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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 <14> 대덕면(大德面)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07.29 10:47 수정 2015.07.30 10:47

경상남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섬계서원 등 유서 깊은 유적과 인물 배출한 충효의 고장

↑↑ 지도
ⓒ 김천신문

경상북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접경을 이룬 대덕면은 김천의 남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수도산, 월매산, 대덕산, 국사봉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루며 덕산천과 감주천이 대덕천으로 합류한다.
신라시대에는 지품천현에 속했다가 757년(경덕왕16년) 개령군 지례현에 속하고 1018년(고려 헌종9년)에 성주 경산부로 이속됐다가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 1895년 상남, 하남, 외남 등 세 면으로 분동됐으며 1914년 세 면을 합해 대덕면으로 개칭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덕면은 삼도의 접경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로 꼽혔는데 특히 우두령은 임진왜란과 무신란, 동학농민항쟁, 6·25전쟁 등 역사의 고비 때마다 호국의 보루가 되기도 했다.
조룡리에는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한 백촌 김문기를 제향하는 유서 깊은 섬계서원과 우리고장의 유일한 천연기념물로 수령 600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있다. 덕산리는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잡아 원수를 갚은 효자 김경직을 배출한 효행의 마을로도 유명하다.
    
대덕면의 중심 관기리
↑↑ 옛 장곡역 터
ⓒ 김천신문

조선시대에 지례현 상남면으로 속했던 관기리(館基里)는 1914년 인근의 장곡, 호미와 아랫장터, 웃장터를 합해 관기리라 했고 1960년 관터와 웃장터가 관기1리로 분동했다.
관기(館基)라는 지명은 관기2리 장곡마을에 조선시대까지 장곡역(長谷驛)이 위치하고 있는데다 관사로 이용되던 두의곡원(頭衣谷院)이 있어 관터라 불렸고 한자로 객사관(館)자에 터기(基)자를 써서 관기(館基)라 했다.
원래의 두의곡원은 관터마을회관 인근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다만 관터라는 지명으로만 남아있다.
또 대덕지서에서 대덕중학교 사이에 시장이 열려 장터로 불렸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하천이 범람해 매몰된 후 시장이 지금의 면소재지인 관기2리로 옮기고 원래 장이 있던 마을을 웃장터, 뒤에 장을 옮긴 마을을 아랫장터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시장과 면사무소 이전을 두고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대립할 때 주민간 줄다리기를 해서 결정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대덕면소재지인 관기2리는 장곡과 아랫장터 두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고려시대까지 마을에 두의곡역(頭衣谷驛)이 있어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으로 불리다 조선시대에 들어 역 이름을 장곡역(長谷驛)으로 고치면서 마을이름도 장곡으로 바뀌고 지례현 남면 관할로 속하게 됐다.
1914년 인근의 관터, 호미마을과 합해져 관기(館基)로 했다가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관터 일대의 장터가 유실돼 아랫장터로 시장을 옮기면서 새로 마을이 형성됐고 1960년 장곡과 아랫장터가 관기2리로 분동됐다.
아랫장터로부터 대덕초등학교 방향으로 안쪽에 자리잡은 장곡마을은 마을뒷산인 송시봉(송수봉) 골짜기가 워낙 깊어 긴장(長)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장곡(長谷)이라 했는데 골짜기의 지명이 역과 마을의 지명이 됐다.
