1934년에 구성면으로 바뀐 후 1971년 백어와 대림이 상거2리로 분동했다. 백어는 공자 아들의 자(字)인 백어(伯魚)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웃한 공자동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대림(大林)은 마을 서쪽 호초당산(虎草堂山)에 큰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용과 호랑이의 지세에 자리 잡은 용호리
↑↑ 동학포교비
ⓒ 김천신문

작내리를 지나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용호리(龍虎里)는 대항면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개설돼 상거2리 백어마을과 함께 교통의 불편에서 벗어났다. 용호리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하북면에 속했던 마을로 하복호, 상복호, 각골, 와룡 등 네 마을로 이뤄졌으며 경주이씨와 김해김씨, 밀양박씨가 많이 살았다.
이 마을에는 용과 호랑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용호(龍虎)라는 지명은 마을 뒷산이 마치 용과 호랑이의 형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복호(伏虎)라는 이름도 마을 옆 개골산의 산세가 호랑이가 엎드린 형세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와룡(臥龍)마을 역시 마을 뒷산이 용이 누운 형세인데서 비롯됐다. 와룡은 원래마을 뒷산 약수골에 마을이 있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로 폐동이 된 후 현재의 위치로 이주한 마을로 앞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아랫복호는 아랫마로도 불리며 새로 마을이 들어섰다 해서 새터라고 했다. 각골은 연안이씨가 여러 집 살았으나 대부분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두 가구만이 남아 있다.
하복호 마을 입구에는 동학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마을에 머물며 포교활동을 했음을 기념해 세운 포교기념비가 있다.
    
감천변 절경을 자랑하던 구미리
감천을 사이로 미평마을과 마주하며 국도변에 자리한 구미리(九尾里)는 구미, 무릉 두 마을로 이뤄졌다.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구미, 방산과 상북면에 속한 무릉리였는데 1914년 구미리로 통합되고 1934년 구성면이 됐다.
1933년 홍수로 구미에 있던 석현면사무소 청사가 유실되자 1934년 석현면과 과곡면을 통합해 구성면으로 하고 신청사를 상좌원에 세운 것이 현재의 구성면사무소이다.
구미(九尾)의 원래 지명은 꼬리미(尾)자가 아니라 아름다울미(美)자를 썼다. 이는 배밭골, 상여바위, 복숭아나무골, 매봉, 선창, 송정, 샘골, 흔들바위 등 마을 주변에 아홉 곳의 경승지가 있어 구미(九美)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꼬리미(尾)자의 구미(九尾)로 바뀌었다.
폐교된 방산초등학교를 지나 우측으로 들어서면 무릉마을이 있다. 양녕대군의 후손인 전주이씨 이정로(李亭老)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 뒤에 복숭아밭이 많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했다가 이를 줄여 무릉(武陵)으로 지명을 삼았다.
    
숯가마가 있었던 임평리
구성면사무소가 있는 상좌원을 지나 국도 3호선을 따라 가다 구미리 무릉동에서 우측으로 901호선 지방도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면 탄동과 임평으로 이뤄진 임평리(任坪里)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상북면에 속했었는데 1914년 탄동과 합해 석현면이 되고 1934년 과곡면과 합해 구성면 소관이 된 마을이다.
임평(任坪)은 마을 뒷산인 돛대봉으로 인해 마을이 행주형(行舟形) 즉 배가 떠나가는 형세인지라 바닷가라는 뜻이 담긴 임바다(임바대)로 불리다가 임평으로 변했다고 한다.
임평 아래 탄동(炭洞)은 과거 마을에 수목이 울창해 숯을 굽던 숯가마가 있어 숯가매실이라고 했다가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숯탄(炭)자를 써서 탄동이라 했다. 임평은 경주최씨 집성촌으로서 문중재실인 탄모재(炭慕齋)가 마을 앞에 있다.
    
