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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경 황산에서 바라본 김천시 전경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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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말까지 김천은 관아가 있었던 교동과 삼락동 일대가 행정의 중심이었다면 시장과 역이 있었던 남산동, 용두동, 감호동 일대가 교통과 상업의 중심으로서 이 고장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 중에도 오늘날의 자산동에 해당하는 용두동과 감호동은 김천장이 들어섰던 장터로서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전국 5대 시장으로서 번성기를 누렸고 자산과 모암산 일대의 성내동은 김천역에 종사하는 역리(직원)나 관계된 업자들의 주거지로서 인구밀도가 높았다.
조선시대의 김천은 감천서쪽의 상신기(上新基)와 하신기(下新基), 갈마동, 중동, 상동, 자산, 좌동, 우동, 약수동, 부곡동을 일컬었는데 800호가 넘지 않은 작은 규모였다.
이 가운데 감천냇가로부터 모암산 일대까지가 상신기와 하신기로 조선시대 짐전장으로 불리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김천장터에 속했다.
일제시대인 1914년 상신기는 금정(錦町), 하신기는 본정(本町)과 욱정(旭町)으로 불렀다가 1946년 상신기는 모암동, 하신기는 용두동과 감호동으로 지명을 바꿨다. 1993년 용두동과 감호동을 합해 용호동, 또 1998년 용호동과 모암동을 합해 용암동으로 바꾸고 2008년 용암동과 성내동을 합해 자산동으로 바꿨다.
다른 지역보다 일찍이 도심이 형성된 관계로 주택이 노후화되고 도로가 협소한 자산동 일부가 지난 3월 도심재생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로부터 ‘햇살이 비치는 자산골’사업에 선정돼 올해부터 4년간 100억원(국비 70%, 도비 9%, 시비 21%)의 사업비가 투입돼 생활여건 개조사업을 함으로 주민들은 도심 속 전통마을로서의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마을과 전설
옛 김천장의 중심 용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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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두동 지명유래가 된 용두머리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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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우머리로도 불린 용두동(龍頭洞)은 감천을 경계로 지좌동과 마주보고 있는 지역으로 한신아파트 앞 경부선 철도로부터 감천을 따라 대구통로인 김천교와 용두동 사거리를 이어주는 직사각형태로 옛 김천장의 중심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상신기로 불리며 모래밭에 5일마다 장이 섰는데 조선후기에 전국의 보부상과 장꾼들이 모여 전국 5대시장의 하나로 번성했다.
용두동이라는 지명은 고성산에서 발원해 남산공원, 석천중, 황금동교회를 거쳐 한신아파트 앞으로 흘렀던 남산천(南山川)이 한신아파트 앞에 모래를 쌓아 높은 모래언덕을 이뤘는데 그 형세가 용이 머리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용우머리라 하고 한자로 용용(龍)자에 머리두(頭)자를 써서 용두동(龍頭洞)이라 했다.
지금의 경부선철교가 시작되는 한신아파트 앞이 용의 머리에 해당하다고 볼 수 있다.
김천장의 번성은 김천지방이 갖는 교통의 편리성과 관계가 있는데 김천지방은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내륙을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서 신라 때 이미 역(驛)이 설치돼 역과 역을 연결하는 관로(管路)가 발달했다.
김천역은 조선시대 초부터는 인근 20여개 역을 관할하는 도찰방역(道察訪驛)으로 승격해 전국적인 교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김천도찰방역은 지금의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일대에 있었는데 공물의 수송과 집산이 원활하고 인마(人馬)가 내왕하는 역 주변인데다가 낙동강을 통해 나룻배로 해산물을 수송할 수 있었던 용두동 감천변이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발전했다.
이 같은 김천이 가진 편리한 교통은 김천역장을 역임한 이중환(李重煥)이 자신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김천을 다음과 같이 평하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金山西卽秋風領, 領西卽黃間地/ 黃岳德裕以東水合爲甘川, 東入于洛東臨/ 川爲邑者知禮金山開寧, 善山俱享灌漑之利水/ 田極膏腴人民安土, 畏罪遠邪故 多世居士大夫, 金山卽崔判書善門之鄕, 善山有金烏山, 卽注書再之鄕/ 崔立節魯山, 吉立節前朝
“김산 서쪽이 곧 추풍령이고 추풍령 서쪽이 황간땅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물이 합해져 감천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이른다. 감천을 낀 고을이 지례, 김산, 개령이며 선산과 함께 감천물을 관개하는 이로움을 누린다. 밭이 기름져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하는 까닭으로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 김산은 판서 최선문의 고향이며 금오산이 있는 선산은 길재의 고향이다. 최선문은 노산군을 위해 절의를 지켰고 길재는 고려를 위해 절의를 지켰다.”
