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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13> 부항면(釜項面)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07.15 15:46 수정 2015.07.15 03:46

백두대간 삼도봉 품은 청정 웰빙의 고장
부항댐 건설로 김천관광의 명소로 부상

↑↑ 부항면 지도
ⓒ 김천신문
김천시의 서남쪽에 위치한 부항면은 삼도봉에서 발원한 부항천이 면의 중심을 관류하며 지례에서 감천과 합류하는데 삼도봉과 황악산, 대덕산 등 백두대간에 둘러싸여있고 지례방면으로 903번 지방도와 부항천을 따라 동쪽이 열려있는 전형적인 산지형 구조이다.
동쪽으로 지례면, 남쪽으로 대덕면, 북쪽으로 구성면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삼도봉을 기점으로 북쪽은 충청북도 영동군, 남쪽은 전라북도 무주군 등 삼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부항면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의 서쪽에 있다고 서면(西面)이라 했는데 1895년 (고종32년) 단산, 사등, 월곡, 구룡, 학동, 어전, 부항, 지시, 서장, 상대, 하대, 해인, 대야 등 13개동을 상서면(上西面)으로 하고 죽전, 파천, 임곡, 안간, 대평, 두산, 말미, 교현, 내희, 외희, 중희, 용촌, 유촌, 동산, 가물, 상지, 하지, 옥소, 신소, 신촌 등 21개동을 하서면(下西面)으로 개편했다. 이후 1914년 상서면, 하서면을 합해 현재의 지명인 부항면으로 고치고 34개동을 사등, 월곡, 어전, 하대, 해인, 대야, 파천, 안간, 두산, 희곡, 유촌, 지좌, 신옥 등 13개동으로 개편했다.
부항면은 조선개국에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존인(李存仁)과 한송정마을의 효자 이영보(李英普)와 같은 충신, 효자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기도 하다. 부항면의 입구에 해당하는 유촌리와 지좌리 일대에는 부항댐이 들어서면서 김천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마을과 전설
    
옥녀산발형의 명당 터 신옥리
신옥리에 속하는 마을은 옥소봉 아래 자리 잡은 옥소동(玉梳洞)과 밤실이었는데 댐 공사로 밤실은 폐동되고 옥소동은 4가구만이 남았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에 속했고 이웃한 밤실은 새로 만들어진 옥소동이라 해서 신소동(新梳洞)이라 했는데 1895년 지례현 하서면(下西面) 관할이 되고 1914년 부항면이 신설될 때 두 마을을 합해 신소(新梳)의 신(新)자와 옥소(玉梳)의 옥(玉)자를 따서 신옥리(新玉里)라 했다.
남평문씨(南平文氏) 순평공파(順平公派) 집성촌인 옥소동은 마을뒷산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는 여인과 같다는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 구슬옥(玉)자에 머리빗을소(梳)자를 써서 옥소(玉梳)라 했다고 한다.
신옥리로 속하는 또 다른 마을 밤실(밤시)은 밤나무가 많아 밤실, 밤나무골, 율곡(栗谷) 등으로 불렸고 옥소동에서 분가한 후손들이 나중에 새로 마을을 이뤘다고 신옥소동(新玉梳洞)이라 했다가 줄여서 신소(新梳)로도 불렀다.
    
