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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면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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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까지 성주목으로 속했던 증산면은 1895년 외증산면과 내증산면으로 나눠졌고 1906년과 1914년 내증산면과 외증산면이 차례로 지례군에 병합되고 뒤에 내증산면이 김천군으로 이관되면서 증산면으로 개칭됐다.
경남 거창군, 경북 성주군과 경계를 이루며 수도산, 단지봉, 형제봉, 삼방산 등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인 산간오지로 산림 면적이 86%에 달한다. 수도산에서 발원한 대가천의 맑은 물과 수도계곡의 절경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며 청암사와 수도암은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유명하다. 여름이면 대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피서인파가 몰려드는 김천의 대표적인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청암사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3년간 은거하며 복위기도처로서 왕실과 인연을 맺었던 곳. 수도암은 보물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한 3점의 보물과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마을과 전설
증산면의 중심 유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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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면소재지인 유성리(柳城里)는 옥동과 버들밭(유성), 지소 등 세 마을로 이뤄져있으며 조선시대에 성주목 증산면에 속했다가 1895년 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으로 귀속됐다.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으로 편입됐고 1914년 세 마을을 통합해 유성리라 한 이후 1973년 옥동이 유성1리, 버들밭과 지소가 2리로 분동됐다.
증산면소재지인 옥동은 면사무소 뒤로 시루봉으로 불리는 산이 있어 시루증(甑)자에 뫼산(山)자를 써서 증산(甑山)이라 하고 이를 면(面)지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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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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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玉洞)이라는 지명은 옥류동(玉流洞)에서 유래됐다. 영남예학을 계승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대가천의 절경을 중국 송나라 주희(朱喜)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무흘구곡(武屹九曲)이라는 시에서 “냇물이 마치 구슬이 흘러가는 듯하다”라고 했다 해서 구슬옥(玉)자에 흐를류(流)자를 써서 옥류동(玉流洞)이라 했는데 뒤에 이를 줄여 옥동(玉洞)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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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계사 터(현 증산면사무소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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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증산면사무소 자리는 청암사와 수도암의 본사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쌍계사(雙溪寺)였으나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14일 임시 면사무소로 사용되던 쌍계사를 북한군 패잔병들이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유성2리는 버들밭으로 불리는 유성(柳城)과 지소(紙所) 두 마을로 구성됐다.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증산면, 1895년 성주군 내증산면,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으로 속하다 1914년 옥동, 유성, 지소가 유성리로 통합되고 1973년 유성, 지소가 유성2리로 분동됐다.
옥동에서 백천교를 지나 목통천변에 자리한 버들밭은 임진왜란 때 황상원(黃相元)이란 선비가 피난을 와서 정착해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버들밭이라는 지명은 당시 마을 앞에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이를 개간해 밭을 일궜다 해서 얻어진 이름. 또 버드나무가 성곽처럼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해서 버들유(柳)자에 성성(城)자를 써서 유성(柳城)이라 했다.
지소마을은 한지를 생산하는 장인촌으로 유명했는데 처음에는 이웃한 쌍계사를 중심으로 사찰에만 공급하다가 그 품질이 좋다는 평판이 나면서 나라에 공물로 공급하기도 했다.
지소(紙所), 지촌(紙村)과 같이 종이지(紙)자가 마을지명에 들어간 것이 이 같은 연유에서 비롯됐는데 수도계곡 일대에 자생하고 있던 풍부한 닥나무와 대가천의 맑은 물이 양질의 한지를 생산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청암사가 있는 평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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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룡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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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리(坪村里)는 원평촌(元坪村), 장뜰(壯坪), 가랫재 등 세 마을로 이뤄져 있다.
평촌리는 조선시대 말인 1895년까지 성주군 내증산면으로 속하다가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 1914년 김천군 증산면으로 속하게 됐다.
1500년대 말 성주이씨와 청주한씨, 밀양박씨 등 세 성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한다. 평촌이라는 지명은 산간오지인 증산면에서 유일하게 들이 넓은 지역이라 해서 ‘들이 평평하게 넓은 마을’이란 뜻의 줄임말인 ‘들마’라 했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평평할평(坪)자에 마을촌(村)자를 써서 평촌(坪村)이라 했다.
