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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우리 고장 어제와 오늘<17> 평화남산동(平和南山洞)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09.09 16:36 수정 2015.09.09 04:36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김천 교통 상업의 중심지
김천역 평화시장 활성화 통해 옛 명성 찾고자 노력

↑↑ 1950년대 김천역 앞 평화동일대
ⓒ 김천신문

김천의 중심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평화남산동(平和南山洞)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김천면에 속한 갈마동과 서낭댕이 두 마을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면서 김천역이 들어서자 역 앞에 일본인들이 철도이용객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잡화점을 열면서 급속하게 상가가 형성됐다.
1906년 일본상인들이 일본인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역전일대를 야마토마치(太和町)라 부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평화동으로 고쳤다. 1962년 1·2동으로 분동했다가 1983년 다시 통합했고 2008년 남산동과 합해 평화남산동이 됐다.
경부선철도가 개설돼 평화동에 김천역이 세워지기 전까지 남산동에서 부곡동 방향으로 가는 도로는 노실고개를 거쳐 서부초등학교 앞으로 가는 옛 역로(驛路)와 평화시장길 등 두 길 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6·25전쟁 후 시가지를 정비하면서 현재와 같이 철로를 따라 큰길이 나게 됐다.
남산동은 고려시대 초 김천역이 현재의 김천초등학교 일대에 설립되면서 교통의 중심으로 부상했고 역 주변으로 찰방골과 척동, 지게동이 들어섰다.
과하천은 원래 이름이 금천(金泉)으로 김천이라는 이 고장의 지명이 유래된 유서 깊은 샘이기도 하다.
최근 도심재생사업을 통해 교통과 상업의 중심이었다가 침체일로에 있는 평화남산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 중이다.
    
⭍마을과 전설
    
김천 상업의 중심 평화동
↑↑ 평화동 중심가
ⓒ 김천신문

평화동(平和洞)이라는 지명은 일제 강점기에 생긴 것으로 갈마동, 서낭댕이 등으로 불렸다. 이 일대가 본격적으로 도심이 형성된 것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김천역사가 중공 된 이후로 허허벌판의 미나리꽝에 지나지 않았던 버려진 터가 일약 김천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됐던 것이다. 평화동으로 속한 옛 마을의 하나인 갈마동은 현재의 김천교육청으로부터 대한교통, 하나로마트 일대에 있었던 마을로 조선시대 말까지 김천역에서 관리하는 말(馬)의 거세(去勢)와 발굽의 편자를 갈아주던 사람들이 주로 살아 깔마동, 또는 갈마동이라 했던 것이다.
↑↑ 서낭댕이 터
ⓒ 김천신문

서낭댕이는 김천역 앞으로 국도가 새로 개설되기 전까지 주 통로로 이용된 평화시장길에서 서부초등학교와 평화동사무소, 시립도서관이 갈리는 사거리일대가 옛날에는 높은 고갯길이었는데 이곳에 성황당과 함께 민가 몇 채가 자리 잡고 있어 마을 지명을 서당댕이라 했다.
오고가는 길손들이 이 고개를 지나며 돌을 던져 행운을 빌었다고 하는데 차츰 고개가 깎여 이제는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후생주택은 옛 농고(현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길에서 김천역 방향으로 철로를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로 6·25전쟁 때 미군폭격으로 김천시가지의 대부분이 초토화되자 전후 주택난해소를 위해 미국원조자금으로 전쟁 중 임시 활주로로 썼던 철로변에 50여동의 주택을 짓고 후생주택이라 한 것이 마을지명으로 굳어졌다.
    