이후 1901년 일본인 주도로 경부선철도 부설공사가 시작되면서 일본인 기술자들과 이들을 상대하는 잡화상들이 김천에 임시정착하면서 일본인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1905년 철도공사가 끝나고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도 많은 일본 상인들이 김천의 시장성에 매료돼 정착했고 용두동 김천장터주변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기존의 상인들은 지금의 감호동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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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년 일본상인들에 의해 정비된 용두동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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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50세대 150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이 1907년에 150세대 600명으로 급증했는데 김천장 일대를 석권한 일본인들은 평화동 김천역일대까지 상권을 넓히기 위해 1909년 김천역에서 용두동 시장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1916년 시가지 정비사업을 실시했다. 용두동에 233채의 일본식 주택을 짓고 도로를 바둑판처럼 만들어 그들이 사는 마을이 중심이라는 뜻으로 본정(本町)이라 하고 혼마치라 불렀다.
또 일본인들이 장악한 용두동일대의 상가와 주거지를 감천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919년부터 제방을 축조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우회도로 일대가 됐다.
1910년경 경부선철도 부설을 기념해 일본인 사진작가가 황산에서 촬영한 김천시내 유리원판사진을 보면 다른 지역과 달리 거대한 도심을 형성하고 있는 용두동일대의 번성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또 그 사진 속에는 희미하게나마 돛대를 달고 정박 중인 여러 척의 나룻배를 확인할 수 있어 이 일대의 영화를 증명해 주고 있다. 김천장은 평양, 개성, 대구, 강경과 함께 200여년 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큰 시장을 형성했는데 내륙에 위치한 다른 시장과 달리 축산물에 이어 생선 등의 어물이 두 번째로 많은 거래량을 기록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전후로 김천장은 서서히 쇠퇴해 감호동일대 일부만이 남아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으며 주력 시장은 황금시장과 평화시장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거대한 늪을 이뤘던 감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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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호시장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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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동 사거리에서 지좌동으로 연결되는 김천교 방면 도로 북쪽으로 감천변에 자리한 감호동은 조선시대까지 용두동과 함께 하신기로 불렸는데 1914년 욱정(旭町), 1946년 감호동(甘湖洞)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1993년 용두동과 통합해 용호동이 되고 1998년 모암동과 합해 용암동으로 동명이 변천되어 오다가 2008년 용암동과 성내동이 합해져 자산동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자산동에 속해있다.
감호동이라는 지명은 감천과 직지천이 만나는 지점인 관계로 김천의료원과 옛 김외과 일대에 큰 늪과 호수가 있어 감천(甘川)의 감(甘)자와 호수(湖水)의 호(湖)자를 따서 감호(甘湖)라 했다.
현재의 감호동일대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주거지역인 용두동 본정을 보호하기 위해 감천변에 제방을 쌓으면서 형성된 마을로 그 전에는 용두동과 함께 감천변으로 길게 모래사장을 형성해 장터를 이뤘었다. 예전에는 나룻배를 잇대어 감호동에서 지좌동으로 연결하는 다리가 가설돼 배다리라는 지명이 생기기도 했을 정도로 호황기를 누린 시절도 있었다.
감호동 일대는 지대가 낮아 장마철마다 물에 잠기기 일쑤였는데 지금도 지반의 대부분은 모래와 뻘층으로 이뤄져있음을 알 수 있다.
엣 김천장이 쇠퇴한 후 어물전이 일부남아 감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또 수년 전까지만 해도 감호동에서 소꾸미 중간 고속도로 다리 밑에 우시장과는 별도로 염소, 개, 닭, 오리, 고양이, 토끼 등 중소동물을 거래하는 가축시장, 속칭 개전이 열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사모바위 전설이 전하는 모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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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암산에서 바라본 모암동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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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동과 감호동 사이에 모암산을 중심으로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는 모암동(帽岩洞)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감천물이 들어와 습지를 형성한 쓸모없는 땅이었다. 1909년 이 일대 토지를 헐값으로 매입한 일본인들이 자기네들의 상권을 넓히기 위해 김천시장과 평화동의 김천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게 되면서 모암동일대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도로는 용두동 김천시장에서 현 김천우체국을 지나 삼각로타리-옛 김천상공회의소-김천역으로 연결되는 구간으로 도로주변의 저습지와 논을 매립해 상가와 주택이 들어서면서 김천시가지의 영역이 비약적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모암동이라는 지명은 모암산 남쪽 끝에 옛 관리들이 쓰던 사모를 닮은 바위가 있음으로 해서 얻게 된 지명인데 이 바위는 양천동의 할미바위와 함께 김천을 대표하는 전설의 하나로 조선 초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영남제일의 문향으로 일컬어지던 김천의 영화를 상징하고 있다.
