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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면 지도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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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지례면은 삼국시대 가야, 신라, 백제의 접경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신라 진흥왕 때는 상주 사벌주에 속해 지품천현(智品川縣)으로 불렸고 757년 개령군으로 속하면서 지례현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 때 성주 경산부에 예속됐다가 공양왕 때 처음으로 중앙에서 감무(監務)를 파견했다.
지품천이라는 지명은 ‘깊다’의 사투리인 ‘지푸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구성면 구미리와 미평리 사이의 감천 하폭이 좁고 하상이 높아 물이 수시로 역류하면서 지례 교리, 상부리 일대가 늪지대를 이뤘는데 큰비가 내리면서 구미리 일대의 강폭이 넓어져 물의 흐름이 원활하게 됐고 이때부터 지례일대에 물이 빠져 현재와 같이 경작지와 마을이 들어설 수 있었다.
지례를 구성(龜城)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면소재지의 진산인 주악산 아래 있던 저수지에서 거북모양의 바위가 출토된 이후로 일대 산성을 구산성(龜山城)이라 했고 여기서 유래돼 지례의 별칭으로 불렸다.
뒤에 조선이 개국돼 태종 때인 1410년 지례현에 현감이 파견됐으며 1896년 군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김천군 지례면으로 예속됐다.
지례는 감천의 상류에 위치한 관계로 신석기, 청동기인들이 들어와 선사시대문화를 이뤘는데 똥재는 가야문화권과의 교류통로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지례전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의병전이 전개된 호국의 고장이며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장지도의 절개와 스승을 부모의 예로서 봉양한 제자 윤은보와 서즐의 효행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오른 충효의 고장이기도 하다.
□지례의 마을과 전설
옛 지례현의 중심 상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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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공재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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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함께 지례면소재지에 해당하는 상부리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하현면에 속한 마을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현(下縣), 상현(上縣), 장촌(匠村), 동산(東山)을 합해 상부리(上部里)라 했다.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장촌, 동산마을이 유실되고 상부, 하부마을만이 남아 두 마을이 통합됐다.
이 마을은 조선 성종 때 문약(文略)이라는 선비가 합천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남평문씨 순평공파(順平公派)가 집성을 이뤘다.
상부리 뒷산인 봉화대산과 주악산에는 봉화대와 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지례가 군사적, 교통적으로 요충지였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 산에는 고려가 망하자 지례에 낙향해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한 반곡 장지도(張志道)의 묘소가 있다. 제자인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이 봉화대산과 주악산사이로 난 고개를 쉼 없이 드나들며 지극정성으로 스승의 시묘살이를 하는 효심에 탄복한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줘 제사를 지내게 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정성고개가 있다.
이 마을 또 하나의 명물은 감천제방이다. 잦은 수해로 고통 받는 현민들을 위해 1770년에 도임한 이채(李采 1745~1820) 현감은 재임 중 힘을 다해 제방을 쌓았는데 현민들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공제(李公堤)라 불렀다고 한다.
지례면소재지인 교리로부터 좌측으로 감천을 건너 울곡리 방면으로 가다보면 방가산으로 불리는 산 아래에 상부2리 남산마을이 있고 성주로 연결되는 똥재가 이 산을 넘어간다.
남산마을은 조선시대에 지례현 하현면에 속해 남산, 동산으로 불렸는데 1936년 인근의 장촌(匠村)이 수해로 유실된 후 상부리로 통합되고 1993년 상부2리로 분동됐다.
똥재는 동쪽에 있다고 동재(東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똥재가 됐다고 한다. 일설에는 과거 지례현이 성주의 관할로 있을 때 성주목사의 호출을 받고 급히 성주로 달려갈 때마다 현감을 태운 가마꾼들이 길이 험해 똥을 쌀 정도여서 똥재라 했다고도 한다.
이 마을의 지명은 현청소재지인 교리로부터 동쪽에 있는 산 아래에 있다 해서 동산(東山)이라 했는데 마을남쪽 야산에 남산사(南山寺)라는 절이 있어 남산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이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또 이 마을은 지례돈(知禮豚)으로 불리는 토종흑돼지의 산지로 이름이 났다. 외래종과 달리 순흑색에 온순하고 작은 체구가 특징인 지례돈은 비계가 적고 불포화산이 다량 함유돼있어 쫄깃하고 담백한 맛으로 정평이 나 조선시대 궁중에까지 진상됐다.