용이 날라 올랐다는 비룡산 아래 유촌리
↑↑ 부항댐에 잠긴 용두대
ⓒ 김천신문

신옥리, 지좌리와 함께 폐동된 유촌리(柳村里)는 비룡산을 중심으로 용촌, 동산, 가물리, 버드내, 죽동, 새터 등 여섯 마을로 구성돼 있었으나 부항댐 건설오 모두 폐동되고 말았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과 하서면에 속했는데 1914년 용촌, 장터, 가물리와 인근의 버드내, 죽동을 합해 유촌리로 하고 신설된 부항면에 편입됐다.
마을 지명은 버드내마을 앞 하천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버드나무유(柳)자를 써서 유촌(柳村)이라 했다.
용촌마을은 마을뒷산인 비룡산(飛龍山)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용촌(龍村)이라는 지명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마을 앞 부항천변에 용의 머리형상을 하고 있다는 용두대(龍頭臺)로 불리는 아름다운 바위절벽이 있었는데 부항댐 건설로 사라지고 말았다.
용두대 앞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장관이었는데 부항댐으로 인해 물에 반쯤 잠긴 소나무 두 그루가 1년이 넘도록 살아있어 방송에도 출연한 명소가 되기도 했다.
비룡산은 지명에서도 암시하는 바와 같이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일설에 전국 8대 명당터로 알려졌다.
용촌과 인접하고 있는 동산은 비룡산자락의 동산이라는 야산에 위치해 동산(東山)이라는 지명을 얻었는데 뒤에 이 마을에 장(場)이 서면서 장터로 불렸다.
동산은 1914년 부항면이 신설되면서 부항면사무소가 위치한 면소재지였는데 1959년 면사무소가 사등리로 이전될 때 유촌주민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어 1962년 유촌출장소가 설치됐다가 1999년 폐쇄됐다.
가물리에서 지례방면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벼락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는데 이 바위를 옛날 조장군이라고 불리는 한양조씨 집안의 한 장군이 깨려고 하다가 본인도 죽고 집안도 기울어 타처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온다.
동산마을 뒤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유촌2리에 속했던 버드내, 죽동, 새터로 불리는 마을들이 있었다.
    
한송정으로도 불린 벽진이씨집성촌 지좌리
↑↑ 사라진 한송정
ⓒ 김천신문

유촌리를 지나 지방도변 좌측으로 대덕면 조룡리와 경계를 이루며 언두봉 아래 부항천변에 위치한 지좌리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한 상지리(上智里), 하지리(下智里)였는데 1895년 서면에서 나뉜 하서면으로 잠시 속했다가 1915년 두 마을을 합해서 지좌리(智佐里)로 하고 신설된 부항면에 편입됐다.
이 마을은 벽진이씨 시조로부터 11세손으로 고려 충숙왕 때 중문대장군(中門大將軍)을 역임한 이성간(李成幹)이 성주에서 부항으로 이거한 이래 대대로 벽진이씨집성촌을 형성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낙향한 전서공(典書公) 두은(杜隱) 이존인(李存仁)이 인근 사등리 단산마을에 낙향해 살면서 후학을 양성하여 이 마을이 지례현의 반촌으로 우뚝 섰다.
이후 전서공의 후예로 선조 때 공조참의를 지낸 21세손 경암(鏡巖) 이자흥(李自興)이 1573년 벽진이씨, 연안이씨, 서산정씨, 이천서씨, 순천박씨 등 다섯 성씨, 12문중의 문인 16명으로 십육현회(十六賢會)를 조직하고 그 증표로써 한송정(寒松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이 정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가 됐는지라 마을이름조차 한송정으로 불리게 됐다.
마을 앞에는 병자년 수해 때 용케 화를 면한 효자 이영보(李英普 1768~1821)의 정려각이 섰는데 이영보는 13세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정성으로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고 모친이 득병하자 7년간 봉양했는데 어느 날 모친이 자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엄동설한에 부항천을 다니며 대성통곡을 하자 얼음이 깨지며 자라가 튀어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효자로 1858년(철종9년) 정려가 내렸다.
이영보의 효행은 197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효자를 배출한 마을이라 해서 지좌리가 효아촌(孝兒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영보효자각은 현재 부항댐 산내들공원으로 옮겨졌고 지좌리 마을주민들은 대부분 타지로 떠나고 10여 가구만이 마을 뒷골에 새로 조성된 효아촌마을로 이주했다.
    
