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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19> 대신동(大新洞)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10.21 08:48 수정 2015.12.07 08:48

신라 이래 천년을 이어온 김산군 관아가 있던 읍치
지역발전 이끄는 행정, 교육, 체육, 산업의 중심

↑↑ 개발 전 1980년대 말 현 김천시청 일대
ⓒ 김천신문

대신동(大新洞)은 교동과 삼락동, 문당동, 신음동, 대광동, 응명동을 아우르는 큰 면적에 김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동이다. 특히 교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의 관아가 있던 읍치(邑治)의 역할을 했다. 이 고장 사회, 문화, 교육의 중심 역할을 했던 김산향교와 절경을 자랑하는 연화지, 봉황대가 있어 더욱 유서 깊은 지역이다.
배천과 문산마을은 영남사림의 지도자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서당을 개설해 후학을 양성한 인재배출의 요람지이기도 하다.
신음동 부거리와 금음마을도 청룡바위와 거문고 바위에 관련된 흥미 있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1995년 김천시와 금릉군의 통합으로 신청사가 신음동 달봉산 자락에 들어서면서 통합 김천시 신음동시대가 열린 후 행정중심으로 자리매김한 동. 삼락동에 종합운동장을 비롯한 세계적인 규모와 시설을 갖춘 체육시설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김천스포츠타운을 형성했고 또 김천대학교와 경북보건대학교 등 대학이 들어서면서 지역 체육과 교육을 선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광동을 중심으로 김천공단과 산업단지가 중점적으로 조성되는 등 대신동은 김천의 행정, 교육, 체육, 산업의 중심지로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동이다.
    
□마을과 전설
    
옛 김산군의 읍치였던 교동
↑↑ 교동연화지
ⓒ 김천신문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金山郡)의 관아가 위치했던 교동(校洞)은 오랜 읍치(邑治)이자 문화의 중심이었다. 김산(金山)이라는 지명은 김천(金泉), 금릉(金陵)과 마찬가지로 이 고장이 금(金)산지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데 원래 금산(金山)이라 했다가 병자호란(1636년) 이후 이곳 선비들이 청나라가 금(金)나라의 후예라 해서 금산을 김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진다.
1914년 이 일대의 마을을 삼락동과 문당동, 교동으로 나눠 금릉면으로 개편했다가 1931년 금릉면이 김천읍에 편입되고 1983년 삼락동, 문당동, 교동을 합해 금산동(金山洞)이라 했다.
김산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교동(校洞)이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동쪽으로 부춘산(달봉산)을 경계로 시청이 있는 신음동과 접해 있고 서쪽은 구화산에서 발원한 소하천(지금은 복개가 됨)을 경계로 삼락동과 마주하고 있다.
교동은 조선시대에 김산군 군내면으로 속해 향교가 있는 일대를 일컫는 교리(校里)와 관아와 향청이 있던 향리(鄕里)로 나눠 불렸다.
또 김산골, 동부, 서부, 구읍으로도 불렸는데 김산골은 옛날 김산군의 읍이 이곳에 있었음으로 해서 붙은 지명이며 동부와 서부는 마을의 중심을 관류하는 소하천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의 마을을 각각 일컬음이다. 구읍은 이 지방의 중심이 1905년 경부선개통과 함께 평화동, 남산동 일대로 이동하면서 ‘예전의 읍(邑)’이라는 뜻으로 구읍(舊邑)이라 했다.
1996년 교동택지개발사업과정에서 발견된 김산군 관아지와 객사지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 과정을 통해 읍치에 대한 규모가 나타나 학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김산군의 행정조직은 종4품의 군수 1인과 별감 2인, 군졸 53인이 있었고 1482년(성종13년) 건립된 관아와 객사, 향사당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교동의 중심에는 조선시대 김천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던 국립 교육기관인 김산향교와 내빈을 접대하던 봉황대가 남아있다.
    