장곡마을 아래 국도 3호선 변에 위치한 아랫장터는 대덕면 소재지로 1930년대까지만 해도 길손들을 상대하던 주막이 몇 채 있을 뿐이었으나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관터에 딸린 장터가 매몰되자 주막일대에 5일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고 뒤에 국도와 무주방면 지방도가 개설되면서 일약 면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60년 관기3리로 분동된 호미마을은 마을뒷산이 호랑이가 길게 누워있는 와호형(臥虎形)이라 호미산(虎尾山)이라 불렀는데 마을이 호랑이 꼬리부분에 위치해 있다고 호랑이호(虎)자에 꼬리미(尾)자를 써서 호미(虎尾)라 했다.
이 마을에는 호미금계(虎尾禁鷄) ‘호미마을에는 닭을 금한다’라는 규칙이 불문율(不文律)처럼 전해져 온다. 마을에서 낮을 상징하는 닭 울음소리가 나면 새벽이 온 줄 알고 밤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도망을 가기 때문에 마을의 운세가 쇠퇴하므로 닭을 기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박몽열 정려각이 있는 중산리
↑↑ 박몽열 정려각
ⓒ 김천신문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했던 중산마을은 1914년 이웃한 다화마을과 합해 중산리(中山里)라 했다가 1949년 대덕면으로 편입되고 1960년 중산을 중산1리로 분동했다.
국도변에 자리한 중산마을은 조선 세조 때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한 서산정씨 정사용(鄭士鎔)이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서산정씨 집성촌을 이뤘다.
마을 입구에는 수십 그루의 상수리나무가 군락을 이룬 중산숲이 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마을 뒷산이 무너지면서 함께 떠내려 온 토사와 어린나무들이 성장해 형성된 숲이다.
중산에서 관기리로 가는 구(舊) 도로변의 속칭 박바우모티이에는 박몽열과 부인 문화류를 기리는 충렬각(忠烈閣)이 있다.
박몽열(朴夢說 1555~1597)은 밀양박씨로 황간현감 재임 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간, 개령, 상주에서 의병을 조직해 항거했고 진주성으로 달려가 분전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으로 속한 다화(다부실) 마을은 1895년 지례현 하남면, 1914년 김천군 대덕면, 1949년 금릉군 대덕면 증산리에 속했다가 1960년 중산2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은진송씨와 이천서씨 후손들이 들어와 정착한 이래 대대로 은진송씨와 이천서씨가 집성을 이뤘고 김해김씨도 크게 번성했다.
다부실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큰 부자가 많이 나오라는 뜻을 담아 많을다(多)자에 넉넉할부(富)자를 써서 다부실(多富室)이라 했다 하고 다화는 마을 뒷산의 형세가 한자로 마음심(心)자를 닮아 꽂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라는 뜻으로 많을다(多)에 꽂화(花)자를 써서 다화(多花)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입구의 대덕천변에는 김해김씨 김만억(金萬億)의 처 성산이씨 부인의 효열비가 섰는데 부인은 1830년 시댁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가던 중 날아가는 꿩을 보고 시부모님이 꿩고기를 좋아함에도 이제는 드리지 못함을 원통해하며 통곡을 하자 꿩이 품속으로 날아들어 발걸음을 돌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이천서씨 가문의 서즐은 고려가 망하자 고향 지례로 낙향해 절개를 지킨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의 제자로 스승이 졸하자 윤은보와 함께 3년을 시묘하며 부모의 예로써 정성을 다해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행적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어 효의 모범으로 삼게 했다.
서즐의 묘소는 마을 뒷산인 양지말 무시밭골에 있다.
마을 안쪽으로는 화계정사(華溪精舍)가 산비탈에 있는데 은진송씨 남촌(南村) 송천상(宋天祥 1556~1626)을 모신 사당이다. 송천상은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지례향교가 화염에 휩싸이자 공자(부자) 영정과 오성위패(五聖位牌)를 모셔내어 화를 면하게 했다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1860년(철종 11년)에 지역 유림에서 편히 제사드릴 곳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화계정사를 세웠다.
    