부항지서 망루대가 있는 사등리
↑↑ 사등리
ⓒ 김천신문

사등리(沙等里)는 갯절, 사드래, 한적동, 장자동 등 네 마을로 이뤄져 있다.
갯절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해 단산리(丹山里)로 불렸는데 갯절이라는 마을지명은 옛날 개사(介寺)라는 절이 있음으로 해서 개사라 하다가 뒤에 음이 변해 갯절이 됐다. 개사를 기준으로 절 아래 마을을 아랫갯절, 윗 마을을 웃갯절이라 불렀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개사는 신라 말 절을 짓던 중에 산 너머 대덕면 조룡리로 이전해 봉곡사(鳳谷寺)가 됐다.
전설에 따르면 자장대사(慈藏大師)가 이 마을로 들어와 절을 짓는데 큰 새가 계속 나무를 물고 날아가기에 따라가 보니 지금의 봉곡사 터에 집을 짓고 있어 명당임을 알아보고 개사를 폐하고 조룡리로 옮겨 봉곡사를 창건했다.
이 마을은 전서공(典書公) 이존인(李存仁)이 처음 정착했던 마을로 이웃한 지좌리와 함께 대표적인 벽진이씨 집성촌으로 꼽힌다.
마을 앞에는 구남천(九男川)이 부항천으로 합류되는데 옛날 한 선비가 세상을 등지고 계곡 깊숙이 들어와 살면서 아들만 아홉을 두었는데 훗날 아들들이 하나같이 가문을 빛냈다 해서 구남천이라 했다고 한다.
부항면소재지인 사등2리는 부항천을 중심으로 윗사드래와 아랫사드래 한적동, 장자동 등 네 마을로 이뤄져있다.
1959년 유촌리에 있던 면사무소가 이전해오면서 면소재지가 된 사드래는 사등이라는 동명의 유래가 된 마을로 부항천이 마을 앞에서 굽이쳐 흐르면서 모래밭이 형성돼 모래들, 사들, 사드래라 했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모래사(沙)자에 무리등(等)자를 써서 사등(沙等)이라 했다.
사드래 마을입구의 부항지서 안쪽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망루대가 당당하게 서있다.
윗사드래 마을 앞 부항천에는 배정소(裵鄭沼)라 불리는 큰 웅덩이가 있는데 옛날 배씨와 정씨 성을 가진 선비들이 바위에 올라앉아 노닐던 곳이라 이름 붙여진 곳으로 수해 때 주변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부항천의 절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백범 김구선생의 은거지 월곡리
↑↑ 약목댁
ⓒ 김천신문

월곡리는 조선시대 초까지 월이곡부곡(月伊谷部曲)으로 불렸는데 조선 말 지례현 서면으로 잠시 속했다가 1895년 월곡(月谷),학동(鶴洞),구룡동(九龍洞)으로 개칭해 지례현 상서면 관할로 했으며 1914년 세 마을을 월곡리로 통합해 부항면으로 편입시켰다.
부항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거북이가 달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형상이라 거북바위 또는 거빵굴로 불리는 큰 바위가 있어 달이실이라 부르고 한자로 달월(月)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월곡(月谷)이라 했다.
실제로 도로변에 거북이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을 한 바위가 부항천을 향해 튀어나와 있는데 1970년대 도로를 새로 내면서 몸통에 해당하는 바위 대부분이 묻히고 말았다.
거북바위 뒤쪽 언덕에는 약목댁(若木宅)으로 불리는 온전한 형태의 고택이 우뚝 서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구조인 문간채, 사랑채, 안채로 이뤄져 있는 □자 형태로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전라도 무풍에서 1919년 이전해 다시 세웠다고 하며 문재용씨의 모친 고향인 약목을 따서 약목댁이라는 택호를 얻었다.
↑↑ 수풍정
ⓒ 김천신문

월곡마을은 백범 김구(金九)가 25세 되던 해인 1900년 이 마을 일주(一舟) 성태영(成泰英)의 집에 한 달간 묵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월곡마을은 2009년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백범이 은거했음을 기념하는 비(碑)가 월곡숲에 세워졌다.
마을안쪽 뒷산 아래에는 몽구동(夢龜洞)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옛날 한 선비가 이곳에 들렀다가 거북이꿈을 꾼 후 길지로 여겨 집을 짓고 살았다고 꿈몽(夢)자에 거북구(龜)자를 써서 몽구동이라 했다고 하며 어전마을 방면의 학동은 마을 뒷산이 학을 닮아 학동(鶴洞)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학동마을 앞에는 수풍정(水風亭)이라 불리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의 구멍에 고인 물이 속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였다.
    