기우제를 올렸던 임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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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리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임천리(林泉里)는 산정, 단수, 장자동, 사기점 등 네 마을이 901호선 지방도 변에 위치하고 있다. 임천리는 조선시대 말까지 지례현 상북면으로 속했다가 1914년 석현면, 1934년 구성면으로 이관됐다.
임천이라는 지명은 1914년 마을 주변 산에 수풀이 우거지고 샘이 많아 수풀임(林)에 샘천(泉)자를 써서 임천(林泉)이라 했다.
산정마을 뒷산 좌지봉에 정자가 있어 산정(山亭)이라 불렀는데 인근마을에 문제가 생기면 마을대표가 이 정자에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한다.
장자동은 원래 큰 부자를 뜻하는 장자동(長者洞)이었는데 장자동(長子洞)으로 바뀌게 된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이 마을에 큰 부자가 살고 있을 때 각처에서 걸인들이 찾아 들었다. 어느 날 고승이 찾아와 시주를 요구하자 이를 박대했고 이에 스님이 크게 노해 마을 뒤 와우형(臥牛形)의  황소고개 지맥을 끊으니 부잣집은 점차 망했다고 한다. 이후 마을이름을 장자동(長子洞)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단수마을은 1850년대 경주이씨가 이거해 마을을 개척했는데 마을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단계(丹桂)라 했다가 나중에 단수(丹樹)로 고쳤다. 사기점은 조선시대에 충청도의 흙을 가져다 사기그릇을 구워 냈다고 사기점(沙器店)이라 불린다. 용소천(龍沼泉)은 가뭄이 들면 지례현감이 제단을 차리고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사기점이 있던 월계리
무릉천을 경계로 임천리와 마주하고 있는 월계리(月溪里)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상북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계리로 고치고 김천군 석현면으로 편입됐으며 1934년 구성면 관할이 됐다. 아래압실, 윗압실, 골마, 북동, 사점 등 다섯 마을로 구성됐는데 지금은 북동과 사점에는 한 가구씩만 거주하고 있다.
월계(月溪)라는 지명은 산이 깊고 시냇물이 맑아 달이 시내에 비치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무릉천 주변으로 은진송씨가 많이 살았다.
마을 앞에 숲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답다 해서 임계(林桂)로 불렸던 아래압실과 월평(月坪)으로 불린 윗압실이 상하로 배치된 월계리는 풍수지리로 볼 때 마을의 형세가 포란압형(抱卵鴨形) 즉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오리압(鴨)자를 써서 압실(鴨室)이라 했는데 지금은 앞실로도 쓴다.
윗앞실 위에 있는 골마는 옛 성현의 의(義)를 본 받아 지키며 살라는 뜻으로 의리곡(義理谷)이라 했는데 나중에 이리골, 골마로 변했다. 무릉천 맞은편은 옛날 사기그릇을 굽던 장인촌으로 성황을 이뤘다고 하나 모두 타처로 떠나고 지금은 한 가구만이 마을터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사기그릇을 굽던 가마터와 동제를 올리던 압제당이 남아있다.
    
백두대간 우두령 아래 첫 마을 마산리
임천리에서 영동 방면으로 한참을 가다보면 영동군 상촌면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지례현 상북면에 속했던 마을로 본동, 묵은점, 달암, 음비, 찬물내기 등 크고 작은 여섯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본동, 묵은점, 수부동만 남고 나머지는 폐동됐다. 마산리(馬山里)는 경주최씨, 파평윤씨, 전주이씨 집성촌으로 마산초등학교가 1963년 개교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으나 주민수가 격감하면서 1980년 분교로 격하됐다가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말의 등과 같이 굽어진 형상인 마을 앞산 마산(馬山)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본동 가기 전 좌측에 있는 묵은점은 과거 마을에 사기그릇을 만들어 사점(砂店)이라 했는데 뒤에 그릇을 굽지 않게 되자 구사기점, 묵든점, 묵점 등으로 불리게 됐다. 본동으로부터 안쪽 골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수부동은 마산리에 속한 여섯 마을 중 가장 사는 형편이 낫다고 해서 부유할부(富)자를 쓰고 1800년대 말 문광수(文光壽)라는 선비가 128세까지 장수해서 목숨수(壽)자를 써서 수부동(壽富洞)으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부동 뒷골에는 일제시대 말까지 금을 캐던 금광이 있었다.
마을 뒤로는 충북 영동군 상촌면으로 넘어가는 우두령(牛頭嶺) 고개가 있는데 지형이 마치 소의 머리와 같고 소가 질매를 진 것처럼 휘어져 있다고 질매재로도 불린다.
    
▢구성면의 문화유산
    
방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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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방초정(芳草亭)은 연안이씨 집성촌인 원터마을 입구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다락 형태의 정자이다. 이 마을 출신 선비로 호를 방초정(芳草亭)이라 했던 이정복(李廷馥 1575~1637)이 1625년(인조3년) 자신의 호(號)를 따 건립한 것이다.
1689년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중건하고 1727년에 다시 보수했으나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수해로부터 안전하도록 현 위치로 옮겨 중수했다.
2층 다락 사면에 문을 달아 이를 걷어 올리면 넓은 마루가 되고 내려 닫으면 방이 되는 실용적인 구조로 설계된 방초정은 아궁이를 따로 설치해 불을 때면 겨울에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정자 앞 연못인 최씨담의 중앙에는 섬을 두개 배치했고 가장자리에 땅버들나무와 백일홍을 심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같은 정원형태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성촌의 정자와 연못 조경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도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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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원(五賢院), 도동사(道洞祠)란 이름으로도 불린 도동서원(道洞書院)은 1771년(영조41년) 이숭원(李崇元), 이숙기(李淑琪), 이호민(李好悶), 이숙함(李淑琀), 이후백(李後白) 등 상원과 상좌원 출신 연안이씨 문중의 이름난 다섯 선비를 제향하기 위해 도동마을에 세웠다.
1871년(고종8년) 서원 철폐령으로 헐린 후 방치되다가 이숭원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기 위해 상좌원에 경덕사를 별도로 세웠다.
1918년 서원터에 명례당(明禮堂)이라는 이름으로 서당을 건립해 운영했다.
    