자산과 연결돼 있는 모암산은 산 끝자락에 사모(帽)형상의 바위(岩)가 있음으로 해서 모암산이라 했고 청룡의 형세라 청룡산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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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바위가 있던 모암산 바위절벽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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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지(金陵誌)’에 의하면 김천에서 많은 과거급제자가 배출되는 것은 이 바위의 정기를 받은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고 요직에 등용된 이 고장 출신 인재들의 고향 방문이 잦아지면서 영접을 책임진 김천역의 역리들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한 역리의 꿈에 도인이 나타나 사모바위를 깨트리면 바위의 영험함이 사라져 김천에 인재가 끊어져 역리들의 수고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고 마침내 바위를 밀어 떨어뜨리니 과연 이 지방에 과거급제자가 나오지 않게 됐다고 한다.
이후 양천 하로마을을 비롯해 김천 각처에서 무수히 배출되던 인재가 끊어지게 됐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하로마을 화순최씨 문중에서 옛 영화를 되찾고자 사모바위를 가져다 마을입구에 뒀다는 것이다.
다음은 1718년 여이명(呂以鳴) 선생이 쓴 ‘금릉지(金陵誌)’에 등장하는 사모바위에 관한 내용이다.
“靑龍尾下有墜石如帽/ 諺傳舊在龍頭上其時賀老崔李昇貴冠盖繹續驛吏不勝其弊潛爲墜落云/ 人傑之挺雖曰地靈冠冕之盛豈關於/ 石墜之後賀里科第不出漸至凌替山家之說曰其惑然耶或云運其石不置其舊處則可以復古云/ 而世無娥氏奈何”
“청룡산 끝에 떨어진 돌이 있는데 그 모양이 사모와 같다. 전하기를 과거에는 용의 머리에 있어 하로의 최씨, 이씨 가문에서 벼슬을 많이 해 수레의 왕래가 끊임없이 이어짐으로 역리들이 그 폐단을 견디지 못하고 바위를 몰래 떨어뜨린 것이라 한다. 뛰어난 인걸이 땅의 기운을 받는다고는 하나 벼슬에 오르는 것이 어찌 돌에서 연유되겠는가. 돌이 떨어진 후 하리에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지 않고 침체되자 어떤 이는 그 돌을 원래 자리에 두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 과아씨(娥氏: 중국고사에 나오는 신화 속의 인물로 옥황상제의 명으로 산을 옮겼다는 장사)가 없는 것을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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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바위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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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설이 출현한 시점은 연산군 시절로 알려지고 있다. 김천으로 장가들어 살다가 관직을 마친 후 낙향해 김천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인연을 맺었던 김천의 인재들이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며 대거 참화를 당한 사연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모바위전설은 김천역의 역리로 상징되는 중앙의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바위로 상징되는 김천의 인재들이 철저하게 탄압받게 된 당시의 정치상황과 지역민의 참담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달리 사모바위는 혼인형(婚姻形) 지세로 알려진 용두동, 황금동 일대와 연계하는 시각도 있다.
즉 조선시대 김천장이 번성한 것은 사모바위로 형상화된 모암산의 신랑과 할미바위로 형상화된 황금동의 신부가 마주보며 혼례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랑 신부 중간의 초례상에 해당되는 지점에 김천장이 위치하고 있어 혼례식장에 하객이 몰려드는 것과 같이 시장에 사람이 몰려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이다.
민족사학의 선구자로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은 한글가사 ‘금릉풍경(金陵風景)’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백두산 일지맥이 동으로 뻗어나려
대소백산의 되얏으매 소백산 서북가지
속리산이 되얏난데 속리산 한줄기가
남으로 뻗어나가 금릉으로 배치하고
김천명당 여럿난데 산명수려 그 가운데
기암괴석 쌍립하니 그 형상이 이상하다.