물고기 닮은 밭이 있는 어전리
↑↑ 경모재
ⓒ 김천신문

월곡리 마을 입구에서 삼도봉터널 방면으로 가다가 좌측 어전령 아래 위치한 어전리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으로 속했는데 1895년 상서면으로 됐다가 1914년 신설된 부항면으로 편입됐다.
어전리는 김천최대의 김해허씨(金海許氏) 부위공파(副尉公派) 집성촌이다. 시조로부터 18세손인 공조참의 허시발(許時發)의 아들 허인(許仁)과 허경(許景)이 경남 합천의 삼가(三嘉)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집성을 이뤄왔다.
어전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 들판의 형상이 물고기와 같이 생겨 물고기어(魚)자에 밭전(田)자를 써서 어전(魚田)이라 했다고 하는데 산비탈에 둘러싸인 마을 앞 들판의 형세가 부항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을 따라 헤엄쳐 나가는 물고기의 형상을 어김없이 닮은 듯하다.
마을중앙에는 김해허씨 재실로 입향조(入鄕祖) 허인(許仁)을 제향하는 경모재(景慕齋)가 높이 솟아있다. 이 가문에서는 철원부사를 역임한 허연(許然)을 비롯해 중추원참의 허진구(許軫九)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부항령을 경계로 전라북도 무풍면 금평리와 이웃하고 있는 어전2리 가목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한 부항리였는데 1895년 상서면이 되고 1914년 상서면, 하서면이 통합해 새로 면을 신설할 때 이 마을의 지명을 따서 부항면으로 했다. 이때 면의 지명과 마을지명이 같으면 혼란이 생긴다고 인근 어전리로 폐합했다가 1963년에 어전2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부항령과 백도래산의 비탈진 자락에 위치해 교통여건이나 마을로서의 입지 조건이 용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년까지 100가구에 육박하는 큰 마을을 유지했다.
가목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의 형국인지라 가마부(釜)자에 목항(項)자를 써서 부항(釜項)이라 하고 우리말로 가마목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목이라 불리게 됐다.
    
정감록에 이름을 올린 하대리
↑↑ 뱃들마을 돛대
ⓒ 김천신문

월곡리와 해인리 사이에 자리한 하대리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해 지시리(只是里), 서장리(西匠里), 하대리(下垈里)로 나눠 불렸는데 1895년 서면이 상서면, 하서면으로 분동될 때 하서면으로 속했고 1914년 부항면이 신설될 때 뱃들(舟坪), 양지마(陽地村), 음지마(陰地村), 아래두대(下斗垈), 지시(只是), 장인촌(匠人村) 등 인근 여섯 마을을 합해 하대리(下垈里)라 했다.
하대리(下垈里)라는 현재의 동명은 1914년 부항면이 신설될 때 가장 큰 마을이었던 아랫두대(下斗垈)의 지명을 딴 것이다. 하대(下垈)는 하두대(下斗垈)의 준말로 지금의 해인리로 속하는 윗두대(上斗垈)와 함께 마을의 지형이 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말(斗)과 흡사하게 생긴 터(垈)라는 의미로 말두(斗)자에 터대(垈)자를 써서 두대(斗垈)라 했다. 말의 윗부분에 해당되는 마을을 윗두대, 그 아래쪽을 아랫두대라 했다.
하대마을 아래에는 뱃들마을이 성재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은 사방이 지시천과 해인천의 물길로 둘러싸여 마을이 물 위에 떠있는 배(舟)의 형상이라고 배주(舟)자에 평평할평(坪)를 써서 주평(舟坪)이라 했다고 한다.
따라서 배의 형국인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을 내는 격이라 배가 침몰하고 마을에 불운이 있다 해서 이 마을에는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일체의 우물을 파지 않고 마을 밖 지시천 너머에 우물을 파고 물을 길러다 먹어야 했다.
뱃들마을 뒤로는 골짜기가 항아리(甁)와 같이 깊고 좁다 해서 이름 붙여진 병목안골 초입에 지시동(只是洞)으로 불리는 오래된 마을이 있다.
난리를 피해 살만한 명당을 소개한 ‘정감록(鄭鑑錄)’에 올라있다는 마을로 번잡한 세상을 피해 들어와 살면서 오직지(只)자와 바를시(是)자를 써서 오직 바르게 살겠다는 의지를 마을지명에 담았다.
뱃들마을 아래 도로변에는 조산동으로 불리는 또 다른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옛날 칭이(箕)와 같은 농기구들을 생산하는 장인(匠人)들의 집단거주지로 장인촌(匠人村) 또는 장촌(匠村)으로 불렸다.
일제시대 말 지명의 어감이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이성출씨 등이 주동이 돼 마을 앞에 동제를 지내기 위해 만든 조산(造山)이 있는 것에 연유해 조산동(造山洞)으로 동명을 바꿨다.
부항천 건너 조산동 맞은편에는 음지마(陰地村), 음달마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지에 마을이 있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삼도봉 아래 첫 마을 해인리
↑↑ 남근석
ⓒ 김천신문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과 상서면으로 속했던 윗두대, 해인동 두 마을은 1914년 상서면과 하서면을 합해 부항면이 신설될 때 해인리(海印里)로 통합됐다.
광산김씨(光山金氏) 김성옥(金聲玉)이 임진왜란 때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피난을 와 정착한 이래 대대로 광산김씨 집성촌을 이뤄왔는데 해인동과 윗두대에는 입향조를 추모하는 재실 둔암재(遯庵齋)와 쌍광재(雙光齋)가 높이 솟아있다.
하대리와 대야리가 갈리는 하대삼거리 인근에 자리 잡은 윗두대는 하대리로 속하는 아랫두대와 함께 일대의 지형이 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말과 같이 생긴 땅이라 말두(斗)자에 터대(垈)자를 써서 두대(斗垈)라 하고 그중에서도 위쪽에 있다 해서 윗두대로 불렀다.
윗두대 위로는 삼도봉아래 첫 마을인 해인동(海印洞)이 자리 잡고 있는데 삼도봉 만남의 날 행사를 통해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해인동 마을 뒤 삼도봉 오르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해인산장 못 미쳐 도로변에 흡사 우람한 몽둥이와 같이 생긴 큰 바위가 불쑥 튀어나와 있는데 이 바위가 그 유명한 고추방골 남근석(男根石)이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오랜 옛날부터 해인동 고추방골 남근석은 효험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해 아들 낳기를 염원하며 치성을 드린 많은 여성들이 효험을 얻었다고 한다.
마을의 뒷산으로 충북 영동, 전북 무주, 경북 김천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삼도봉(三道峰)은 해발 1천176m로 산 정상에는 1989년 김천·영동·무주문화원에서 삼도봉만남의 날 행사를 기념해 건립한 삼도화합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금광으로 이름났던 대야리
↑↑ 금광
ⓒ 김천신문