장뜰마을은 가랫재(秋嶺), 원평촌(元坪村)과 함께 평촌리로 속한 세 마을 중 가장 큰 마을로서 마을 주변으로 들이 넓어 성할장(壯)자에 평평할평(坪)자를 써서 장평(壯坪)이라 적고 장들이라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장뜰로 불렸다.
특히 장뜰은 수도계곡의 대가천변에 위치해 풍수지리로 볼 때 배가 떠나가는 형세인 행주선형(行舟船形)이라 했다. 이러한 형국에는 마을의 운세가 배에 실려 떠나가지 않도록 배를 묶어둬야 한다는 속설에 따라 마을 뒷산에 상징적인 의미로 말뚝과 밧줄을 뒀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또 대덕으로 연결되는 고개인 가랫재 아래에 위치한 가랫재마을은 아랫가랫재와 윗가래재로 나눠졌는데 가랫재라는 지명은 지대가 높아 항상 선선한 가을바람이 분다고 가을재라 하고 가을추(秋)자를 써서 추령(秋嶺)이라 하다가 지금은 가랫재로 불린다. 평촌리를 관류하는 수도계곡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계곡의 절경을 노래한 무흘구곡(武屹九曲)의 제7곡 만월담(滿月潭)과 제8곡 와룡암(臥龍巖)이 위치하고 있다.
평촌마을 위쪽 수도산(修道山) 입구에 자리 잡은 청암사(靑巖寺)는 원래 수도암과 함께 쌍계사의 산내암자였으나 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나라의 국운을 융성하게 할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창건됐다.
김천에서 가장 높은 마을 수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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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소폭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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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리(修道里)는 조선시대 말까지 성주목 증산면으로 속하다가 1895년 증산면이 양분 될 때 성주군 내증산면이 되고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으로 편입됐다가 1914년 김천군 증산면 수도리로 개편됐다.
이 마을은 수도산, 단지봉, 민봉산, 상투봉 등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산간오지로 마을이 해발 800m에 위치해 있다.
수도리라는 지명은 마을 뒤 수도산에 쌍계사의 산내암자였던 수도암(修道庵)으로부터 비롯됐다.
또 수도리 조금 아래 개울너머 내원골에는 내원(內院)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예전에는 10여호가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2가구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내원암(內院庵)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하나 내원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용소폭포 인근으로 용소골로 불린 또 다른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 또한 폐동이 되고 지금은 무심한 폭포소리만 요란하다.
길목에 자리 잡은 용소폭포는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수도계곡의 절경을 노래한 ‘무흘구곡(武屹九曲)’의 마지막인 제9곡으로 주변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수도리 위쪽에는 청암사와 함께 도선국사가 창건한 또 다른 고찰 수도암이 있다.
금광으로 유명했던 금곡리
면소재지인 유성리 옥동으로부터 버드내 방면으로 다리를 건너 한참을 가다보면 목통천(木通川) 좌우로 구금곡, 안터, 주막뜸, 개정지, 거물리 등 금곡리(金谷里)에 딸린 여섯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증산면으로 속해 금곡, 개정지, 거물리 등 세 마을이었으나 1895년 증산면이 양분될 때 성주군 내증산면으로 귀속되고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이 됐다가 1914년 통합해 금곡리(金谷里)라 했다.
금곡리 마을 중앙은 목통천으로 불리는 하천이 가로지르며 그 양쪽으로 좁다란 들판이 하천을 따라 형성되고 6호선 지방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성주군, 서쪽으로 수도리, 남쪽으로 장전리와 황점리, 북쪽으로 유성리와 접하고 있다.
구금곡(舊金谷)은 마을 뒤 골짜기에 옛날 큰 금광이 있음으로 해서 생긴 지명으로 지금도 금광에서 사용하는 화약을 저장해 두던 화약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구금곡 맞은편 산자락의 안터(內基)마을은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하천이 범람해 집을 잃은 구금곡 사람들이 지대가 높은 안터밭이라는 밭에 집을 지어 살면서 형성된 수원백씨의 집성촌으로 현재 금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거물리 아래로는 개정지 또는 가정지, 가정 등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옛날 마을입구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 나뭇가지가(柯)자에 정자정(亭)자를 써서 가정지(柯亭地)라 했는데 뒤에 음이 변해 개정지로 불리게 됐다.