상대하야 섰난모양 사람으로 이르며는
신랑신부 마주서서 초례하난 거동같이
남동여서 완연하고 각색제구 구비하다.
용두방축 동자상(童子床)에 황신이 기르기요
감천수 주전자에 약수동 술잔이라
과하주천 술을 부어 교배하난 거동이며
하로노인 상객으로 마좌산 말을 모니
시내거리 연석되어 내왕손님 모여든다.
미곡에 쌓인백미 금곡에 빛난황금
봉황대상 봉황유(鳳凰遊)라 봉황같이 화락부부
고왕금래(古往今來) 유전(流轉)하니 천장지구(天長地久) 무궁일세
이따에서 나난자녀 님취여흔 하게면
군자숙녀 쌍을 이뤄 봉황우비(鳳凰于飛)하오리다.
최송설당은 이 가사를 통해 사모바위, 할미바위전설로 인해 김천에 사람이 몰려들어 번성함을 은연 중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모바위, 할미바위 전설은 김천을 대표하는 전설로서 김천장의 발달 배경에는 모암산 사모바위와 양천동 할미바위의 혼인이라고 하는 요소를 담고 있다. 김천장의 번성이 우연이 아니라 혼인형국에 자리 잡은 연유이며 혼인축하객을 곧 장꾼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모암산에서 하산하는 길 중 한 코스로 1m남짓한 좁은 길을 따라 300m정도 옛 길이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 용두동 일대에 살다가 삶의 터전을 잃거나 한국전쟁 후 김천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이 자산과 모암산 일대를 개간하고 판잣집을 살았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김천의 어려웠던 옛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주택지로 골목 곳곳에 비탈진 땅을 일궈 야채를 심었던 이국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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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채밭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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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방마전설이 전하는 성내동
성내동(城內洞)은 조선시대 말까지 남산동에 김천역(驛)이 있을 때 고성산으로부터 흘러내린 산줄기가 현재의 중앙초등학교와 성남교, 김천교육청, 항도아파트, 김천여자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야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산줄기는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온다는 쥐의 입에 해당하는 명당으로 일본인들이 1905년 경부선철로를 부설할 때 이를 끊기 위해 일부러 성남교 일대에 철길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이다.
성내동은 1909년 일본식 지명인 성내정(城內町)으로 고치고 죠나이마치라 불렀다.
능선의 안쪽은 성내(城內)라 통칭했는데 안쪽에 자산마을과 마부들이 사는 뒷방마가 있었다. 뒷방마는 현재의 성남교 일대로 방앗간의 짐을 마차로 운송해 주는 마방(馬房)이 운집해 있었다.
자산마을은 현재의 김천교육청에서 자산 사이에 있었는데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많은 민가가 헐려 자산 자락에 집을 지어 이주했다. 물령동은 자산 충혼탑 아래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옛날 물령못이란 저수지가 있음으로 해서 생긴 마을이름인데 일제 강점기에 매립됐다.
김천을 대표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하나였던 자산은 원래 자고새자(鷓)자의 자산(山)이었으나 이 산에 있던 바위가 해질 무렵이면 자주색 빛을 낸다고 자줏빛자(紫)자의 자산(紫山)으로 바뀌었다.
빛을 냈다던 바위는 경부선 철도공사 과정에서 석재로 충당돼 사라지고 없다.
성남교는 남산동의 중앙초등학교와 성내동의 김천교육청을 연결하는 다리로 옛날에는 이 일대를 일컬어 뒷방마라 했다. 뒷방마는 김천역에서 관리하던 역마(驛馬)가 노쇠해지면 김천역에서 운영하던 연자방앗간으로 보내져 죽을 때까지 연자방아를 돌렸다. 뒷방마라는 것은 뒷방늙은이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뒷방으로 물러난 말’이라는 뜻이다.