가마바위전설이 있는 가례리
↑↑ 석곡서당
ⓒ 김천신문

가례리(加禮里)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해 가례, 천곡, 석정 등 크게 세 마을이었는데 1895년 남면이 나뉘면서 하남면으로 속하게 되고 1914년 인근의 덕봉을 합해 대덕면으로 편입됐다.
가례마을은 거창신씨(居昌愼氏) 신형만(愼亨萬)이 이주해 살면서 거창신씨 집성촌을 형성했는데 뒤에 동래정씨와 연안이씨가 이거했다.
가례라는 마을의 지명은 거창신씨 가문이 뿌리를 내리면서 후손들에게 항상 예절을 중시하라 해서 더할가(加)자에 예절예(禮)자를 써서 가례(加禮)라 했다고 알려진다.
원래의 가례마을은 마을 뒤에 있는 큰가래골에 있었는데 마을에 흉흉한 일이 자주 일어나 현재의 위치로 집단 이주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사연이 전설로 내려온다.
옛날 가례마을의 한 부잣집에 스님이 시주를 청하러 왔는데 주인이 인색해 스님을 심하게 박대했다.
이에 스님이 떠나면서 마을 앞 가마바위를 가리키며 “저 바위를 깨어버리면 마을에 부자와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많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부자는 주민을 동원해 가마바위를 깨뜨렸는데 그 순간 바위 속에서 학이 나와 지금의 중산마을 방향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가례마을에 좋지 않은 일들이 속출했고 결국 지금의 자리로 마을을 옮겼다는 이야기인데 당시 깨뜨리던 바위가 지금의 큰가래골 입구에 있는 가마바위라고 전해진다.
인근 석정에는 조선 중엽 영남사림의 지도자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들러 학문을 강론하고 갔음을 기념하는 한강선생장루지대비(寒岡先生杖屢之台碑)가 섰고 뒤로는 제자들이 세웠다는 석곡서당(石谷書堂)이 있다.
    
섬계서원과 봉곡사로 유명한 조룡리
↑↑ 섬계서원 내 천연기념물 300호 은행나무
ⓒ 김천신문

조룡리(釣龍里)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 조룡(釣龍), 쌍괴(雙槐), 양지(陽地) 등 세 마을로 이뤄졌었는데 1914년 인근의 봉곡, 조현을 합해 조룡리로 대덕면이 됐다가 1960년 원조룡 등 다섯 마을이 조룡1리로 분동했다.
섬실, 섬계(剡溪)로 불려지는 조룡1리는 조선 세조 때 단종복위를 주도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인 17세 김경욱(金慶郁)이 영동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김녕김씨 충의공파 집성촌을 형성해 오고 있다.
조룡골은 원조룡(元釣龍)으로도 불리는데 김녕김씨 일가가 처음 정착한 마을로 마을 앞 봉곡천에 옛날 용을 낚았다는 용구(龍口)라는 웅덩이가 있어 낚을조(釣)자에 용용(龍)자를 써서 조룡(釣龍)이라 했다고 한다.
양지마에는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金玄錫) 부자를 주향하고 지례현 출신 유학자 장지도, 윤은보, 서즐을 종향하고 있는 섬계서원(剡溪書院)이 자리 잡고 있는데 1802년(순조2년) 세워졌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고 1899년 복원됐다. 서원 뒤뜰의 은행나무는 수령 600년을 자랑하며 천연기념물 300호로 지정됐다.
맞은편 음지마을 뒷골짜기는 머릿골로 불리는데 옛날 어느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더니 7일 만에 아이가 벽을 기어오르는 등 회괴한 일이 생기자 부모는 아이가 장차 큰일을 저지를까 걱정돼 죽여 버렸다. 다음날 말 한 마리가 찾아와 아이의 시신을 보곤 슬피 울면서 시신을 물고가다 머리를 이 골짜기에 묻어주고 갔다 해서 머릿골로 불린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 조현(鳥峴), 봉곡(鳳谷)으로 불렸던 조룡2리는 웃새재, 아랫새재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1895년 남면이 삼분될 때 하남면으로 딸리고 1914년 인근의 조룡, 음지마, 양지마가 통합돼 대덕면 조룡리로 속하게 되고 1960년 아랫새재, 윗새재가 조룡2리로 분동됐다.
마을로 오르는 길옆으로는 첨망대(瞻望坮)라 새긴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가 놓여있고 남평문씨 재실인 감모재(感慕齋)가 조룡천을 굽어보고 섰다.
새재라고 하는 마을지명은 무풍면 금평리로 넘어다니던 고개인 속칭 서낭등재가 지대가 높아 새가 넘나드는 고개란 뜻으로 새조(鳥)자에 재현(峴)자를 써서 조현(鳥峴)이라 적고 새재라 했다.
나눠져 있는 마을 중 아랫마을을 아랫새재라 하고 한자로 하조현(下鳥峴), 윗마을을 윗새재로 부르고 상조현(上鳥峴)이라 했다.
특히 윗새재는 봉곡(鳳谷)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마을입구에 봉곡사라는 절이 있음으로 해서 붙은 지명이다.
    