구금곡 맞은편의 도로변으로는 주막뜸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명으로도 알 수 있듯이 주막이 있음으로 해서 얻어진 지명이다. 예전 도보로 합천 해인사와 성주 가천장을 이용하던 행인들의 요긴한 휴식터가 된 곳이다.
주막뜸 옆으로는 김해김씨 김치봉(金致鳳)의 처 안동김씨부인의 열녀각이 있는데 김씨부인은 남편이 병사하자 17세의 어린나이로 자결을 택해 열녀로 칭송이 자자했다.
목통천이 아름다운 장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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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폭정폭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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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리(長田里)는 청천, 마구실, 서무터, 소리재, 도가뜸, 새뜸, 봉답 등 여러 작은 마을로 이뤄져 있다.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증산면에 속했으며 1895년 성주군 내증산면,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이 됐다가 1914년 장전리로 통합됐다.
장전(長田)이라는 마을지명은 목통천 주변으로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긴 밭이 있어 긴장(長)자에 밭전(田)자를 써서 장전(長田)이라 했다.
제일 큰 마을인 청천은 마을 앞 목통천이 맑고 깨끗해 맑을청(淸)자에 내천(川)자를 써서 청천(淸川)이라 했는데 갤청(晴)자를 써서 청천(晴川)으로도 적는다.
또 마구실은 옛날 돌목재를 통해 성주로 연결되는 길목에 해당돼 말을 키우던 마구간이 있었다고 이를 뜻하는 마구실(馬廐室)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그런 연유로 이 마을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말의 형상을 닮아 말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고 동쪽 원황점 오르는 길목의 만폭정폭포에는 황점리 죽항마을 앞 하기소라는 물웅덩이에서 솟아난 청마(靑馬)가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구실에서 따발골과 처시골을 지나면 서무터로 불리는 또 다른 마을이 진돌목재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서무터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말 천주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을 때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첩첩산중인 이곳으로 들어와 살면서 ‘선한 가르침을 굳게 믿고 따른다’는 뜻을 담아 착할선(善)자에 굳셀무(武), 터기(基)자를 써서 선무기(善武基)라 했는데 뒤에 음이 변해서 서무터로 불리게 된 것이다.
1868년(고종9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광주안씨 안주원(알로이시오)이 처음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한 후 신앙촌을 형성한 이래 현재까지 전 주민이 천주교신자로서 서무터공소가 마을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 아래 봉답마을은 논이 귀해 받들봉(奉)에 논답(畓)자를 써서 봉답(奉畓)이라 했다하고 마구실아래 도가뜸은 과거에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 있어 도매점을 뜻하는 옛말인 도가(都家)와 작은 동네를 뜻하는 ‘뜸’이 합쳐져 도가뜸이라는 지명을 얻은 것이라 한다.
암행어사 박문수 전설이 전하는 황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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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항점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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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리(黃店里)에 속하는 청천마을 뒤로 형제봉과 단지봉, 새목양지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황점리는 원황점(元黃店), 대목(竹項), 초막골(草洞), 돌마당(石場), 문예(文禮) 등 다섯 마을로 이뤄져있다.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증산면과 내증산면에 속했다가 1906년 지례군 관할이 되고 1914년 다섯 마을을 통합해 황점리라 했다.
청천마을 뒤로 목통천을 따라 좁은 산길을 한참 오르면 원황점을 만날 수 있다. 원황점은 옛날 유황을 캐고 이를 정제해 나라에 바치는 일을 주업으로 해서 황점(黃店)이라는 지명을 얻었는데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김천을 둘러본 박문수 어사가 거창군 가북면 개금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황점마을 뒤 목통령에 접어들었다가 워낙 험준한 고개인지라 그만 탈진해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산나물을 뜯다가 이를 목격한 원황점의 한 부인이 급한 나머지 자신의 젖을 짜먹여 살렸는데 회생한 박문수가 부인에게 소원을 물었고 부인은 “황점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독한 유황을 캐고 나라에 바치는 일이 지극히 고단하니 이를 그만두게 해달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귀경 후 이를 영조(英祖) 임금에게 보고하자 “부인의 정성이 나라의 동량을 살렸다”하며 소원을 들어주게 한 이후 유황을 상납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원황점 마을을 내려와 우측으로 목통천을 건너면 마을에 대나무가 많다고 죽항(竹項),대목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그 뒤로 조금 더 오르면 초막골, 초동(草洞)으로 불리는 또 다른 마을이 연이어 나타난다.