뒷방마 아래는 갈마동이라 불렀는데 성내동 항도아파트에서 시외버스터미널 일대를 지칭하는 옛 지명으로 말의 거세(去勢)와 말굽에 쇠를 박아주는 마의(馬醫)들의 집단거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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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균 의사 순국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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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공원에는 구성면 상좌원 출신 일괴(一槐) 이명균(李明均) 의사의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69년 건립된 비석으로 머리글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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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혼탑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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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반공호국영령추모비도 우뚝 서 있다. 공산주의에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김천지역 반공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86년 건립됐으며 매년 10월 30일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김천출신 백수 정완영 시인이 쓴 헌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신은 사라져도 넋은 굽어 살피시는 이 천추의 한 남긴 채 만세토록 의(義) 심은 이, 한잔 술 한 오리 향연을 당신 앞에 올립니다. 몸 바쳐 조국 땅에 한줌 흙을 보태신 님 뜻 남겨 겨레 가슴 붉은 피로 이어진 님, 한 덩이 차운 돌 세워 더운 숨결 새깁니다.”
반공호국영령추모비 가까이에 있는 충혼탑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김천지역 전몰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2년 건립됐으며 1998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건립됐다. 이종호 소령을 비롯한 전몰용사 1천79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매년 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이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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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암산 아래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성내동의 할머니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자식이 없는 이 할머니는 1970년 별세하기 전 논 1천평을 마을에 희사하고 자신의 제사를 부탁했다. 매년 9월 9일 지역유지들이 모여 제사를 올리며 할머니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자산동의 산
모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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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암산은 자산동 중앙부에 있는 산으로 높이 130m, 길이 800~1천m, 폭 200~300m이며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쭉한 형태로 두 개의 구릉으로 나눠진 도심야산이다. 통상 남동쪽 구릉은 자산, 북서쪽 구릉은 모암산이라 했는데 지금은 통칭 모암산으로 불리며 청룡의 지세라 청룡산이라고도 했다. 산 남쪽이 시가지로 개발되기 전에는 고성산(高城山) 줄기가 이곳을 거쳐 모암산으로 이어졌으나 1905년 경부선철도와 도로가 지나고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김천 시가지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야산이 됐다.
김천을 흔히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라 하는데 모암산은 삼산, 즉 김천을 대표하는 세 개의 산 중 하나인데 특이하게도 모두 상스러운 새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즉, 자고새를 뜻하는 ‘자(鷓)’자를 넣은 자산(鷓山)과 봉황새를 뜻하는 ‘황(凰)’자를 넣은 황산(凰山), 매를 뜻하는 ‘응(鷹)’자를 넣은 응봉산(鷹峰山)이 그것이다.
모암산의 다른 이름인 자산은 원래 자고새를 뜻하는 ‘자(鷓)’자를 넣은 자산(鷓山)이었으나 뒤에 해질 무렵이면 산에 있는 바위가 자줏빛을 띠어 ‘자주색자(紫)’자와 ‘볕양(陽)’자를 써서 자양산(紫陽山)으로 바뀌었으며 줄여서 자산(紫山)으로 부른다. 신비로운 빛을 냈다던 바위는 1905년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 때 폭파돼 석재로 사용되고 지금은 없다.
자산에는 김천역의 역리 임천강(林千江)을 추모하는 계적사(啓迪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임천강은 선조임금의 어가를 가로막고 역리에게도 과거응시권을 달라고 하소연해 1581년 11년 만에 역리들의 출사기회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이조참의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제사를 올릴 때면 전국의 역리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자산동의 뿌리
김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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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요지로서의 김천이 갖는 장점은 김천역과 도로여건의 발달과 함께 역촌(驛村)의 형성과 문물의 집산을 촉진시켜 김천장을 전국규모의 시장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김천에서 서울로 가는 경로는 상주-문경-조령-충주-용인을 거치는 것과 황간-청주-진천-용인을 거치는 두 길이 있었는데 도보로 6일정도 소요되는 일정으로 동(성주)-서(황간)-남(거창)-북(상주)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요지에 해당됐다.
김천장은 지금의 용두동 일대로 1922년 감천제방이 축조되기 이전까지 감천모래밭이 대부분 장터로 이용됐다. 고성산에서 남산공원, 황금동교회를 거쳐 한신아파트와 경부선철교사이로 흐르던 고성천이 감천과 합류되는 지점에 모래가 언덕을 이루고 있어 용머리(龍頭)로 불린 곳이 시장의 중심이었다.
김천장이 평양, 개성, 강경, 대구와 함께 조선5대시장의 하나로 번성기를 누린 시기는 1880년경부터 1930년경까지로 거래물품은 축산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는 우시장의 발달과 함께 도축업이 발달해 소가죽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거래하는 김기진(金基鎭)이라는 우피거상(牛皮巨商)이 출현하기도 했다.