옛 교통의 중심 남산동
남산동(南山洞)은 남쪽으로 고성산을 등지고 황금동, 평화동과 이웃하고 있는데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김천면으로 속한 중동, 하동으로 나눠져 있다가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해 남산정(南山町)으로 고쳐졌고 1946년 하동, 중동, 상신기동, 성내동, 우동의 일부를 합해 남산동으로 개편했다.
남산동은 고려시대에 설치된 김천역이 있던 마을로 역을 중심으로 주변에 마을이 형성된 전형적인 역촌(驛村)이었다.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은 남산공원 뒤 고성산자락에 있는 샘인 금천(金泉)에서 비롯된 것으로 금천은 금을 캐던 곳에서 솟아난 물이 맛이 좋아 공동우물로 쓰이고 있었는데 샘 아래에 고려시대 역이 설치되면서 역명을 금천에서 연유해 김천역(金泉驛)이라 한 것이 이 고장 지명의 유래가 됐다.
금천은 물맛이 좋아 이 물로 술을 빚은 것이 궁중에 진상됐다는 과하주(過夏酒)인지라 달리 과하천, 과주샘이라고도 불린다.
김천초등학교에서 남산성결교회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김천도역은 경상도의 21개 속역을 관할하는 찰방(察訪)이 상주하는 큰 규모의 역으로 지금도 김천초등학교 교정과 남산공원에는 여러 기의 찰방선정비가 남아있다.
김천역은 고려시대 초에 처음 설치된 후 1884년 근대적인 우편기구인 우정총국이 생기면서 역참제도가 폐지되기까지 김천일대를 포함해서 멀리 대구, 인동, 거창, 성주, 고령, 칠곡, 합천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북도 20여개 속역을 거느린 큰 규모의 역으로 이 지방이 역사적으로 교통의 요지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김천도역에 딸린 이 지방의 속역으로는 삼락동 문산역과 남면 부상역, 개령 양천역, 구성 작내역, 대덕 장곡역이 있는데 중심역인 남산동 김천도역으로부터 이들 속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됐다. 따라서 전국으로부터 문물의 집산지로 김천이 부상하면서 조선후기 김천장이 전국 5대시장의 하나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를 통해 본 조선시대 김천역의 규모는 역의 책임자인 종6품의 찰방 1인과 임씨, 한씨가 세습하는 역리, 역졸이 693인, 남자종인 역노가 316인, 여자종인 역비가 151인, 큰말이 2필, 중간말이 2필, 작은말이 6필 있었고 역 관내에 찰방집무소 12칸을 비롯해 향리청 ,양마청, 병기고 등 82칸의 건물이 있었다.
김천역장에 해당하는 찰방 역임자 중 ‘택리지(擇里志)’의 저자로 유명한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1719년부터 3년간 김천찰방을 지냈다. 1722년(경종22년)에 노론 관료들이 경종을 독살하려 했다는 목호룡(睦虎龍) 고변사건에 연루돼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렸었는데 이때의 죄목이 목호룡(睦虎龍)에게 김천역에서 말을 빌려줬다는 것이었다.
이중환은 끝까지 빌려준 것이 아니라 목호룡이 말을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해 유배를 가는 것으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자신이 노론이었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해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당쟁이 없는 살기 좋은 터를 찾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면서 집필에 전념해 ‘택리지’라는 역작을 탄생시키게 됐던 것이다.
이첨(李詹)이라는 선비가 김천역에 들렀을 때 낡은 역사(驛舍)를 보고 지은 시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낡은 집이 산기슭에 의지했고
위태로운 다리는 옅은 모래를 건넜다.
땅이 기름지어 가을에 풍년들었고
나무는 늙어서 해마다 꽃도 안 피네
사신의 탄 말이 역 아전을 놀라게 하고
시골 풍속은 들노래에서 들려주네
유연히 회포가 움직이는 것
좋은 계절은 나그네로 지냄일세
    
김천역은 주변 마을의 지명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관터, 찰방골, 옥터 등이 그것이다.  관터와 찰방골은 지금의 김천경찰서 뒤편에 있던 마을의 지명으로 김천역의 수장인 찰방의 관사가 있음으로 해서 붙은 지명이며 남산공원 산등성이에 마을이 있다고 산마루척(脊)자를 써서 척동(脊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 지금의 남산성결교회 옆으로는 김천역에 딸린 옥사(獄舍)가 있었다고 옥터라 했고 남산공원 서쪽 언덕배기에는 조선시대 뗄 나무를 시장에 내다팔아 연명하던 나무꾼들이 살았다고 지게동이라 불렀다.
남산공원에는 1916년 일본인들이 그들의 신을 모신 신사(神社)를 세우고 성역화 작업을 했는데 지금도 남산공원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로 당시에 세워진 일본식 석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김천신사가 위치했던 남산(南山)은 1905년 경부선 철도 부설 이후 김천지역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급증하면서 이들에 의해 처음에는 근린공원으로 조성됐다.
1912년 일본 천황이 사망하자 남산공원에 군수와 관리, 일반시민 등 천여명이 운집해 추도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15년 5월 일본인들이 주동이 돼 김천태신궁봉찬회(金泉太神宮奉讚會)를 조직하고 남산에 신사건립 사업을 시작해 1916년 신사가 준공됐다.
↑↑ 남산공원 계단
ⓒ 김천신문