옛날 마을사람들이 풀로 지붕을 얹은 초막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초막골로 불렸다고 하는데 초막골 맞은편으로는 문예(文禮), 문이로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옛날 글이 좋고 예의가 밝은 선비들이 살아 문예라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 문이라 불린다.
문예마을 뒤로 돌이 많기로 유명해 돌마당, 석장(石場)이라는 지명을 얻은 또 다른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 가구만이 남았다.
용바우전설이 전하는 황정리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증산면으로 속해 황정, 봉산, 고동으로 불렸는데 1895년 내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이 되고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이 됐다가 1914년 원황정, 봉산, 새뜸을 합해 황정리(黃亭里)라 했다.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수재민이 새뜸에 정착해 마을을 이뤄 네 마을이 현재의 황정리가 됐다.
황정마을은 조선중엽 성산이씨 이형진(李亨進)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 앞 소나무 숲에 정자를 지었는데 노란꾀꼬리가 나무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고 누를황(黃)자에 정자정(亭)자를 써서 황정(黃亭)이라 했다고 한다.
황정마을 입구에서 우측으로 수백미터 안쪽으로 자리 잡은 봉산마을은 인동장씨 집성촌으로 마을입구에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있어 큰새가 자주 날아와 봉황새봉(鳳)자를 써서 봉산(鳳山)이라했다고 전한다.
황정마을의 왼편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천상봉 산자락에 바람재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지대가 높아 바람이 거세어 바람재 또는 풍령(風嶺)이라는 동명을 얻었는데 지금은 세 가구만이 남아있다.
황정과 봉산마을사이에는 새뜸이라 불리는 또 다른 마을이 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인근의 수재민들이 모여들어 새로 살기 시작해 생긴 마을이라고 새뜸, 새터, 신기(新基)라는 지명을 얻었다.
이밖에도 황정리에 속했던 마을로 고무실(鼓舞室), 동내뜸(獨山), 오리골 등 세 마을이 더 있었으나 모두 폐동됐다.
고무실은 고동(鼓洞)으로도 불리는데 봉산마을에서 성주군 금수면 영천동으로 넘어가는 고무실재 아래에 위치했던 마을로 옛날 금씨(琴氏) 성을 가진 부자가 이 마을에 살면서 노래와 춤으로 세월을 보내며 살아 북고(鼓)자에 춤출무(舞)자를 써서 고무실(鼓舞室)이라 했다고 하는데 폐동과 관련한 전설이 전한다.
금(琴)씨 성을 가진 부자가 시주를 받으러 찾아온 스님을 박대해 쫓아냈다. 이를 고약하게 여긴 스님이 후일 다시 찾아가 마을 뒤 용바우를 깨뜨리면 후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 했고 이를 그대로 믿은 부자가 석공을 보내 바위를 깨어 버렸다. 이때 바위 속에서 용이 나왔는데 사흘간 피를 흘리다 죽었고 이후부터 금씨부자는 쇠락을 거듭했고 마을도 폐동이 됐다고 한다.
오리골은 고무실 마을과 5리가 떨어져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6·25전쟁 중에 전소된 후 폐동됐다.
연안전씨 집성촌 동안리
조선시대에 성주목 증산면 상동(上洞), 하동(下洞), 월포(月浦), 조산(造山)으로 나눠져 있던 마을이었으나 1895년 성주군 내증산면,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에 편입됐다가 1914년 이들 네 마을을 합해 동안리(東安里)라 했다.