갈불과 대야 두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으로 속해 갈평(葛坪)으로 불렸는데 1895년 서면이 상하로 나뉘면서 하서면이 됐다. 1914년에 하서면의 임곡 일부와 홍심동, 상서면의 대야를 합해 대야리라 하고 신설된 부항면에 편입됐으며 1963년 갈불은 대야1리로 분동하고 홍심동은 폐동됐다.
갈불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 주변 산에 칡이 많아 칡갈(葛)자에 평평할평(坪)자를 써서 갈평(葛坪)이라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갈불로 불리게 됐다.
또 대야(大也)는 원래 천지리(天地里)였는데 나라에서 일반 백성이 사는 마을이름을 왕을 상징하는 천지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해서 하늘천(天)자에서 한일(一)을 빼어 큰대(大)자로 고치고 땅지(地)자에서 흙토(土)자를 빼서 어조사야(也)자로 고쳐 대야리(大也里)로 했다고 한다.
갈불마을은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 김문기(金文起)의 5세손인 김언희(金彦希)가 응명동 독정(督井)마을에서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김녕김씨 충의공파 집성촌을 이뤄왔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을중앙에는 갈산재(葛山齋)로 불리는 문중재실이 우뚝 솟아있다. 갈산재는 홍심동(紅心洞) 이용직(李容直)의 저택을 허물 때 나온 재목을 이용해 지었다.
대야동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했었는데 1895년 상면이 됐다가 1914년 인근의 신촌을 합해 신설된 부항면으로 속한 후 1963년 대야2리로 분동했다.
삼도봉으로부터 동쪽자락에 위치한 산간마을로 마을서쪽의 밀목령을 넘으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 파천리, 남으로 해인리, 북으로는 질매재로 연결된다.
일제시대까지 마을뒷골 일대에서 금맥이 발견돼 큰 규모의 금광이 개발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
이때 많은 금이 생산되면서 마을에는 일본인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밀려들어와 크게 번성했고 인부들을 상대하는 술집까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 수시로 분쟁이 발생되자 급기야 마을에 지서가 들어서기도 했다.
    