자연휴양림이 있는 추량리
↑↑ 추량리 은행나무
ⓒ 김천신문

추량리(秋良里)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 추량(秋良) 또는 추장(秋長)으로 불렸다. 1895년 남면이 삼분 될 때 하남면으로 속하고 1914년 가래실, 솔밭골, 주막담, 지푸이를 통합해 추량리로 바뀌어 대덕면으로 편입됐으며 1960년 추량1리와 2리로 분동됐다.
추량1리는 가래실이라고 불리는데 아랫담, 웃담, 양지담 등 셋으로 나뉜 마을의 형상이 떡가래처럼 생겨 가래실이라 했다 한다. 또 서산정씨와 성산배씨 집안에서 가문의 예법을 중시하라는 의미로 가례(家禮) 또는 가례(嘉禮)라 했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은 1500년대 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한 서산정씨 11세손 행촌(杏村) 정처우(鄭處祐)가 충남 서산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서산정씨 집성촌을 형성해 왔는데 정처우는 은행나무를 좋아해 호를 은행나무행(杏)자를 써서 행촌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중앙에는 처음 마을을 개척할 때 심었다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마을의 자랑으로 서있는데 경상북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됐다.
1960년 분동된 추량2리는 솔밭골, 주막담, 지푸이 세 마을로 이뤄졌는데 가래실로부터 증산면 방향의 가릇재로 향하는 도로변 좌우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솔밭골은 한자로 송전(松田)으로 적는데 지세필(池世泌)이 처음 들어와 살면서 마을주변에 소나무가 무성해 솔밭골이라 했다고 한다.
가릇재 입구에는 지푸이, 황성(黃城)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가릇재 아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깊다’는 의미의 사투리인 ‘지푸이’라는 동명을 얻었다. 가을이면 마을주변의 계곡과 산이 단풍에 쌓여 노란 성에 둘러싸인 것과 같아 누를황(黃)자에 성성(城)자를 써서 황성(黃城)이라고도 한다.
마을 뒤로는 증산면으로 넘어가는 가릇재가 있고 그 직전 골짜기에 새롭게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는 수도산자연휴양림이 생겨 전국의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쌍호정으로 유명한 연화리
↑↑ 쌍호정
ⓒ 김천신문

연화1리로 속한 연화실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했는데 1895년 남면이 나뉠 때 상남면이 되고 1914년 소태실과 합하여 연화리(蓮花里)가 됐다가 1960년 연화1리로 분동됐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으로 재임하다 전사한 쌍호(雙湖) 장홍한(張鴻翰)의 처(妻) 연안이씨 부인이 아들 장귀동(張貴東)을 업고 친정과 가까운 이 마을에 정착한 후 대대로 인동장씨 판관공파 집성촌을 형성해오고 있다.
마을 앞 덕산천변에는 인동장씨 후손들이 선조인 장홍한을 기리기 위해 1954년 건립한 쌍호정(雙湖亭)과 쌍호장선생유허비(雙湖張先生遺墟碑)가 나란히 서있다.
연화라는 마을의 지명은 옛날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만발해 연밥연(蓮)자에 꽃화(花)자를 써서 연화(蓮花)라 하고 연화실, 여내실 등으로 불렸다.
연화실마을과 이웃한 연화2리 소태실은 임진왜란 때 안동김씨 김응보(金應)가 피난을 와서 형성한 마을이다.
소태실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조선시대 어느 왕자의 태(胎)를 마을 굴밧골 뒷산에 안치했다 해서 태실(胎室)이라 하고 그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했는데 뒤에 왕자의 태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자 ‘예전의 태실’이라는 의미의 소태실(小胎室)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소태(小台)로 바뀌었다.
    