동안마을은 임진왜란 때 연안전씨(延安田氏) 전붕길(田鵬吉)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한 이후 대대로 연안전씨 집성촌을 이뤘다. 마을의 배후에 산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편안하게 앉았다고 동녘동(東)자에 편안할안(安)자를 써서 동안(東安)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원래 웃뜸으로 불린 상동과 아래뜸으로 불린 하동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하나의 마을이 됐다.
가목재로 향하는 지방도에 접해있는 금포마을은 마을입구에 동제를 올리던 조산(造山)이 있어 조산마을, 조산말이라 했고 또 황항리에서 발원해 마을 앞 남바우들과 기미들을 관류하는 남암천에 비친 달빛이 절경이라 달월(月)자에 물가포(浦)자를 써서 월포(月浦)라고도 했다.
대표적인 지명인 금포는 풍수지리로 볼 때 마을의 생긴 지형이 배가 들어오는 항구 즉 포구형(浦口形)이라 금을 실은 배가 마을로 들어와서 부자마을이 되기를 기원하며 ‘금이 들어오는 포구’라는 뜻으로 쇠금(金)자에 물가포(浦)자를 써서 금포(金浦)라 했다고 한다.
맞은편의 주막땀은 옛날 가목재를 오고가는 길손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있음으로 해서 마을이 생겼다고 주막땀이란 지명을 얻었다.
주막땀으로부터 가목재 방향으로 가다보면 감사봉(監司峰)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옛날 성주에서 지례로 가던 관찰사(감사)가 산 아래에서 쉬어갔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전한다.
가목재아래 첫 마을 부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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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성주목 증산면으로 속해 월섬, 한적골, 감나무골로 나눠져 불린 부항리(釜項里)는 1914년 가목재 인근에 흩어져있던 작은 마을들을 합해 부항리라 개칭했다.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집을 잃은 수재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형성한 새마가 추가돼 오늘의 부항리가 됐다.
부항이라는 지명은 지례면 속수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일대의 지형이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같이 좁고 길어 고개이름을 가마목재, 가목재라 했다.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가마부(釜)자에 목항(項)자를 써서 부항령(釜項嶺)이라 하고 이 고개 이름을 마을지명으로 삼았다.
월섬마을은 정월대보름과 추석 때 달맞이를 하는 달뜨기난당이라는 산봉우리가 바다위의 섬처럼 우뚝 솟아있다 해서 달월(月)자에 섬도(島)자를 써서 월도(月島)라 적고 월섬이라 했다.
한적골은 일대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한적하고 고요하다 해서 한적골(閑寂谷)이란 지명을 얻었다. 감나무골은 마을에 감나무가 많이 있어 감나무시(枾)자를 써서 시동(枾洞)이라 적고 감나무골이라 했다.
그 아래 새터는 병자년 수해 때 집을 잃은 수재민들이 새로 마을을 이뤘다고 새마을, 새마, 새터라 했다. 이전마을은 새터에 살던 일부주민들이 이전해 세운 마을이라고 이전(移轉), 이전부락, 이전불이라 했는데 마을에 큰 바위가 있음으로 해서 용암(龍巖), 용바우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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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바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하는데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성산전씨 집안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용밭걸 양푼소 위에 조상의 묘를 들인 후 부자가 됐는데 뒤에 황항리로 가는 도로를 낼 때 바위 속에서 용의 형상을 한 말이 나와 울면서 날아갔다는 것이다. 이후 부자는 마을을 떠나고 산소는 방치됐는데 사람들은 용이 승천하는 명당의 혈을 잘랐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용바위는 황항리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거대한 폭포를 이뤄 마치 용이 승천하듯 또아리를 틀고 있었는데 폭포 위 도로가 나면서 떨어져 나간 산소는 수풀이 무성하다.