세심대와 춘천서원이 있는 파천리
@IMG11@
파천리(巴川里)는 1리 봄내마을과 2리 대밭마, 까리밭골, 숲실로 이뤄져있다.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해 봄내, 춘천(春川)이라 했는데 1895년 하서면으로 속하고 1914년 부항면이 신설되면서 인근의 숲실, 대밭마를 합해 파천리(巴川里)로 고쳤다가 1963년 봄내가 파천1리로 분동했다.
춘천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 구남천이 항상 봄날처럼 맑고 깨끗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하는데 지금은 춘천(春川)의 우리말 표기인 봄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을 앞 구남천에는 세심대로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조선후기 노론의 영수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구남천을 찾았다가 이 바위에 올라보고는 그 절경에 감탄해하며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마음을 깨끗이 씻어라”고 훈계한 후 세심대(洗心臺)라 이름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중앙에는 1756년(영조32년) 창건된 춘천서원(春川書院)이 우뚝 서있는데 이 서원은 우암이 세심대에 들러 강론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구성의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가 건립했다.
대야리, 갈불마을과 구남천을 사이로 두고 하천을 따라 길게 연이어 마을이 전개돼 있는데 대밭마, 까리밭골, 숲실 등 파천2리로 속하는 마을이다.
이들 마을은 임진왜란 때 지금의 웃갈불로 불리는 들판에 화순최씨 한 선비가 피난을 왔다가 숲실에 정착해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갈불마을과 구남천을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대밭마는 한자로 죽전(竹田)으로 적는데 마을 뒷산에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지명으로 지금도 야산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대야동과 나뉘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다 중고개 아래에 자리 잡은 까리밭골은 마을에 꽈리로 불리는 풀이 많아 꽈리밭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까리밭골로 됐다.
까리밭골위로는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와 고지미재(성재)를 경계로 자리 잡은 숲실마을이 있다.
    
대흥이씨 집성촌 안간리
봄내마을에서 온천개발지를 지나 영동, 구성방면으로 가다가 가마골고개를 넘으면 안간과 대평으로 이뤄진 안간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지례현 서면으로 속했다가 1914년 부항면으로 편입되면서 안간리로 통합됐는데 가마골고개, 애기고개, 열두머리고개 등 험준한 준령에 에워싸인 오지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관을 알 수 없는 황씨들이 처음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김천지역에서는 드문 대흥이씨(大興李氏)일가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안간이라는 지명은 처음 마을이 들어설 때 곱독골 골짜기 개울 옆에 집을 지었다고 편안할안(安)자에 개울간(磵)자를 써서 안간(安磵)이라 했다고 한다.
도로위쪽에 깊숙이 자리한 대평동(大坪洞)은 마을 뒤로 넓은 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말 전설이 전하는 두산리
파천리 봄내마을과  희곡리 사이의 구남천변에 위치한 두산리(斗山里)는 조선시대 말까지 갈계, 신갈계, 말미 등 지례현 서면에 속한 세 마을이 있었는데 1914년 이들 마을을 합해 두산리(斗山里)라 하고 부항면에 편입시켰다. 1960년대에 신갈계가 수해로 폐동된 후 지금은 갈계, 말미 두 마을만 남았다.
이 마을은 부항면에서도 유명한 전주이씨 집성촌으로 태종(太宗)의 차남 효령대군(孝寧大君)의 6대손인 이억남(李億南)이 한양에서 내려와 말미마을에 정착하고 광해군 때 효령대군의 10대손인 이현민(李賢民)이 인근의 갈계로 분가한 이래 대대로 전주이씨 집성촌을 이뤄왔다.
갈계마을은 파천리 봄내방향에서 흘러오는 구남천과 안간마을에서 흘러드는 기수골 안간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부터 희곡으로 말발굽처럼 휘어들어가는 지점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갈계와 말미 두 마을 사이에 자리 잡은 앞산인 마산(馬山)으로 인해 갈계와 말미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이 산은 말(馬)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마산이라 했는데 갈계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지점이 말의 목덜미에 해당돼 말의 목에 난 긴 털을 뜻하는 갈기라 했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갈계(渴溪)로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희곡으로 일제시대에 길을 낼 때 마을주민들은 말의 목을 끊는 것이라 해서 격렬한 반대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공사도중 흙이 핏빛으로 변하고 인부들이 다치는 등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말미는 갈계마을보다 앞서 개척된 마을로 말의 꼬리에 해당되는 지점에 마을이 들어섰다고 말마(馬)자에 꼬리미(尾)자를 써서 마미(馬尾)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말미(末尾)로 변했다.
    