대덕산 아래 첫 마을 덕산리
↑↑ 김경직 효행비
ⓒ 김천신문

덕산과 옴배미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으로 속하다 1895년 상남면, 1914년 덕산과 주치가 합해져 대덕면 덕산리(德山里)라 했다가 1960년 덕산1리와 2리로 분동됐다.
덕산마을은 김념김씨 집성촌으로 김숙연(金淑蓮)이 단종복위 사건이 일어난 후 연좌를 피해 구성면 상거에 은거해 있다가 후손 김풍(金豊)이 덕산으로 이거한 후 대대로 김녕김씨 대사공파(大司公派) 집성촌을 형성해 오고 있다.
덕산(德山)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에 대덕산(大德山)이라는 큰 산이 있어 얻은 것으로 전해지며 일설에 이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덕을 쌓고 살자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마을입구 조산걸에는 장릉참봉김녕김공휘경직효행비(莊陵參奉金寧金公諱直孝行碑)가 있는데 김경직(金慶直)은 부친 김석용과 함께 대덕산에 싸리나무를 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것을 추격해 부친의 시신을 찾아왔다고 한다. 장례를 마친 후 원수를 갚기 위해 백일기도를 드리고 대덕산 곳곳에 함정을 파 호랑이를 잡았는데 세 번째 잡은 호랑이가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었다고 전해진다. 김경직은 호랑이를 부친 묘소에 바치고 제를 올리며 원수를 갚았음을 고했는데 지역유림에서 효행비를 세우고 나라에서 장릉참봉 벼슬을 제수했다.
마을 입구로부터 도로변에는 상덕재(尙德齋), 경앙재(景仰齋) 등 유서 깊은 재실이 즐비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덕산마을 아래에 자리한 덕산2리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와 정착한 수원백씨 일가들이 마을을 개척한 이래 옴배미, 주치(走峙) 등으로 불리며 덕산천을 중심으로 양지말, 건너말, 안마을로 나눠져있다.
옴배미라는 지명은 마을이 대덕산과 주치령, 국사봉에 둘러싸여 유난히 포근해 따뜻할온(溫)자에 일정한 면적의 땅을 뜻하는 사투리인 ‘배미’와 합해 온배미라 한 것이다.
    