또 내륙임에도 불구하고 수산물의 거래가 농산물의 거래보다 활발했는데 이는 낙동강과 감천을 통해 수송된 남해안의 생선을 감천에서 1차 가공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공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경부선 철도공사를 위해 김천에 사무소를 차렸던 인부들과 이들에게 자재납품을 위해 김천을 내왕하던 일본상인들이 김천이 가진 시장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다수가 정
착해 근대적인 상권을 형성하는데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현대식 도로가 개설되기 전인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수송수단이 발달해 농산물의 수출, 해산물의 수입 등 무역이 늘어 일제 초기에는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까지 부상하기도 했으나 중기이후 도로망이 전국적으로 개설돼 평준화되면서 교통요지로서의 김천의 이점도 약해지 면서 김천장의 명성은 점차 사라졌다. @IMG17@
전통시장
오늘의 자산동일대는 옛 김천장의 중심으로서 현재도 감호시장과 중앙시장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감호시장은 어물전을 중심으로 번창했으나 6·25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됐다가 1954년 정부지원으로 86칸의 점포를 갖춘 시장규모를 다시 형성했다. 현재 건어물과 농산물, 잡화를 중심으로 80여 점포가 예전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웃한 중앙시장은 1970년대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고 대규모 의류매장의 등장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는 있으나 아직도 지역을 대표하는 의류전문 시장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 공구류와 농기계 중심의 특성화된 상가로서 다시 한 번 도약을 꿈꾸고 있다.
□자산동의 자랑
자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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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만5천㎡ 규모의 자산공원은 정상에 위치한 2층 8각의 누각 자운정이 운치를 더하는데다 최민호(자산동 출신 베이징올림픽 유도 60㎏급 금메달리스트)산책길, 시가있는오솔길 등 산책로가 나있어 이곳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봄이면 아름드리 왕벚나무가 꽃을 피워 절경을 이룬다. 공원 내에는 충혼탑, 반공호국영령추모비, 무공수훈자전공비, 이명균의사순국기념비 등이 있어 김천지방의 호국성지로 자리를 잡았으며 애국충절의 고장으로도 불린다.
벽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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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암산을 감싸며 형성된 자산동 벽화마을에는 연중 언제든 민속놀이와 야생화가 피어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김천의료원으로부터 모암산을 넘어 김천교육지원청에 이르는 1Km 남짓한 골목에는 테마별로 출산장려길, 벽화마을길, 소원성취길, 야생화길이 펼쳐져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2009년 조성된 이후 언론매체와 인터넷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매년 천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새로운 김천의 명소로 각광 받고 있다.
□자산동의 명물
4대째 가업 잇는 모암식품
대를 이어 가업의 전통을 이어가는 모암식품. 1930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대째 오직 물엿 만들기만을 고집하고 있는 모암식품은 2009년 김천시가 시 승격 60년 기념사업으로 발간한 ‘김천기네스’에도 올랐다.
모암물엿으로 더 잘 알려진 모암식품의 전통은 현 대표 박성우씨의 조부 고 박도운씨가 1930년 상주 낙동에서 물엿을 만들기 시작한 이래 1950년 부친인 박명서씨가 현 위치에 정착해 모암물엿시대를 열었고 1972년 모암식품으로 상호를 바꿨으며 현재는 차남 박범기씨가 모암물엿 4대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비법을 전수받고 있다.
□자산동의 학교
김천여자고등학교
모암동 100-1번지에 위치한 김천여자고등학교는 1935년 4월 23일 김천고등여학교로 개교돼 1951년 8월 31일 김천여자고등학교로 개칭됐다. 김천여자중학교와는 1951년 9월 5일 분리됐다가 1961년 9월 4일 통합되고 1970년 9월 5일 다시 분리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77회에 걸쳐 1만7천403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여자중학교
성내동 51번지에 위치한 김천여자중학교는 1935년 4월 23일 김천고등여학교로 개교됐으며 1946년 1월 26일 김천여자중학교로 개칭됐다. 1970년 9월 5일 김천여자고등학교와 분리되고 1995년 12월 19일 현주소지로 이전된 김천여자중학교는 2015년 현재 제77회에 걸쳐 1만9천494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모암초등학교
모암동 89-61번지에 위치한 김천모암초등학교는 1950년 6월 10일 금릉학원으로 개교됐다. 1950년 11월 3일 현 주소지로 이전된데 이어 1996년 3월 1일 김천모암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63회에 걸쳐 1만1천621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