남암천의 발원지 황항리
황항리(黃項里)는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증산면으로 속했고 1895년 성주군 내증산면,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으로 이속돼 1914년 임평, 누루목을 합해 황항리라 했다. 조선시대 증산면이 성주목에 속해있을 때 내증산면의 면사무소가 누루목에 있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황항이라는 지명은 1700년대 초 오봉집(吳鳳集)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일대의 지형이 풍수지리로 볼 때 황소(黃牛)의 목 부분에 해당한다고 누를황(黃)자에 목항(項)자를 써서 황항(黃項)이라 적고 누른목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누루목이 됐다. 또 누루목 앞쪽의 임평(林坪)은 처음 임(林)씨 성을 가진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붙여진 지명인데 이 또한 음이 변해 임패이라 불린다. 일설에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간에 싸움이 나서 사람을 두들겨 패 죽인 마을이라 해서 인패이라 했다고도 하지만 이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입구의 수령 400년을 자랑하는 동목 정자나무는 풍년과 흉년을 예견한다는 유명한 나무로 봄에 잎이 한꺼번에 피면 그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문화유산
1.청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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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암사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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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가 859년(신라 헌안왕3년) 쌍계사의 산내암자로 창건한 청암사(靑岩寺)는 수차례 화재가 발생해 소실과 중건을 거듭했는데 현재의 전각들은 1911년 화재 이후 중건된 것이다.
화재가 일어난 다음해부터 주지 대운화상(大雲和尙)은 중창불사에 나섰는데 어느 날 빨간 주머니를 여인으로부터 얻는 꿈을 꾼 후 서울에 갔는데 나이가 많은 보살이 많은 시주를 하며 자신이 죽은 후 3년간 염불을 해달라고 해서 이로부터 불사를 크게 이뤘다고 한다.
청암사는 일제시대부터 불교강원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1987년 청암사 승가대학이 설립된 후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도량으로 유명해졌으며 현재도 10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정진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청암사 일대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으로 샘 자리가 소의 코에 해당돼 소의 코는 항상 물기가 젖어있어야 건강한 관계로 역시 청암사도 사세가 번창할 때는 우비천의 물이 많이 고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천왕문 앞으로 다리를 내고 새로 길을 개설하고부터는 샘물이 말랐다고 하는데 이것은 새로 길을 낸 자리가 누워있는 소의 목에 해당돼 목을 수시로 차와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비천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계곡 좌우로 바위를 온통 이끼가 뒤덮고 있다. 청암사(靑巖寺)라는 사찰명도 계곡의 바위에 이끼가 끼어 푸르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새로 튼실하게 놓인 돌다리를 건너고 오래 전 성주에서 옮겨왔다는 가냘픈 몸매의 탑을 따라 돌면 비구니 도량답게 부드럽고 은은하게 단청된 대웅전이 나타난다.
1911년 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건립된 대웅전 내부에는 당시 면모를 일신하고자 중국 강소성 항주의 영은사(靈垠寺)에서 옮겨온 이웃집 아저씨같이 후덕한 인상을 한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극락전은 청암사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1689년 숙종(肅宗)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장희빈(張禧嬪)의 간계로 폐위돼 서인으로 강등됐을 때 첩첩산중인 청암사로 몸을 의탁한 후 극락전에 3년간 기거했다. 절에서는 인현왕후를 배려해 거처인 남별당과 극락전을 기거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사대부가의 건축양식으로 다시 짓고 복위기도처로서 보광전을 건립했다.
당시 서인으로 강등된 신분이었지만 전 상전을 모시기 위해 궁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또 훗날 복위한 인현왕후가 사찰에 보답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왕실과의 관계가 조선말까지 지속됐다.
수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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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암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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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암(修道庵)은 859년(신라 헌안왕 3) 도선국사에 의해 쌍계사의 산내암자로서 청암사와 함께 창건됐다. 1951년 쌍계사가 소실되면서 백련암과 함께 청암사의 산내암자에 소속됐다. 김천지역에서 가장 고지대인 수도산 해발 1천80m지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야산 정상이 연꽃 위에서 합장한 부처님의 손처럼 보인다 해서 유명해진 사찰이다. 수도암의 원래 사명은 보광사(普光寺)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해인사와 함께 보광사를 화엄종 10대사찰로 꼽을 정도로 화음사찰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창건주인 도선국사가 전국을 답사하면서 신라의 국운을 융성하게 할 명당을 찾을 때 이곳에 절터를 잡고 너무 좋은 나머지 사흘 밤낮으로 춤을 췄다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으로 여인이 앉아서 비단을 짜는 형국이다.