감주골 두 마을 외감리와 내감리
외감리(外甘里)는 감주골 입구로부터 외감, 절골(사곡), 진터(중감), 내감(웃감주)마을인데 감주는 원래 골이 깊은 계곡이라 해서 산깊을감(嵌)자에 시내계(溪)자를 써서 감계(嵌溪)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달감(甘)자에 고을 주(州)자를 써서 감주(甘州)로 바뀌었다.
이같은 사연은 내감리(內甘里)의 중감마을이 군사 요충지로 군진(軍陣)이 주둔했던 병영마을로 지금도 진터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병영에서 쌀 씻는 물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면 물색깔이 희게 변하고 쌀뜨물이 진해 물맛이 달았다 해서 쌀뜨물감(泔)자에 고을주(州)자를 써서 감주(泔州)라 했다고도 한다.
외감(外甘)은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으로 속했고 1895년 남면이 삼분될 때 상남면으로 되고 1914년 대덕면으로 개칭할 때 인근의 절골을 합해 외감리라 했다.
연화리로부터 감주골로 들어오는 목이 좁다란 송골을 지나면 골 깊은 감주골이 시작되는데 ‘좁다’의 사투리인 ‘솔다’는 뜻으로 좁은 골, 송골이라 했다.
송골을 지나면 감주천 너머로 유명한 아흔 아홉다랑이논이 있다. 논 한마지기가 아흔아홉다랑이로 이뤄질 만치 경작지가 협소하다는 것인데 모를 다 심고 나서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드니 삿갓 아래에 한 다랑이가 더 남았더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외감마을은 감주골짜기에서 가장 아래, 바깥에 위치해 아랫감주, 외감(外甘)이라 불리게 됐고 그 안쪽의 절골은 마을 뒤 대덕산자락에 옛날 큰 절이 있어 절골, 사곡(寺谷)이라 했다.
절골 안쪽으로는 내감리로 속하는 진터와 웃감주마을(내감)이 자리 잡고 있는데 진터는 외감과 내감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중감(中甘)이라고도 하며 군진(軍陣)이 위치해 진터로도 불린다.
진터 앞산은 국영말달리기봉 또는 장군봉으로도 불리는데 임진왜란 때 자신의 오판으로 군진을 지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자결한 송국영 장군의 묘가 있음으로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매화낙지형의 명당 터 화전리
화전리(花田里)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으로 속해 화전, 외산, 내산 세 마을이었는데 1914년 인근의 월매, 텃골과 합하고 대덕면으로 이속시켰다.
화전(花田)마을은 꽃밭으로도 불린다. 마을자리가 매화낙지(梅花落地) 즉, 매화꽃이 떨어진 자리로 알려져 꽃밭, 화전(花田)이라 했다는 것인데 마을앞산의 이름이 월매산(月梅山)이다.
마을회관 옆에는 연안이씨 문중에서 선조 이기태(李基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첨모재(瞻慕齋)가 있다.
꽃밭마을 인근의 내산과 외산마을은 산 하나를 사이로 안쪽에 있다 해서 안산(內山), 산 밖에 있다 해서 외산(外山)이라 했는데 내산은 산을 넘어와서 마을의 터를 잡았다는 뜻으로 넘터골로도 불리는 장수황씨 집성촌이다.
외산마을 앞 국도변의 도로가 크게 휘어진 부분은 박선달모팅이라는 재미있는 지명으로 불렸는데 옛날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던 밀양박씨 한 선비가 이곳에 조상의 산소를  들인 후 과거에 급제했다 해서 박선달모팅이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화전2리로 속하는 달매와 텃골은 월매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텃골은 고려중엽에 화순최씨가 처음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터기(基)자에 마을동(洞)자를 써서 기동(基洞)이라 적고 터골, 텃골이라 했다.
마을뒷산인 매화산 자락 절골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됐다가 조선시대에 폐사됐다는 매화사(梅花寺) 터가 아직 남아있으며 마을입구에 효자의성김공명진지비(孝子義城金公鳴振之碑)와 열부청도김씨지비(烈婦靑道金氏之碑)가 나란히 서서 이 마을이 유서 깊은 마을임을 대변해 주고 있다.
    
경상남북도 도계에 걸쳐있는 문의리
경상남도 거창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문의리(文義里)는 기린마, 임터, 꼭두바위 등 크게 세 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 문의, 임기 등으로 불리다가 1895년 외남면, 1914년 인근의 꼭두바위, 아랫임기를 합해 문의리(文義里)로 지명을 바꿔 대덕면으로 편입됐다.
국도 3호선 변에 위치한 임터는 문의리의 중심마을로 마을을 개척할 당시 나무가 울창해 수풀임(林)자에 터기(基)자를 써서 임기(林基)라 적고 임터라 했다.
임터 아래에 아랫임터로 불리는 마을이 새목골과 화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로는 마을 앞에 굽은 바위가 놓여있어 굽을곡(曲)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곡암(曲岩)이라 적고 꼭두바위라 했다는 곡암마을이 도로변에 남아있다.
곡암마을은 수년 전 수해로 큰 피해를 입은데다 도로 직선공사로 두 동강이 나면서 형태가 많이 훼손됐고 마을의 지명이 유래됐다는 꼭두바위도 수해 때 떠내려가고 이제는 볼 수가 없다.
임터에서 우측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산길을 한참 들어가면 원문의, 내촌, 기림마로 불리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오지였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평산신씨와 파평윤씨 집성촌이다. 국사봉으로 오르는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내촌(內村)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원래의 문의마을’이란 뜻의 원문의(元文義)로도 불린다.
문의라는 지명은 평산신씨와 파평윤씨 등 명문가의 자손들이 국사봉 아래로 깊숙이 들어와 살면서 학문을 뜻하는 문(文)자와 지조를 상징하는 의(義)자를 따서 마을이름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기린마라는 지명은 ‘건너편에 마을’이라는 뜻의 사투리로 전한다.
    