교육과 체육의 요람으로 변모한 삼락동
구화산에서 발원한 소하천을 경계로 교동과 나눠진 삼락동(三樂洞)은 교동과 함께 구읍으로 불리며 김산군의 읍치로서 조선시대까지 지역의 행정, 문화의 중심을 이뤘다.
삼락동은 고려 말 승선(承宣)벼슬을 지내던 수원백씨 백귀선(白貴璇)이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 금릉부원군에 피봉된 조부의 봉군지인 삼락동으로 낙향한 이래 대대로 수원백씨 금릉부원군파의 집성촌을 형성해왔다.
조선시대 김산군 군내면에 속해 구화산 입구의 상리, 동헌이 있던 중리, 연화지 인근의 하리 등 세 마을로 이뤄졌다. 1914년 인근의 금평(거문들)까지 통합해 삼락동으로 고쳤으며 1960년 상리, 중리, 하리를 삼락1동, 금평을 삼락2동으로 분동하고 1983년 문당동과 합해 금산동으로 했다가 1998년 대신동에 통합됐다.
삼락(三樂)이라는 지명은 옛날 마을의 선비들이 맹자(孟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에서 나온 말이다. 즉, 부모와 형제가 무탈하고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뛰어난 인재를 얻어 교육시킨다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이루고자 하는 뜻을 담아 삼락동(三樂洞)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마을 뒷산에 해당하는 구화산의 형세가 좌청룡, 우백호를 이뤄 마을을 감싸고 전면이 열린 전형적인 노서하전(老鼠下田)형으로 늙은 쥐가 밭을 향해 내려와 부자가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구화산에는 고산사의 암자 중의 하나인 벽루암이었다가 고산사가 김산향교에 터를 빼앗긴 후 창건한 구화사(九華寺)가 있다.
구읍의 삼락1동은 옛날 관아가 있던 앗골과 뒷내골, 감옥이 있던 옥골로 나눠져 있었는데 이들 마을이 점차 발전해 상리, 중리, 하리가 됐다.
1996년 택지조성 과정에서 웅장했던 옛 관아의 위용이 드러났는데 그때 발굴된 많은 유물과 건축 부재들이 김천역사의 타임캡슐이 돼 소공원 한쪽에 묻혀 있다.
삼락1동과 2동 사이인 지금의 종합스포츠타운 일대에는 떠돌아다니는 혼령에게 수령이 제관이 돼 제를 지내는 여제단(祭壇)과 토지의 안전을 관장한다는 토신(土神)과 풍흉을 관장한다는 곡신(穀神)에게 봄, 가을로 제사를 올렸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다.
여제단에는 아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무자(無子)요”하면서 세 번 절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 그 옆에는 애씨굴로 불린 언덕배기가 있었는데 옛날 돌림병으로 목숨을 잃은 시신을 묻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종합스포츠타운과 김천대학 너머에 있는 삼락2동 거문들은 임진왜란 때 피난 온 남경양씨와 장수황씨가 정착해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의 형상이 거문고와 비슷하게 생겼고 마을 앞으로 들이 넓어 거문고금(琴)자에 평평할평(坪)자를 써서 금평(琴坪)이라 적고 거문고들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거문들로 변했다.
↑↑ 거문들
ⓒ 김천신문

김종직선생의 문학혼이 서린 문당동
삼락동 종합스포츠타운 뒤편으로 자리 잡은 문산, 배천 두 마을과 그 안쪽 당골 등 세 마을이 문당동(文唐洞)에 속해있다.
세 마을은 조선시대 군내면에 속했었는데 1914년 통합되면서 문산(文山)의 문(文)자와 당골(唐谷)의 당(唐)자를 따서 문당동(文唐洞)이 됐고 1931년 김천읍으로 편입됐다가 1983년 금산동, 1998년 대신동이 됐다.
문산마을은 조선시대에 역(驛)이 설치됨에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신역(新驛)으로 처음 등장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문산역(文山驛)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문산역은 통상 30리마다 역이 설치되는 관례를 깨고 김천역으로부터 불과 8리에 불과함에도 역이 설치됐다. 이를 두고 영남사림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1482년 관직에서 물러나 인근 배천마을에 낙향해 있을 때 전국의 제자들이 몰려들어 김천역에서 이를 다 수용할 수 없음으로 부득이 이 마을에 간이역을 설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1738년 간행된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에 보면 문산역에는 역리 63인, 역비 68인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1800년대 말 역참제도가 소멸되면서 문산역에 종사하던 역리들이 정착해 마을을 형성해 오늘의 문산마을로 발전했다.
당시 문산역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으나 역마(驛馬)의 안전을 기원했다는 말을 위한 당집 즉 마당(馬堂)으로 오르는 길을 뜻하는 ‘배천마당길’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 배천마을
ⓒ 김천신문

이웃하고 있는 배천마을은 김종직이 퇴임한 후 처갓집이 있는 봉계와 가까운 이 마을에 은거해 살면서 경렴당(景濂堂)이란 서당을 개설함으로 해서 당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마을이다.
배천이라는 지명은 마을 가운데에 큰 배나무가 있고 마을 앞에 냇가가 있어 배나무이(梨)자에 내천(川)자를 써서 이천(梨川)이라 적고 배천이라 불렀다.
문산마을에서 마붓들을 지나 구봉산 아래에 자리 잡은 당골마을은 원래 마씨(馬氏) 일가들이 살았었다고 하는데 이천서씨(利川徐氏) 서국보(徐國輔)가 임진왜란 때 충청도 청산에서 피난을 와 정착한 이래 대대로 이천서씨 집성촌을 이뤘다.
또 해주오씨 오노집(吳老集)이 병자호란 때 피난을 와서 정착하고 천주교 신자였던 청주한씨 한응세(韓應世)가 1800년대 천주교 탄압을 피해 이 마을로 들어와 일가를 형성하며 대대로 살았다.
일설에 당골마을 위쪽의 어모면으로 넘어가는 웃무터재 방향으로 공덕동이라는 또 다른 마을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그 내력을 알 길이 없다.
    