이 마을의 흑돼지양돈장은 1976년부터 지례신용협동조합에서 운영하다 지금은 개인이 운영을 하고 있는데 개량종과 달리 성장속도가 늦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 탓에 사육두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지례향교가 있는 교리
면사무소와 관공서가 운집한 지례면소재지인 교동은 신라 진흥왕 때부터 사벌주(상주)에 속한 지품천현이라 했는데 경덕왕 때 지례현으로 바꾸고 고려 공양왕 때 감무(監務)를 파견했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하현면에 속했는데 조선 세종8년인 1426년에 이 마을에 향교(鄕校)가 세워지면서부터 교동(校洞), 교촌(校村), 향교마 등으로 불렸고 1914년 인근 범밧골(富坪)을 합해 교리(校里)라 했다.
지례는 백제, 신라가 국경을 접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전라도와 경상남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일찍이 주목을 받았고 문물의 집산과 교류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특히 구 도로를 중심으로 향교 맞은편 일대를 일컬어 장터라 불렀는데 이는 교리가 오래전부터 지례, 부항, 구성, 증산, 대덕 등 속칭 지례 5개면 상권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지례장이 섰기 때문이다.
지금의 지례면사무소와 초등학교, 지서 일대가 지례현 관아와 객사 등이 밀집해있었던 중심지였고 또 상권의 중심인 장터가 소재한 교리를 수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현감 이채(李采)는 지례방천을 축조하기도 했다.
지례현 관아에는 동헌을 수경당(垂慶堂)이라 했고 현감 밑에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30인, 인리 38인, 지인 20인, 사령 19인, 관노 20인, 관비 25인이 있었다.
장터 맞은편의 주악산자락에는 유서 깊은 지례향교가 자리 잡고 있어 조선시대 지례현 일대 청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또 지례현은 깊은 역사만큼이나 이름난 인물도 많이 배출됐다. 특히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지례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한 장지도(張志道)와 후손이 없는 스승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긴 제자 윤은보(尹殷保), 서즐(徐)이 그중 으뜸이다. 특히 서즐은 스승의 기일에 폭설로 길이 막혀 제물을 구하지 못해 통곡하자 효성에 탄복한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는 정성고개 전설의 주인공이다.
마을 입구에는 김천에서 가장 오래된 정려각인 윤은보 서즐 정려각과 유허비가 나란히 서서 지례가 유서 깊은 충효의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교2리로 속하는 온평과 부평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하현면으로 속해 부평동이라 했고 1941년 인근 교리로 통합됐다가 1971년 온평과 함께 2리로 분동됐다.
도로변에 접한 온평은 조선 고종 때 정선전씨 한 선비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의 지세가 평온하고 따뜻하다고 따뜻할온(溫)자에 평평할평(坪)자를 써서 온평(溫坪)이라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범밧골 뒷산 큰 바위에 옛날 호랑이가 올라앉아 마을을 내려다봤다고 범바위골이라는 지명을 얻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범밧골로 변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호랑이가 출몰했던 이 바위를 정성으로 섬겼는데 그 덕인지 마을에 큰 부자가 나오고 자손들이 번창해 부유할부(富)자를 써서 부평동(富坪洞)이라고도 했다.
부항댐 아래 자리 잡은 도곡리
도곡리(道谷里)는 도래실, 주치밭골, 문질, 송천, 신평, 가좌 등 여섯 마을로 나눠져 있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상현면에 속하다가 1914년 지금의 도곡2리인 송천, 신평과 합해 지례면 도곡리로 고쳤고 1971년 도래실, 주치밭골, 문질을 합해 도곡1리로 분동했다.
도래실은 옛날 마을입구에 부항천으로 합류하는 도랑을 가로지르는 큰 돌다리와 정자나무가 있어 마을로 들어가자면 돌다리를 건너고 정자나무를 돌아가야 한다고 마을이름을 돌아실, 돌곡이라 하고 한자로 도곡(道谷)이라 적었는데 이것이 음이 변해 도래실로 됐다고 한다.
도래실 안쪽에는 주치밭골로 불리는 마을이 깊이 들어앉아 있는데 옛날 이 마을에 약초와 염료로 쓰이는 자초(紫草)가 많이 자라 마을이름을 자초밭골, 주치밭골, 주치골이라 했고 한자로 자초곡(紫草谷), 주치곡(朱致谷), 지전곡(芝田谷)이라 했다는 것이다.