우두령과 감천발원지가 있는 대리
↑↑ 우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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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군 웅양면과 경계를 이루는 대리(坮里)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하다 1914년 예서, 대동, 새목골, 덕석마가 통합돼 대리라 했다가 1949년 대덕면에 편입됐으며 1960년 골담과 예서동이 대1리, 안마가 대2리로 분동했다.
거창군 웅양면으로 연결되는 배터재 아래 자리 잡은 골담마을은 새로 국도가 개설되기 전까지 꾸불꾸불한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굽을곡(曲)자에 마을촌(村)자를 써서 곡담(曲村)으로 적고 골담이라고 불렀다.
골담 위 배터재 고갯마루의 경계지점에는 예서동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 여서동(餘瑞洞)이라 했는데 지금은 예서동(禮瑞洞), 예서목으로 불리며 마을 뒤 문의리 기림마 방향으로 성터가 있다 해서 예성(禮城)으로도 불린다.
또 옛 국도였던 우두령으로 향하는 비포장로를 따라 가다보면 우두령 정상 아래에 잘생긴 큰 바위가 있고 덕석(德石), 덕석마로 불린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동이 되고 마을의 흔적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골담과 덕석마 사이의 원터들에는 옛날 소지원(所旨院)이라는 관용숙소가 있어 험한 우두령을 넘나드는 길손들의 쉼터가 됐다.
경남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우두령은 일대의 지형이 소머리를 닮았다고 소우(牛)자에 머리두(頭), 재령(嶺)자를 써서 우두령(牛頭嶺) 또는 소머리재로 불린다.
우두령은 1978년 국도가 새로 개설되기 전까지 국도 3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으나 지금은 거의 차량이 다니지 않는 잊혀진 고갯길이 되고 말았다.
우두령은 경상남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로 일컬어졌는데 임진왜란과 이인좌의 난, 동학난,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골담마을 맞은편의 안마는 대2리로 속하는데 1450년 합천이씨 일가들이 처음 들어와 정착했다. 마을이 자리한 위치가 높아 대대(坮)자를 써서 대동(坮洞)이라 했는데 뒤에 약자로 대동(台洞)으로도 적었다. 또 마을에 대나무가 많아 죽동(竹洞), 댓골, 대동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두령 정상에서 우측으로 봉화산을 오르다 보면 감천 170리가 시작되는 봉화산 감천발원샘이 있다. 1999년부터 매년 가을 감천발원제를 지내고 있다.
↑↑ 감천발원지
ⓒ 김천신문

    
□대덕면의 문화유산
    
섬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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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면 조룡리에 소재한 섬계서원(剡溪書院)은 1802년(순조2년) 김녕김씨 문중에서 건립했는데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고 1914년 경의재(景毅齋), 1961년 세충사, 1996년 동별묘를 다시 세웠다. 세충사(世忠祀)에는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를 주벽으로 하고 맏아들로 연좌돼 함께 순절한 영월군수 김현석(金玄錫)을 배향하고 있다. 김문기는 충청도 옥천태생으로 형조,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456년(세조2년) 이조판서로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하고 1731년(영조7) 복관됐다. 또 동별묘(東別廟)에는 지례 출신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해 낙향한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와 제자인 윤은보(尹殷保), 서즐(徐騭)을 종향하고 있다. 서즐과 윤은보는 1434년(세종16년)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恩報感烏)’라는 제목으로 그 행적이 실렸는데 자손이 없는 스승 장지도를 위해 부모의 예로서 효행을 다한 대효자로 이름이 났다.
    