김천신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의 신사(神祠)로 출발해 1924년 천황의 성혼기념일을 맞아 신사 경내를 확장하고 신전(神殿)을 단장하는 한편 공원 내 땅을 넓히고 많은 벚나무를 심었다. 또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과 석등, 돌다리(남산교)를 설치하는 등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벌였다.
1928년 7월 18일 정식 신사(神社)로 승격한 후 일본의 국경일이나 2차 대전 선전포고일 등 각종 기념일마다 학생과 시민들을 신사에 동원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광복 후 김천신사의 모든 건물과 구조물은 철거되고 현재는 석등 5기만이 남아있다.
김천신사는 일제 감점기에 우리 조상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감내하여 내선일체를 강요받았던 아픔의 상징인 것이다.
과하천 일대의 지게동으로 부터 평화동으로 넘어가는 노실고개는 늙은 쥐가 밭을 향해 내려가는 형국이라 늙을노(老)자에 쥐서(鼠)자를 써서 노서(老鼠)고개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노실고개로 불리게 된 것이다.
↑↑ 노실고개
ⓒ 김천신문

이러한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지세는 산전수전을 겪은 노련하고 부지런한 쥐가 풍요한 먹이가 있는 밭으로 간다는 의미로 해석해 이 터에 사는 사람들은 부자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예로부터 고성산의 형세가 쥐를 닮았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고성산이 쥐의 몸통이며 머리와 입은 중앙초등학교를 지나 교육청으로 이어진 능선이고 왼쪽 앞발은 시립도서관, 오른쪽 앞발은 학사대와 남산공원으로 본다. 어떤 이들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이같은 명당의 맥을 끊기 위해 개운사와 남산공원 사이의 고개를 파내고 도로를 냄으로써 쥐의 오른팔을 잘랐다고 믿고 있다.
    
⭍평화남산동의 산
    
고성산
↑↑ 고성산 정상의 고성정
ⓒ 김천신문

고성산(高城山)은 백두대간 황악산으로부터 신선봉, 덕대산으로 이어진 지맥으로 김천시내 중앙에 위치한 해발 482.7m의 도심 산으로 양천동과 남산동, 황금동, 부곡동에 걸쳐 있다. 고성(高城)이라는 산 이름은 산 정상부에 큰 성이 있음으로 해서 붙은 것으로 보이는데 달리 시어머니고(姑)자를 써서 고성산(姑城山) 또는 할미산(姑山)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고성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할미바위 전설과 무관하지 않다. 할미바위는 신부 즉 여성으로, 맞은편 모암산 사모바위는 신랑 또는 남성으로 상징돼 독특한 사모바위, 할미바위 전설이 전해져왔다. 또 임신한 여성이 할미바위 아래에서 돌을 던져 바위 위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는 등 할미바위는 오랫동안 고성산의 상징이 돼온 관계로 자연스럽게 시어머니, 할머니 등 여성과 관계된 지명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 산 정상에 옛날 봉수대가 있었다 해서 봉화산으로도 불렸다.
고성산은 1682년 간행된 지도 ‘동여비고(東與備攷)’의 경상도편에 ‘高城山’으로 등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1718년 여이명(呂以鳴)의 ‘금릉승람’ 고성(古城)고증 편에 “성터가 고성산(高城山)에 있다. 남쪽은 지례의 구성에 접하고 서쪽은 황간의 눌이령에 접하고 북쪽은 상주의 회룡산에 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1937년 간행된 ‘교남지(嶠南誌)’ 산천편에는 “고성산(高城山)은 군 남쪽 9리에 있고 병점산으로부터 내려왔다. 1910년부터 37년 사이에 김병연이 발간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산천편에는 “고성산(姑城山)은 군의 남쪽 5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성산은 풍수지리로 볼 때 늙은 쥐의 형국으로 알려지는데 지금의 노실고개로 불리는 주택가 일대가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온다는 노서하전(老鼠下田)의 명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쥐는 민속적으로 볼 때 12지신의 하나로 영특하고 근면과 다산, 부귀의 상징으로 그려지며 늙은 쥐가 곡식이 있는 밭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부자가 된다는 의미로 풀이돼 부자가 나올 터로 유명했다.
    