가마바위가 있는 희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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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리(希谷里)는 1리에 속한 앳골과 숫골, 2리의 가마고개와 안희실로 이뤄졌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해 교현(轎峴), 외희(外希), 중희(中希), 내희(內希)로 불렸는데 1895년 서면이 상면과 하면으로 분면되면서 하서면이 되고 1914년 부항면이 신설되면서 네 마을을 합해 희곡리로 했다가 1963년 가마고개와 안희실을 희곡1리로, 앳골과 숫골을 2리로 분동했다.
마을의 형성은 조선시대 청백리로 유명한 이약동(李約東)의 부친 해남현감 이덕손(李德孫)이 안희실로 이거한 후 대대로 벽진이씨 전서공파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희곡(希谷)이라는 지명은 벽진이씨 문중의 한 선비가 ‘인희현(人希賢) 현희성(賢希聖) 성희천(聖希天)’ 즉, ‘현인을 따르고 성인을 쫓으며 하늘을 따른다’는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뜻을 세우고 마을을 삼희(三希)로 나눠 숫골을 외희(外希), 앳골을 중희(中希), 안희실을 내희(內希)로 칭했다는 것에 기인해 희곡(希谷)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가마고개마을은 한자로 가마교(轎)자와 고개현(峴)자를 써서 교현(轎峴)이라 했는데 마을 뒤 안희실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인 가마고개가 마을지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마을은 마을입구에 신랑을 상징한다는 사모바위가 있고 마을 뒤 가마고개 아래에 신부를 상징하는 족두리바위가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마을중앙에 가마모양을 한 가마바위가 실제 있었다는 것으로 미뤄볼 때 가마고개라는 지명과 이들 바위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갯마루의 벽진이씨 문중 재실인 사일재(事一齋)에는 부친이 병석에 눕자 100일 기도 끝에 산삼을 구해 완치시켰다는 행초(杏樵) 이우연(李愚淵 1801~1873)의 효자비가 있다.
가마고개를 넘어서면 99개의 작은 골짜기가 있어 큰골이라 불린다는 안희실(內室)이 자리 잡고 있다.
가마고개 바깥으로 있는 앳골과 숫골은 희곡2리로 속하는데 조선시대까지 앳골은 중희 또는 와야라 불렸다.
이것은 희곡 중에서도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중희(中希), 또 마을 중앙에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어 기와와(瓦)자를 써서 와야(瓦也)라 한 것이 앳골, 와야골로 변했다.
    
□부항면의 문화유산
춘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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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면 파천리 봄내마을에 자리한 춘천서원(春川書院)은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며 지역 인재들을 양성하던 사립학교이다.
처음에는 서당으로 개설했다가 구성 상원의 이의조를 따르던 지례현 노론계열 선비 중에서 연안이씨 이수점(李遂漸), 하빈이씨 이천복(李天復), 벽진이씨 이덕근(李德根), 순천박씨 박상태(朴相泰), 거창신씨 신필검(愼必儉), 성산이씨 이강수(李康壽) 등 여섯 문중 선비들이 의기투합해 계를 모아 서원을 관리하기로 약속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원래 건물은 모두 뜯기고 지금 남아있는 강당은 1956년 새로 세웠다.
    
부항지서 망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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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면 사등리 부항지서 뒤쪽에 위치한 전쟁관련 문화유산으로서 1948년 12월 이후 부항면 일대에 좌익 빨치산 공비들이 출몰해 지서를 습격하고 주민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지역주민들이 1949년 4월부터 5월까지 2개월간에 걸쳐 콘크리트 망루대와 지서에서 망루대를 연결하는 터널,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나무울타리를 견고하게 구축했다.
1950년 9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적은 병력 1천명이 막강한 화력으로 부항지서를 공격했으나 소총에 의지한 70명의 아군병력으로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경찰관 1명과 청년단원 4명이 전사하고 의경과 청년단원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2008년 등록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되고 호국의 성지로서 복원공사가 이뤄졌다.
    