문질은 도래실에서 부항면 방면으로 가다가 지례, 부항 경계지점에 있었는데 부항댐이 들어서면서 폐동됐다.
옛날 이곳에 큰 주막집이 있었고 부항과 지례의 경계에 위치한 대문에 해당한다고 문길(門吉)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문질로 불렸다.
부항과의 갈림길인 상부삼거리에서 대덕방향으로 국도3호선을 따라가다가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인 도곡2리는 송천과 신평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상현면으로 속했었는데 1914년 이웃한 가좌, 주치골, 문질, 도곡리를 합해 도곡리라 하고 지례면으로 했다가 1971년 송천, 신평, 가좌가 도곡2리, 1993년 가좌가 3리로 분동했다.
문의봉 아래 자리 잡은 신평은 조선 중종 때 상부리에 살던 성산전씨 전시우(全始雨)라는 선비가 현재의 신평리로 이주하면서 송천마을 위에 새로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웃새터(上新基)라 했다가 뒤에 헌종 때 전진욱(全鎭旭)이 신평(新坪)으로 고쳤다.
또 달리 밀밤, 밀뱅이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이 마을에 밀농사를 많이 지었고 뒷산인 문의봉에 밤나무가 많아 붙은 별칭이라고 한다.
신평과 상부리 사이에 지례공단이 자리한 송천마을은 도래실에서 이주해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엔 새터라 하다가 임진왜란 때 피난 온 한 선비가 소나무가 우거진 문의봉과 맑은 감천변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송천(松川)이라 개명해 주었다고 한다.
1993년 도곡2리에서 3리로 분동된 가좌마을은 감천너머 여시밭골과 큰골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로 남평문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가좌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이 마을이 남면 부상과 함께 김천에서도 유명한 양잠지였던 관계로 더할가(加)자에 누에잠(蠶)자를 써서 가잠(加蠶)이라 했다가 뒤에 음이 변해 가좌(加佐)가 됐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이 마을 뒷산인 가좌고개가 해인사에서 직지사를 연결하는 최단코스로 스님들이 주로 고개를 이용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도래실과 주치밭골을 거쳐 직지사로 바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해인사에서 직지사를 향해 가던 한 고승이 마을입구에 있던 고목 아래에서 휴식한 후 일행들을 재촉하며 “가자, 어서 저 고개를 넘어가자”고 재촉했다 해서 가자고개라는 이름을 얻었고 마을이름도 가자로 했다가 뒤에 가좌로 변했다는 것이다. 가좌마을 남쪽 감천변에는 석수바위로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있어 절경을 자랑했는데 2002년 수해 때 바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효종임금 공주의 태실이 있던 관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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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을산태봉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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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봉 아래 자리 잡은 관덕리(觀德里)는 활람, 새터, 원당, 구수골, 고석, 양산 등 여섯 마을로 구성돼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상현면으로 속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일대 마을을 합해 관덕리라 했고 활람과 구수골이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새터, 원당과 함께 관덕1리에 속하는 활람마을은 궁을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로 조선 중종 때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를 역임한 김희수(金羲壽)가 사림파와 훈구파의 충돌로 빚어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은 후 활람으로 낙향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김해김씨 경안공파(敬安公派) 집성촌을 형성해 오고 있다.
활람이라는 지명은 뒷산의 형세가 굽은 활을 닮아 활궁(弓)자에 굽을을(乙)자를 써서 궁을산(弓乙山)이라 한 것이 뒤에 마을이 지례현 소재지로부터 남쪽에 있다고 궁남(弓南)이라 적고 활람이라 부르게 됐다.
구전에는 이 마을에서 활을 쏘면 산을 넘어 이웃한 여배리 속시(束矢)까지 화살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를 통해 관덕리(觀德里)라는 지명이 이 마을에 있었다는 활쏘기 연습장인 관덕정(觀德亭)에서 유래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활람의 또 다른 자랑은 마을 옆 궁을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숙명(淑明), 숙경(淑敬) 두 공주의 태실을 빼놓을 수 없는데 태실의 존재를 통해 이 마을이 왕실에서도 주목한 명당이었음이 확인됐다.