도선국사는 절을 다 지은 후에 “앞으로 이곳에서 무수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며 7일간 또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예언이 적중했음인지 수도암에서 많은 불교지도자가 배출됐다.
수도암의 본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보물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세워졌는데 이 불상은 크기와 양식에 있어 신라 말 9세기경의 불상을 대표하고 있다.
약광전(藥光殿)에 봉안된 보물 제296호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양식으로 볼 때 10세기경인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증산면의 자랑
인현왕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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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길은 김천지역에 산재한 모티길 중 하나로 조선19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강등돼 3년간 청암사에 은거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2013년 조성된 이야기 숲길이다. 청암사에서 수도암까지 9Km거리이며 도보로 2시간 40분정도 소요된다.
구간 곳곳에 달래와 고로쇠나무 등 다양한 나무와 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쉼터가 조성돼 있다. 인현왕후는 1689년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 궁을 나온 후 청암사 극락전에서 3년간 숨어지내며 복위기도를 드린 끝에 환궁한 비운의 왕비로 알려져 있다.
□증산면의 특산물
증산면은 산간오지이기 때문에 대규모 특산물 생산은 어렵다. 이와 같은 가운데도 작목반이 구성돼 오미자, 호두, 사과 등 재배로 짭짤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오미자는 수도산오미자작목반(반장 이종재)을 중심으로 80농가가 28ha에서 30톤을 생산, 15억원 정도의 소득을 올렸으며 호두 역시 시루뫼호두작목반(반장 최원경)를 중심으로 40농가가 38ha에서 70톤을 생산, 1억5천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사과도 수도산사과작목반(반장 김근섭)을 중심으로 45농가가 22ha에서 35톤을 생산, 18억원의 소득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증산면의 맛집
수도계곡 절경에 자리한 웰빙 단지봉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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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봉가든(식당)은 천년고찰 청암사와 수도암을 품고 있는 명산 수도산에서 발원한 수도계곡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시골밥상의 풋풋한 맛이 오래 전부터 전국각지에 알려져 한번 맛을 본 손님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 김천의 이름난 맛집으로 유명하다.
다양한 요리 중에서도 토종염소와 닭요리가 일품인데 함께 곁들여지는 주인이 직접 담근 장아찌가 입맛을 돋운다. 특히 염소는 빈혈예방과 위장기능강화에도 좋고 다른 육류보다 영양적으로 우수한 성분이 많아 피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단지봉식당은 20여년 전 김춘보-문말순 부부가 고안한 특별 양념을 이용해 염소 특유의 냄새를 없애고 자연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게 한 것이 주효해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소문이 나게 된 것이다.
단지봉가든이 간직한 맛의 특징은 3가지로 요약된다. 입맛을 맞추기 위해 전통방식으로 고기를 재워 숙성시킨다는 것과 수도산의 깨끗하고 풍부한 미네랄 성분이 함유된 암반수로 양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인근에서 사육한 염소를 공급받아 위생적으로 가공하고 엄선된 재료만을 사용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이다.
단지봉가든(전화 010-3502-8959)은 앞으로도 내 가족에게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흑염소 등 건강에 좋은 웰빙재료만을 사용해 고객을 감동하게 한다는 계획이다.
□증산면의 학교
대덕중학교 증산분교장
증산면 동안리 산8번지에 위치한 대덕중학교 증산분교장은 1967년 3월 7일 지례중학교 증산분교로 3학급 인가를 받아 개교된데 이어 1974년 12월 27일 증산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이듬해 4월 21일 증산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99년 3월 1일 대덕중학교 증산분교장으로 인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46회에 걸쳐 2천285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증산초등학교
증산면 유성리 276번지에 위치한 증산초등학교는 1928년 9월 2일 증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됐다. 1963년 6월 30일 증산초등학교 수도분교장 설치인가(1992년 3월 1일 폐교)를 받은데 이어 1990년 3월 1일 남곡분교장이 편입(1993년 3월 1일 폐교)되고 1993년 3월 1일 장전분교장 편입(1995년 3월 1일 폐교)됐다. 1996년 3월 1일 증산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83회에 걸쳐 2천356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