⭍문화유산
    
과하천
↑↑ 과하천
ⓒ 김천신문

고성산의 남쪽 개운사와 노실고개 중간지점에 자리한 과하천(過夏泉)은 김천이라는 이 고장의 지명과 대표적인 명주 과하주(過夏酒)가 유래된 유서 깊은 샘이다.
1718년 간행된 ‘금릉승람(金陵勝覽)’에서 저자인 여이명(呂以鳴)은 과하천과 과하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古有生金之泉故名焉取基泉之水而釀酒則味極香例故亦曰酒泉然居基土者畏基有徵金之役而埋基泉故金不知基處云耳但金泉過夏酒與驪山湖山春搏名於一國他里人學其方於金陵之人而其味皆不如本土之酒比果水之有別於他處耶凡物各有所宜之地自古言美酒必稱蘭陵新豊理或然也戊申年察訪裵公幼華氏與方伯沈公梓相和詩稱其東邊小山曰酒香山”
“옛날에 금(金)이 나는 샘(泉)이 있어 김천(金泉)이라 했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향기로웠기 때문에 주천(酒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금을 캐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을 묻어버려 지금은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김천의 과하주는 여산(礪山)의 호산춘(湖山春)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 있는 술이 됐는데 타지사람들이 금릉사람에게 술 빚는 방법을 배워가지만 그 맛은 본토의 술만 같지 못하니 이것은 물이 타지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특산품이란 각기 자연환경과 연관돼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말하기를 아름다운 술은 중국의 난릉(蘭陵)과 신풍(新豊)의 것을 칭송하니 이치가 그럴 법도 하다. 무신년에 김천찰방 배유화(裵幼華)와 방백 심재(沈榟)가 지은 시에 샘 동편의 작은 산을 일컬어 주향산(酒香山)이라 했다.”
이 기록을 통해볼 때 과하천은 금을 캐던 금광이었고 이곳에 고인물이 달아 샘으로 이용하며 금천이라 불렀고 이 샘물로 빚은 술이 과하주로 과하천의 독특한 물이 과하주라는 명주를 탄생시킨 배경이 됐다고 보고 있다.
고려시대 초 역참제도의 정비로 이 지방에 역이 처음 설치되면서 역명(驛名)을 정할 때 이 샘의 이름을 따서 김천역(金泉驛)이라 한 것만으로도 미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김천(金泉)이란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51년 간행된 고려사(高麗史)에 역의 지명으로서 나타나는데 김천역은 지금의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위쪽의 찰방골로 불리는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과하천은 김천역과 지척의 거리에 있다. 과하천은 1990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는데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음용수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샘 안쪽 벽면에는 ‘金陵酒泉 光緖 8년’이라 새겨진 금석문이 있는데 1882년에 새긴 것으로 과하천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정심사
↑↑ 정심사
ⓒ 김천신문

고성산 남쪽 과하천 위쪽에 자리한 정심사(淨心寺)는 남산동 노실고개 인근에 살던 김해옥 보살이 전쟁으로 부모, 형제를 모두 잃은 후 가족의 명복을 빌기 위해 1945년 건립했다. 초기에는 작은 규모의 삼성각을 건립해 기도를 드려왔는데 1965년 일대 임야를 매입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김해옥 보살은 1967년 통도사 경봉노사(鏡峰老師)로 부터 수계를 받아 법명을 명조(明照)라 하고 1975년 7월 관음전을 신축했다.
관음전에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십일면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정심사는 호랑이절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삼성각 옆에 옛날 고성산 호랑이가 살았다는 높이 2m, 깊이 3.5m정도의 호랑이굴이 있음으로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고성산 호랑이는 1950년 대 말까지도 이 굴 인근에서 종종 목격됐다고 전해진다. 김해옥 보살이 정심사를 처음 창건할 무렵 인근 마을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는데 이를 모면해 볼 요량으로 아이들이 몰려오면 일부러 호랑이소리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김천도찰방역장선정비
↑↑ 찰방역장 선정비
ⓒ 김천신문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비석으로 김천도찰방을 역임한 역대 찰방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찰방선정비는 통상 찰방이 이임 또는 퇴직한 직후 건립됐는데 역모에 연루됐거나 비리에 연루돼 파직을 당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찰방에게 관례적으로 선정비를 세워준 것으로 보인다. 김천도찰방선정비의 경우에 김천도역지를 근거로 볼 때 역 입구 노상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4기만이 남아있다.
신류(申留)는 병술년 문과에 급제한 아주신씨(鵝洲申氏)로 1649년 2월에 부임하고 1650년 6월에 퇴임해 고향 의성으로 낙향하게 되자 역리들이 중심이 돼 선정비를 건립했다.
이극태(李克泰)는 신묘년 문과에 등과한 완산이씨(完山李氏)로 1653년 1월에 부임해 1655년 6월 승진, 이임하게 되자 건립했다.
이정억(李楨億)은 임오년 문과에 급제한 한산이씨로 1702년 11월에 부임하고 1705년 1월에 퇴임해 고향 보령으로 낙향하게 되자 역리들이 건립했다.
이현장(李顯章)은 계축년 문과에 등과한 완산이씨로 1716년 3월에 부임하고 1718년 5월에 퇴임해 서울로 돌아가자 역리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찰방선정비의 존재는 교통의 요지로서 김천이 가지고 있는 역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김천역은 도로와 시장 발달의 동력으로 작용해 역촌(驛村)의 형성과 문물의 집산을 촉진시켜 김천장을 전국 최대 규모의 시장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평화남산동의 자랑
    