태실은 왕손인 왕자와 공주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전국의 명당에 태(胎)를 안치한 것으로 궁을산에는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孝宗)의 3녀 숙명(淑明) 공주와 6녀 숙경(淑敬) 공주의 태를 공주의 오빠인 18대 임금 현종 즉위 원년인 1660년에 안치했다.
활람마을 입구에는 1638년(인조16년) 김종해(金鍾海)가 창건한 만취정(晩翠亭)이라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있다. 활람마을로부터 안쪽으로 증산면 황항리로 이어주는 천상봉 노루목재 아래 자리한 구시골 마을은 우리 고장의 유일한 봉산이씨(鳳山李氏) 집성촌으로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서 조선 고종 때 이춘욱(李春旭)이란 선비가 이거한 이래 대대로 봉산이씨가 집성을 이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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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취정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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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골이란 지명은 마을일대의 아홉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 마을에서 합쳐져 구수골(九水谷)이라 했다고 한다.
옛날 마을에 있는 구슬바위 밑에 구슬이 들어있어 그 구슬을 꺼내려다 벼락이 쳐서 그냥 덮었다는 전설로 구슬골이라 한 것이 음이 변해 구수골, 구시골이 됐다는 설도 있다. 구슬바위는 현재 김태명씨 집 마당에 잘 보존돼 있다.
지역 유일의 물레방아간이 있는 여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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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효부비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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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리(汝培里)는 국도 3호선을 따라 가다가 대덕면과의 경계 직전에 국도 좌우로 대덕면, 증산면, 부항면과 접하고 있는 마을로 너배, 속수, 도틀 등 세 마을로 이뤄져있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상현면으로 속했다가 1914년 이들 세 마을을 합해 여배리로 고쳤고 1971년 너배마을이 여배1리, 속수와 도틀이 2리, 뒤에 도틀이 3리로 분동됐다.
대덕방면 국도 우측으로 자리 잡은 너배마을은 조선 선조 때 벽진이씨 이영연(李永年)이란 선비가 임진왜란을 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벽진이씨가 집성을 이뤘다. 입향조인 이영연을 기리는 재실 광천재(廣川齋)가 감천을 굽어보고 있다.
너배 또는 여배라고 하는 지명은 마을 앞 감천 주변 논에 물을 대는 넓고 큰 물막이 보(洑)를 나무로 쌓았는데 이 보(洑)를 일컬어 ‘넓은보’ 또는 ‘널보’라고 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마을 앞 감천변에는 감천물을 끌어다 방아를 찧던 거대한 물레방아가 세월의 흔적을 담은 채 멈춰 있어 운치를 더한다.
너배마을과 마주보며 증산으로 넘어가는 가목재 고개 초입에 자리 잡은 속수마을은 조선 숙종 때 평택임씨 임재출(林裁出)이란 선비가 입향한 이래 마을이 형성됐는데 평택임씨가 집성을 이뤘었다.
속수라고 하는 지명은 이웃한 관덕리 활람마을의 관덕정에서 쏜 화살이 이 마을까지 날아와 화살을 주워 묶어갔다고 묶을속(束)자에 화살시(矢)자를 써서 속시(束矢)라고 한 것이 음이 변해 지금은 속수가 됐다.
마을 앞 국도변에는 남평문씨 문용락(文龍洛)과 부인 성산전씨(星山全氏)의 효자효부비가 나란히 섰는데 성산전씨 부인은 효자였던 남편 사후에 집안을 바로세우고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해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속수마을로부터 삼방산자락 골 깊이 자리한 도틀마을은 숯을 굽던 화전민들이 정착해 형성된 마을이다.
도틀이라는 특이한 지명은 마을일대 들판에 돌복숭아가 많아 복숭아나무도(桃)자에 평평할평(坪)자를 써서 도평(桃坪)이라 하고 우리말로 도들이라 했는데 이것이 음이 변해 도틀이 됐다.
마을 뒷산은 지례, 대덕, 증산 등 세 면의 중심에서 방위를 나타낸다는 삼방산(三方山)이 있는데 큰 인물을 내는 명산으로 알려져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고 산허리를 자르는 길까지 냈다고 한다.
절의지사 장지도가 살았던 마을 거물리
큰재로 불리는 고개를 중심으로 발람실과 거무실 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를 합해 거물리(巨勿里)라 한다.