하회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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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여씨 종택인 구성면 광명리 기를마을 하회댁(河廻宅)은 여명주(呂命周 1681~?)에 의해 3년간의 공사 끝에 69칸 규모로 건립됐다고 전해진다. 1870년 동학농민항쟁 중 일부가 소실되고 1936년 병자년수해 때 물에 잠기면서 사랑채가 붕괴됐다.
독립운동가 여환옥(呂煥玉 1896~1963)의 생가이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8호로 지정됐다.
    
□구성면의 특산물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구성자두
    
구성자두는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김천의 대표적인 특산물 중 하나이다. 자두는 324농가가 175ha에서 2천82톤을 생산, 김천관내 1위가 아니지만 맛, 때깔 등 품질에서는 2위 가라면 서러울 정도여서 ‘구성’하면 ‘자두’, ‘자두’하면 ‘구성’을 떠올리게 된다.
사단법인 김천자두협회와 영농조합법인 김천자두연합회 사무실이 구성면 하강리에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구성에는 양파 역시 유명하다. 273농가가 163.2ha에서 9천720톤을 생산, 지역경제에 큰기여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11일 구성면 광명리 앞들에서 경상북도농업기술원이 주최하고 김천시농업기술센터가 주관, 양파 기계수확 현장연시회가 열려 구성이 양파주산지임을 입증했다. 
   
□구성면의 산업체
    
내충격 고강성 pvc rib관 생산기업 ㈜코리아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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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면 송죽리 소재 (주)코리아테크는 상수도관, 하수도관, 전기통신관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 2004년 설립돼 2008년 8월 현 위치로 이전, 오늘에 이르렀다.
환경의 소중함을 경영의 최우선에 두고 회사를 운영해온 성금화 대표는 이 계통에서 30여년간 근무한 경험을 살려 내충격성과 고강성을 겸비한 pvc  rib관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특허청에 등록하고 국가 규격(KS)으로 제정됐다. 또한 같은 제품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KS 인증을 받았으며 조달청으로부터 우수 제품으로 인정받아 공급함으로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주)코리아테크는 설립 이듬해인 2005년 한국산업안전공단으로부터 클린사업장 인증을 받았고 같은 해 ISO 9001·14001 품질·경영·환경인증을 받았으며 2006년 K마크·Q마크 인증,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신기술 벤처기업과 신기술 기술혁신개발사업자 선정 등 대외적인 인정을 받았다.
또한 2007년에는 친환경상품 인증을 받았으며 그 후 기술혁신형중소기업인 이노비즈기업 확인을 중소기업청으로부터 받았다. 또한 미국 NSF기관으로부터 전기통신파이프에 대해 국내 최초로 제품인증을 받아 현재 미군부대에 스펙화 돼 납품 중에 있다.
현재 (주)코리아테크가 보유하고 있는 각종 인증 및 등록증으로는 국가 규격(KS) 4가지, 단체규격 1가지, 특허청으로부터 25가지의 등록증 등이며 우수한 품질과 기술력을 대외적으로 검증받은 자랑스러운 기업이다.
㈜코리아테크는 내충격 고강성 PVC rib관은 관재의 단면현상이 횡종형 리브구조로 돼있어 제품 중량이나 부피는 줄이면서 단면 2차 모멘트를 증대시켜 응력(stress)과 변형률(strain)에 대한 저항을 크게 해 외압에 강하게 하는 역학을 제품에 적용한 구조여서 여러모로 아주 경제적인 제품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구성면의 학교
    
지례중학교 구성분교장
구성면 송죽리 800번지에 위치한 지례중학교 구성분교장은 1975년 11월 14일 구성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이듬해 3월 3일 개교됐으며 1999년 3월 1일 지례중학교 구성분교장으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다. 지례중학교 구성분교장은 2015년 현재 제35회에 걸쳐 2천165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구성초등학교
구성면 상원리 100번지에 위치한 구성초등학교는 1940년 4월 15일 구성공립심상소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4월 25일 개교됐으며 이듬해 3월 1일 국성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70년 9월 12일 방산국민학교가 분리되고 1994년 9월 1일 구성국민학교 과곡분교장이 설치됐으며 1996년 3월 1일 구성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99년 3월 1일 방산초등학교가 통폐합됐으며 1999년 9월 1일 구성초등학교 양각분교장이 설치되고 구성초등학교 임천분교장이 폐교됐다. 2009년 3월 1일 구성초등학교 과곡분교장이, 2011년 3월 1일 구성초등학교 양각분교장이 폐교됐으며 2015년 현재 제70회에 걸쳐 3천94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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