□부항면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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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댐은 감천으로 유입되는 지류 중 가장 큰 하천인 부항천을 막아 반복되는 감천유역 홍수피해를 막고 김천과 구미의 안정적인 용수확보를 위해 2006년 착공, 2014년 준공됐다.
5천200억원의 공사비가 소요된 부항댐으로 지좌리와 유촌리 일대 284세대가 수몰됐으며 전체 댐 면적은 약 100만평에 달한다.
댐 물막이의 높이는 64m, 길이가 472m로 돌과 흙을 다져넣고 콘크리트를 씌운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댐 방식으로 연간 3천300MWh의 전력도 생산되는 다목적 댐이다.
댐을 조망할 수 있는 일주도로가 14㎞ 정도 만들어졌고 앞으로 댐 하부에는 7만평 면적의 산내들공원과 오토캠핑장이 조성됐는데 지난해 개장해 김천시에서 운영하는 오토캠핑장은 전국적인 명소로 부상했다.
부항댐 물문화관과 전망대는 김천의 시조인 왜가리를 형상화해 놓은 것으로 연간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돼 김천 관광활성화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부항면의 특산물
    
부항면의 특산물은 블루베리, 천마, 오미자, 호두, 복분자, 고사리 등 다양하다.
블루베리는 차윤득씨가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재배하는 99만ha(33만평) 규모의 대야농장 블루베리가 유명한데 생산량이 전국 제일이다.
오미자는 이대영(오미자세상), 이윤호(삼도봉오미자농장)씨를 비롯한 여러 농업인이 재배해 인터넷을 통한 판매로 높은 판매수익을 올리고 있다.
천마는 게르마늄 함량이 높은 땅에서 재배해 가공 판매하는 김진영(삼도봉천마농장) 농업인의 천마가 유명하다.
복분자는 이정화(삼도봉복분자농원)씨를 비롯한 여러 농업인이 재배하고 있으며 이들은 호두 재배로도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지역만의 특산물인 고사리 역시 허춘범씨를 비롯한 몇 농가가 재배해 농협 하나로마트 등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부항면의 산업체

전국 최대 규모의 블루베리단지 ‘대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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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면 대야길 44-9번지에 위치한 대야농장. 백두대간 해발 400~900m 천혜의 청정지역에 차윤득씨가 99만㎡(30만평) 규모의 대야농장을 조성하고 야생 블루베리 재배를 시작한 것은 2006년 3월이다.
“대야농장의 블루베리는 맛과 신선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무공해 농법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씻지 않고도 먹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합니다. 제초제를 비롯한 농약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화학비료는 물론 오염된 퇴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농장을 조성할 당시 무공해재배 환경조성을 위해 자동차 매연 등이 있는 도로 인근과 농약을 대량 살포하는 과수원 인근도 피해 간접피해의 우려까지 완벽하게 막았다.
노화방지, 중풍예방, 해독작용, 콜레스테롤 감소, 이뇨작용, 항암효과 등 다양한 효능으로 뉴욕타임즈가 세계 10대 건강식품으로 선정한 블루베리는 찾는 이들이 계속 늘고 있어 판로 걱정이 없다.
그동안 제9회 자랑스런한국인 대상, 제5회 한국최고브랜드 대상 등을 수상한 차윤득 대표는 국가에서 주는 ‘유기농인증’이 농업을 망친다는 생각으로 거부했다.
대야농장에서는 또한 색소, 방부제, 향료 등의 첨가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생과․가공식품‘차윤득 블루베리 1000’을 생산, 판매하고 있는데 전국 소비자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부항면의 학교
    
지례중학교 부항분교장
부항면 사등리 578번지에 위치한 지례중학교 부항분교장은 1974년 1월 5일 부항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은데 이어 10월 7일 6학급을 인가 받아 개교됐다. 1986년 3월 1일 벽지 학교 지정을 받고 1998년 12월 1일 지례중학교 부항분교장으로 인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39회에 걸쳐 2천466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부항초등학교
부항면 월곡리 147번지에 위치한 부항초등학교는 1935년 7월 1일에 부항보통학교로 개교돼 1941년 4월 1일 부항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81년 3월 1일 대야국민학교가 통합된데 이어 1994년 3월 1일 부항국민학교 안간분교장이 통합됐으며 1996년 3월 1일 부항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99년 3월 1일 부항초등학교 유촌분교장이 통합돼 오늘에 이른 부항초등학교는 2015년 현재 제77회에 걸쳐 3천389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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