1630년 남평문씨 문필장(文弼章)이 정착한 후 마을이 부유해지기를 기원하며 처음에는 지명을 금곡(金谷)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하현면에 속해 거물리, 반목리로 나뉜 독립된 마을이었는데 1971년 거물리로 통합됐다.
천상봉 아래 자리 잡은 발람실은 원래 반나무실었는데 마을인근에 울창한 소나무숲이 있어 목재생산지로 유명해 짝반(伴)자에 나무목(木)자를 써서 반목(伴木)이라 하고 반나무실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밤나무실, 발람실, 바람실 등으로 불렸다.
이 마을은 고려 말 충신인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의 고향으로도 유명한데 옛 선비들이 마을에 들러 시를 지어 선생의 학문을 흠모하고 마을의 절경을 노래했다.
반곡마을과는 큰 재를 사이로 나눠져 있는 거무실은 사발봉 아래 자리 잡고 있는데 옛날 이름난 지관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를 살피고는 거미줄에 이슬이 맺혀있다는 주사결로설(蛛絲結露說)의 길지로 꼽았다는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똥재 언저리에 자리 잡은 대율리
지례에서 성주방면으로 이어주는 똥재 입구에 자리 잡은 대율리는 한배미, 고념, 웃마, 주막 등 네 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하현면으로 속했다가 1914년 대율리(大栗里)로 통합됐다.
이 마을은 조선 숙종 때 조마에서 신안주씨(新安朱氏) 주봉래(朱鳳來)가 입향한 이래 집성촌을 이루기도 했는데 지금은 밀양박씨, 남평문씨 등 여러 성씨가 혼재돼있다.
한배미는 마을 남쪽골짜기 일명 모팅이라 불리는 곳에 야생 밤나무가 많아 생긴 지명으로 큰대(大)자에 밤율(栗)자를 써서 대율(大栗)이라 했다고 한다.
한배미와 주막마을로부터 똥재 방향으로 골 깊이 들어선 고념마을은 조선 영조 때 선산 해평에 살던 남평문씨 문귀봉(文貴鳳)이 조마 삼산을 거쳐 이 마을에 정착한 후 조용히 옛일을 회고하며 살고 싶다 해서 옛고(古)자에 생각염(念)자를 써서 고염(古念)이라 한 것이 음이 변해 지금은 고롱개로 불리게 됐다.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로 유명해진 신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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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산재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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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 성주군 외증산면에 속한 등터는 상신평 또는 등현(登峴), 신평은 하신평, 삼실은 골마, 독뫼, 양촌 등으로 불렸다. 1906년 지례군 외증산면으로 편입됐다가 1914년 삼실, 신평, 등터를 합해 지례면 신평리(新坪里)라 했고 1971년 신평과 등터를 신평1리, 삼실은 신평2리로 분동했다.
등터는 1850년 김해김씨 경안공파 김진규가 관덕리 활람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집성을 이뤄 살았는데 당시 지례와 성주에 살던 사람들이 지대가 높은 똥재를 거슬러 올라와 터를 잡고 살았다고 오를등(登)자에 고개현(峴)자를 서서 등현(登峴)이라 적고 등재, 등터로 마을이름을 삼았다.
등터로부터 똥재 정상 사이에 장고개로 불린 주막촌이 있어 지례장을 보러다니는 길손들이 이용했다고 하는데 30여년 전 폐동이 되고 지금은 지명으로만 남았다.
등터 아래는 청주정씨 일가들이 주로 살았던 신평마을이 있는데 본디 조선 광해군 때 화순최씨 최유능이 조마 신안에서 이거해 정착한 후 새로 마을을 세웠다고 신평(新坪)이라 했다.
또 달리 이 마을에 옛날 큰 비가 왔을 때 천상봉 골짜기 물이 들이닥쳐 폐동이 되고 새로 마을을 세웠다고 신평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신평리로부터 천상봉 방향으로 좁은 산길을 따라 1km 남짓 오르면 마을 입구로부터 화사하게 단장을 한 삼실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숙종 때 성산전씨(星山全氏) 전수연(全壽延)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한양에서 낙향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성산전씨 일가가 집성을 이뤄 살았으며 지금도 성산전씨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다.
삼실(三室)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천상봉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을 중심으로 골마(高村), 독만(獨蠻), 양촌(陽村)으로 나뉜 세 마을이 있어 삼실, 삼곡(三谷)이라 했다고 전해지는데 뒤에 마을이 커지면서 한마을이 됐다.