남산공원
↑↑ 남산루
ⓒ 김천신문

고성산의 한 줄기로서 시민들의 오랜 휴식처가 돼온 남산공원은 원래 야산에 지나지 않았다. 특별한 지명도 없이 내려온 야산이 남산(南山)이라고 불리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1916년 일본인들에 의해 신사(神社)가 세워진 이후부터이다.
일제에 의한 성역화사업 속에 돌계단이 만들어지고 벚나무가 심어지면서 아픈 역사를 간직한 김천 최초의 공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광복과 동시에 성난 시민들에 의해 신사는 해체되고 일본인들이 신을 봉안했었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도심 속에 위치한 접근성을 장점으로 서서히 김천시민들의 도심공원으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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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시립도서관이 건립되고 편강열 순국기념비와 여중용 순충기념비, 정완영, 배병창 등 문인들의 시비(詩碑)가 하나 둘 세워지더니 1984년 한 출향인의 성금으로 남산루가 세워졌으며 2013년에는 옛 도서관이 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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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은 설음을 곱씹으며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치욕의 터전이 김천의 문화와 예술을 살찌우는 휴식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평화남산동의 장터
    
평화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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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김천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황금시장이라면 근대 김천장의 명성은 평화시장이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화시장의 근원은 1950년 6·25전쟁의 와중에 경부선 철도를 따라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당시 김천역 앞에 천막을 치고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한데서 찾을 수 있다.
편리한 교통에 힘입어 평화시장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데 1978년 평화전통시장으로 정식 개설돼 현재 149개의 점포에 하루 3천여명, 연간 22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지역 대표시장으로 발돋움했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시장 현대화사업을 통해 주차장을 조성하고 비가림 시설을 설치했으며 상인 교육장을 신축해 대형할인마트의 공세를 넘어 인정이 있는 전통시장의 매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평화시장이 중소기업청으로부터 2015 골목형시장 육성사업에 선정된 것도 이 지역 상인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내년 6월까지 레시피 개발, 요리경진대회, 야시장 운영, 조명 개선, 상점 간판 교체 등의 사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52억원(국비 26억, 도비 7,800억, 시비 1억8,200)의 예산을 확보한 것이다. 

□평화남산동의 맛집
    
3대째 가업 잇는 대성암본가 초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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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동 299-16번지에 위치한 대성암본가 초밥집은 1920년 개업됐으니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초밥집이다. 해병대 출신의 정홍영(72세) 어르신이 아들 정창호(41세)씨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줘 3대째 가업을 잇는 전통 있는 초밥집이다.
김천역 앞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 김천세무서 부근의 규모는 작지만 늘 손님들이 북적이는 이곳 초밥집의 주 메뉴는 초밥과 우동, 오뎅탕이다.
이곳의 초밥은 식초와 소금만 넣어 양념하던 방식에서 그 옛날 식당에 고급 식재료 중 설탕을 아끼면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넣기 시작해 샤리(초밥용 밥)를 만드는 고급 기술 중 하나로 만들어진다. 초밥도 옛날 방식의 레시피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한결같은 밥맛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우동육수는 인공 조미료가 아닌 옛날 방식 그대로 오랜 시간 멸치를 우려내 정성을 다해 만들었기에 맛을 보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를 알 수 있다.
초밥은 6천원부터 1만원까지, 모듬초밥도 1만 5천원으로 저렴한데다 오랜 전통의 맛으로 이미 전국 각지에서 손님이 찾아들고 일본에서까지 맛보러 올 정도라고 한다. 초밥도 맛나지만 오뎅탕의 맛은 따끈한 술을 부르는 맛이다.
대성암본가 초밥집(전화 434-7257)에 대한 평가는 이미 중앙일보 ‘맛·멋집’소개를 비롯해서 조선일보 ‘맛집’·‘경북명물 명물오뎅탕’, 경상북도 ‘경북의 5미(味)’ 등 언론에 여러 차례 맛집으로 소개된 바 있다. 또한 SBS ‘윤동혁 PD 초밥이야기’,  KBS ‘VJ특공대’ 등에 출연해 소개된바 있는 명실상부한 김천의 대표 맛집이다.
    