봉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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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 영휴대사(靈休大師)가 쓴 봉곡사중수사적비명에 따르면 봉곡사(鳳谷寺)는 664년(신라 선덕여왕 14년)자장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말 도선국사(道先國師)가 중수한 것으로 나타난다. 봉곡사의 사세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1700년대 초로 당시 18전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1717년 화재로 많은 전각이 소실된 후 사세가 급격히 위축됐다. 대웅전은 1707년(숙종 33년)과 1916년 중수하고 명부전은 1690년(숙종16년)과 1908년 중수가 이뤄졌다.
현재 대웅전과 명부전, 동상실, 일주문, 요사체 3동이 있는데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은 2008년 4월 2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4호로 지정됐다.
    
□대덕면의 산
    
대덕산
김천시 대덕면과 무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대덕산(大德山)은 해발 1,290m로 다락산 또는 투구봉으로도 불린다.
다락은 높다는 의미이며 투구는 산 정상의 생김새가 장군이 머리에 쓰는 투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악산, 금오산과 함께 김천을 상징하는 삼산이수의 하나이며 산의 생김새가 험하지 않아 덕성을 지닌 산이란 뜻으로 ‘대덕(大德)’이라는 산 이름을 얻었다.
    
□대덕면의 특산물
    
오이, 고랭지 감자 특히 유명 

대덕면 특산물 중 으뜸은 오이와 고랭지 감자. 품질은 물론 맛이 뛰어나 전국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으며 주생산지에 비해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양파와 사과 또한 알아준다.
오이는 63농가가 22ha에서 840톤을 생산하고 감자는 285농가가 33ha에서 830톤을 생산해 대산농협 유통센터 등을 통해 출하하고 있으며 양파는 145농가가 117ha에서 4천200톤, 사과는 39농가가 25ha에서 325톤을 생산하고 있다.
    
□대덕면의 산업체
    
자연 속 살아 숨쉬는 대덕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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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면 가례리 831-11번지에 위치한 대덕벽돌은 토목 건축 관련 모든 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업체이다.
1985년 대덕블록으로 설립돼 콘크리트벽돌, 콘크리트블록 등을 생산하다 1995년 전자동 유압성형기를 도입하고 그 이듬해 대덕벽돌로 상호를 변경하는 한편 대표자를 변경해 오늘에 이르렀으며 1997년과 1999년 2개의 KS인증을 받았다. 콘크리트벽돌(허가번호 제97-001-063호)과 속빈콘크리트블록(허가번호 제98-09-048호) KS인증을 받은 것이다.
“자연 속에 살아 숨쉬는 대덕벽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기업 대덕벽돌은 유압식 성형기와 자동 오토로다, 언로다, 완전자동 무인 큐빙을 설치해 보다 질 좋은 제품을 생산, 공급하고 있습니다. 완전 자동화된 기계 설비를 갖추고 우수한 품질, 정확한 규격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1986년 수동기계로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객만을 생각하며 과감한 투자와 연구를 거듭한 대덕벽돌의 모든 생산제품이 KS인증을 받았으며 현재는 원적외선 제품에 연구, 투자하고 있습니다. 수용자 여러분의 만족을 보람으로 여기며 국내 건설업계의 사랑받는 동반자로 성공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대덕신협 이사장을 거쳐 시의원에 당선, 활동하고 있는 이진화 대표는 “인류의 모든 공간을 보다 쾌적한 공간으로 창조하기 위한 미래지향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다. 
    
□대덕면의 학교
    
대덕중학교
대덕면 관기리 777번지에 위치한 대덕중학교는 1969년 10월 14일 설립 인가를 받아 1970년 3월 6일 첫 입학식이 거행됐으며 2015년 현재 제43회에 걸쳐 3천764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대덕초등학교
대덕면 관기리 235번지에 위치한 대덕초등학교는 1929년 5월 9일 4년제 대덕공립보통학교로 개교돼 1941년 대덕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1994년 3월 1일 대덕국민학교 가례분교장, 연화분교장, 내감분교장에 이어 1995년 3월 1일 문의분교장이 통합됐다. 1996년 3월 1일 대덕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84회에 걸쳐 5천19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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