삼실마을은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에 참여해 마을일대 환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는데 특히 마을입구를 혁신적으로 변모시켜 동구 밖 암각한 옛 글씨와 어우러져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마을로 변모했다.
염속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전리
조마면 신곡리와 울곡재를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이전리(泥田里)는 진바실, 해평, 불당골 등 세 마을이 염속산자락인 눈가리산 아래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전주최씨와 밀양박씨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와서 정착해 마을이 형성된 이래 성주이씨와 전주최씨, 신안주씨 등이 집성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성주군 외증산면으로 속해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지례면 이전리로 됐다.
마을의 본동이라 할 수 있는 진바실은 일대 토질이 진흙이어서 비가 오면 밭이 질척인다는 의미로 진밭실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진바실이 됐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진흙이(泥)자와 밭전(田)자를 써서 이전(泥田)이라 했다고 전한다.
진바실 마을 윗쪽으로는 높고 넓은 터에 배가 떠있듯이 마을이 들어섰다고 이름 붙여진 해평(海坪)마을과 옛날 절이 있었다는 불당골이 자리 잡고 있다.
해평은 예나 지금이나 마을에 우물이 없는데 이것은 풍수지리로 볼 때 배의 형상을 한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을 뚫는 격이 되므로 이를 경계해 우물을 파지 않고 불당골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는 것이다.
진바실과 해평, 불당골은 인근 울곡과 함께 염속산과 천상봉 사이에 놓인 명당으로 변란 시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길지를 소개한 ‘정감록(鄭鑑綠)’에도 올랐다고 한다.
신씨할머니 전설이 전하는 울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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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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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곡리(蔚谷里)는 도로변의 울실과 천산봉 자락의 안기터, 바깥기터 등 세 마을로 나눠져 있다.
본동에 해당하는 울실은 성주이씨 밀직공파 집성촌으로 이산우(李山佑)라는 선비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와서 정착한 이래 마을이 나무가 울창한 산에 둘러싸여 있다고 울창할울(蔚)자를 써서 울곡(蔚谷), 울실(蔚室)이라 했다고 한다.
천산봉 기슭에 안기터(內古), 바깥기터(外古)로 나눠져 있는 기터마을은 김녕김씨 김수남이라는 선비와 동래정씨 정기장(鄭起章)이라는 선비가 입향한 이래 대대로 터를 잡고 살겠다는 뜻을 담아 옛고(古)자에 터기(基)자를 써서 고기(古基)라 적고 고터라 했는데 뒤에 음이 변해 기터가 됐다.
내고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김녕김씨 집안의 한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3일 만에 천장에 기어오르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 이변이 일어났다. 주변에서 아이가 역적이 될 징조라고 수군거리자 이를 염려한 집안에서 호미를 불에 달구어 겨드랑이를 지졌다는 것이다.
이후 목숨을 잃어 우물에 묻힌 아기는 일주일 후 갑옷을 입은 채 땅으로 솟아나와 새밭들을 지나 천산봉 굴골로 들어갔는데 지금도 마을 뒤에 굴이 남아있고 굴에서 큰 칼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울실 앞 용시마골에는 신기한 묘지가 있는데 음력 유월 그믐날 묘 옆에서 잠을 자고나서 벌초를 하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것으로 지금도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종종 찾아온다고 한다.
울실마을은 고려 말 대학자요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이름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은거지로 마을 중앙에 불천위(不遷位) 사당인 보본사(報本祠)가 자리 잡고 있다.
이숭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지며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1392년(태조 원년) 정몽주가 피살된 후 순천으로 유배됐다가 그 역시 피살되고 말았다.
□지례의 문화유산
윤은보 서즐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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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은보 스즐정려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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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면 교리마을 입구에 있는 정려각으로 지례현 출신 윤은보와 서즐은 스승 장지도에 대한 지극한 효행으로 그 행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올랐다. 삼강행실도는 1436년(세종18년) 편찬한 교훈서로서 효행을 기록한 35편 중 31편이 중국의 사례이고 4편만이 우리나라의 이야기인데 이 가운데 ‘은보감오(殷保感烏)’ 즉 ‘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라는 제목으로 서즐과 윤은보의 행적이 수록되니 지례는 명실공이 예향(禮鄕)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이 장지도에게 배웠는데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을 하나같이 섬기기로 결의하고 성심껏 모셨고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시묘살이를 했다. 도중에 윤은보가 부친상을 당해 여막을 지키다가 회오리바람이 불어 날아갔던 향로를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이적이 일어났는데 스승을 어버이와 같이 섬기고 예를 다한 윤은보와 서즐에게 1432년(세종14년) 정려문과 벼슬을 내렸다”라고 기록돼 있다.