소고기전문 송이전골 제주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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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동 245-183번지에 위치한 제주가든. 35년 전 식당업을 시작해 옛 형무소 초소자리인 현 위치에 건물을 지어 경영한지 15년에 이르는 김종기(63세)-허옥분(62세) 부부가 경영하는 제주가든에 가면 신토불이 식재료만을 사용한 음식 맛 못지않은 주인 부부의 후한 인심에 최상의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제주가든 모범업소에서는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는 산채를 직접 채취하고 최고 보약인 송이, 능이, 잡버섯과 어울리는 송이전골, 맛과 향이 가득한 음식으로 손님을 초대합니다.”
실내 벽에 큰 글씨로 써 붙여놓은 제주가든 소개 글이다.
“맛있게 먹었다는 말은 손님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지만 이 말을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끼고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풀립니다.”     
제주가든의 주메뉴는 송이전골과 샤브샤브. 소고기도 한우고기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적당히 구워 고소한 참기름에 찍어 야채와 함께 먹으면 그야말로 입에 살살 녹는다.
제주가든에서 사용하는 식재료는 대항면 운수리 농장에서 직접 농사지은 것이다. 배추, 상추를 비롯한 고추, 마늘, 파 등 농장에서 생산한 것이어서 신선하고 푸짐하다. 표고버섯 역시 재배한 것이고 나머지 버섯도 산에서 직접 채취한 것이어서 맛이 특별하다.
제주가든(전화 433-8625)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품질인증을 받은 한우고기만을 사용하는데다 김천시로부터 한우전문음식점 인증서를 받은 좋은 음식점이다.
    
□평화남산동의 학교
    
성의여자고등학교
평화동 406-6번지에 위치한 성의여자고등학교는 1901년 8월 김성학(아릭스) 신부에 의해 사립 성의학교(남자부)로 설립돼 1947년 4월 1일 성의학원으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1911년 2월 2일 여자부가 설치됐다. 1949년 3월 10일 성의여자초급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0년 1월 31일 성의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됨과 아울러 남자부와 여자부 병설교로 인가를 받았다. 1952년 3월 14일 성의상업고등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1970년 3월 1일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개교되면서 여자부가 분리됐다.
성의여자고등학교는 1979년 9월 4일 성의여자종합고등학교로, 2001년 3월 1일 오늘의 성의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이때 일반계 고등학교로 전환됐다. 2015년 현재 제61회에 걸쳐 1만6천174명의 졸업생이 배출된 성의여자고등학교는 1955년 1월 1일 김수환 신부가 교장으로 취임한 것과 2002년 9월 26일 성의창립 101주년 기념행사를 치른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성의여자중학교
성의여자고등학교와 같은 곳에 위치한 성의여자중학교는 설립, 변천과정 등이 성의여자고등학교와 같다.
1969년 10월 14일 성의여자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70년 3월 1일 개교됐으며 2015년 현재 제65회에 걸쳐 1만5천278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초등학교
남산동 3-12번지에 위치한 김천초등학교는 1907년 10월 12일 사립 광흥학교로 설립돼 1911년 5월에 금산공립보통학교로, 1914년 12월 김천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22년 6월 부설 명륜국민학교가 설립되고 1937년 4월 김천남산정 공립 심상소학교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1945년 4월 김천동부국민학교로, 1949년 4월 김천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50년 8월 6·25전쟁으로 전 건물이 소실됐다가 군사 원조로 복구됐다.
1996년 3월 1일 김천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09년 10월 12일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는 ‘김천초 100주년’ 기념책자도 발간, 배포됐다.
이와 같이 김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김천초등학교는 2015년 현재 104회에 걸쳐 2만4천71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중앙초등학교
남산동 52번지에 위치한 김천중앙초등학교는 1907년 3월 일본인에 의해 김천심상소학교로 개교돼 1945년 10월 31일 김천공립국민학교로, 1946년 1월 12일 김천남부공립국민학교로, 1948년 4월 20일 김천중앙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1996년 3월 1일 김천중앙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70회에 걸쳐 1만5천459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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