지례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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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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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면 교리에 위치한 지례향교는 1426년(세종8년) 정옹(鄭雍) 현감 재임 시에 창건됐으며 성종16년인 1485년에 김수문 현감이 명륜당을 중건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90년에 중건했다. 영조50년인 1774년에 사반루(思泮樓)가 세워졌다.
지례향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했으며 옛 과곡면을 제외한 구성면, 지례면, 부항면, 대덕면을 관할로 했다.
□지례면의 특산물
대표 특산물은 한우와 돼지
지례면의 특산물로는 한우와 돼지를 손꼽는다. 한우는 현재 전국한우협회 김천시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흥수씨 700두를 비롯한 116농가가 3천482두를 사육하고 있으며 돼지는 김인수씨를 비롯한 4농가가 9천342두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전국적인 명성을 확보하고 있는 지례흑돼지는 사육두수가 많지 않다.
농작물로는 양파가 으뜸이어서 107농가가 53ha에서 3천180톤을 생산하고 그 다음 많이 재배되는 대파는 50농가가 43ha에서 162톤을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례면의 산업체
친환경 PVC바닥재 생산 기업 ㈜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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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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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면 지례공단길 41번지에 위치한 (주)재영은 친환경 PVC바닥재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다. 지난 2007년 설립돼 대기업 OEM공급을 통해 구축한 생산능력 및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시장은 물론 글로벌 시장의 신흥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주)재영의 바닥장판은 특수 코팅 처리돼 뛰어난 내마모성과 얼룩 저항이 우수하고 안정성을 제공해 거실은 물론 방, 식당, 사무실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친환경 장판입니다. 일본, 중국 등 해외 30여개 나라에 수출하면서 기술력과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 받아왔습니다. 특히 2014년 6월 최신설비 증설과 더불어 20여개소의 국내대리점을 통해 ‘Jflor’란 자체브랜드로 대기업들이 과점하고 있는 국내 바닥재시장에 다양한 디자인과 고품질의 제품을 출시해 높은 호응을 받고 있으며 지난 4월 황금동에 제1호 Jflor 직매장을 개점했습니다.”
㈜재영 심택수 회장의 말이다.
(주)재영은 지난 5월 조달청 주관으로 진행된 군납 조달업체 경쟁입찰에 참가해 경쟁 대기업을 제치고 군납업체로 선정됨으로서 기업에 대한 신뢰도와 제품에 대한 품질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한편 지례면엔 21세기 초일류 PVC바닥재 생산 회사로 발돋움한 ㈜재영을 비롯한 대윤지오텍, 지례광업소, 대영산업 등 기업이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지례면의 학교
지례중·김천상업고등학교
지례면 교리 412번지에 위치한 지례중·김천상업고등학교는 1947년 11월 5일 사설 강습원인 지례중학원으로 개원된데 이어 1951년 10월 29일 지례중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11월 21일 개교됐으며 1967년 증산면 동안리에 분교가 설치됐다.
김천상업고등학교는 1972년 2월 4일 지례상업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72년 3월 30일 개교됐다. 1975년 7월 25일 지례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된데 이어 1994년 3월 1일 지례상업고등학교로, 1996년 3월 1일 김천상업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지례중학교와 병설 운영되고 있다.
2015년 현재 지례중은 제60회에 걸쳐 7천410명의 졸업생이 배출됐으며 김천상고는 제40회에 걸쳐 3천738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지례초등학교
지례면 교리 584번지에 위치한 지례초등학교는 김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이다. 1906년 5월 4일 일중소학교로 설립돼 1912년 4월 1일 지례공립보통학교로 다시 설립 인가를 받고 1938년 4월 1일 동산공립심상소학교로, 1949년 9월 1일 지례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93월 3월 1일 구곡국민학교가 통폐합되고 1996년 3월 1일 지례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103회에 걸쳐 6천429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