김천시의 행정중심지로 부상한 신음동
신음동(新音洞)은 김천시내로부터 직지천을 건너 북쪽으로 달봉산(일명 부춘산)과 직지천변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상주통로를 따라 부거리(富巨里), 금음리(琴音里), 새터(新基)가 김산군 군내면으로 속했고 선산방면으로 주막촌인 소꾸미가 있었다. 1914년 네 마을을 통합할 때 신기의 신(新)자와 금음의 음(音)자를 따서 신음동(新音洞)이라 했다.
1931년 김천읍 신음동이 1960년 신음1·2동으로 분동됐다가 1983년 다시 통합되고 1998년 현재의 대신동 관할이 됐다. 1950년대 이후 천변마을, 삼애원, 양계센터, 우시장이 들어서고 1990년대 김천시청과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 부거리마을
ⓒ 김천신문

신음동과 교동을 달봉산 아래로 이어주는 도로변에 자리 잡은 부거리는 조선시대에 이웃한 금음리, 새터와 함께 김산군 군내면으로 속했다.
부거리라는 마을의 지명은 옛날 함안조씨와 풍산류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 때 큰 부자가 많아 부자부(富)자에 클거(巨)자를 써서 부거리(富巨里)라 했는데 1930년대 들면서 마을이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달봉산은 청룡이 조각공원 방면으로 꼬리를 드리우고 교동방향으로 웅크리고 있는 형상인데 1924년 경북선철도를 내면서 철로가 청룡꼬리에 해당하는 마을 앞 청룡바위 일대를 잘라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마을부자들이 망해 타지로 떠나기 시작하더니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마을 앞을 높다랗게 가로지르면서 달봉산을 배후로 직지천의 아름다운 절경과 천변의 드넓은 농경지를 보유했던 부거리가 쇠락과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일부 남아있던 청룡바위는 2010년 도로 확장공사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앞 고속도로 터널 밑에는 마을유래비와 마을주민 강문수씨가 지은 마을노래비가 섰는데 옛 영화를 되찾으려는 주민들의 의지와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씨를 읽을 수 있다.
부거리로 부터 북쪽으로 자리 잡은 금음마을은 임진왜란 때 함안조씨가 피난을 와서 형성한 마을이다. 일제시대 초까지 김천에서 상주로 가는 도로는 지금의 경북선철교 옆 다리를 건너 부거리와 금음마을을 경유해 어모로 가는 길이었다. 이로 인해 금음은 큰 도로변에 있었던 마을로 부거리와 함께 대표적인 부촌으로 알려지고 있다.
↑↑ 부채바위
ⓒ 김천신문

금음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여인이 거문고를 안고 있는 형상에서 나온 것. 실제 마을 뒤 달봉산 중턱에 거문고 형상을 한 큰 바위가 있음으로 해서 유래됐다. 마을입구의 부채를 펼쳐놓은 듯한 부채바위가 바람을 일으키면 달봉산 거문고바위가 거문고 소리를 낸다고 거문고금(琴)자에 소리음(音)자를 써서 금음(琴音)이라 했다.
원래 마을입구에 있었던 부채바위는 주택이 신축되면서 지금은 마을중앙에 위치한 형국이 됐다. 부채바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금음이 큰 도로변에 위치해있고 부자가 많이 살다보니 도적떼가 자주 출몰해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주민들이 마을을 찾은 고승을 후하게 접대하고 도둑떼를 막을 방도를 물었다. 스님은 마을 앞 부채바위를 깨트려 땅 속에 묻어버리라 했고 시키는 대로 바위를 땅에 묻었더니 이때부터 마을이 쇠락해지더니 더 이상 도적떼가 들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부자가 없는 가난한 마을에 도적이 찾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1979년 도로공사를 하면서 땅 속에 묻혀있던 부채바위 일부가 발견돼 원래자리에 다시 세우고 마을의 번영을 염원하며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인근의 시청 앞 새터마을은 금음마을이 쇠락하면서  이주해 새로 형성한 마을이라 새터(新基), 금신(琴新)이라 했다.
↑↑ 소꾸미마을
ⓒ 김천신문

소꾸미는 조선시대에 김산군 군내면으로 속한 선산방면 길섶의 주막촌으로 말이나 소의 먹이를 생산해 역에 공급하던 작은 마을이었다. 1914년 금릉군 신음동으로 속한 이래 1988년 신음동, 1998년 대신동 관할이 됐다.
소꾸미라는 지명은 응봉산에서 흘러내린 마을 뒷산이 누워 있는 소의 형상인 와우형(臥牛形)이고 마을 위치가 그 소의 꼬리에 해당한다 해서 소꼬리, 우미(牛尾) 등으로 불리다가 음이 변해 소꾸미가 됐다.
원래 선산으로 향하는 지방도가 소꾸미 마을중앙으로 지났는데 1970년대 초 지금과 같이 감천변으로 도로가 나면서 도로변의 하천을 매립해 주택이 들어서 제법 규모 있는 마을로 변모했다.
    
매가 울며 날아올랐다는 명당지 응명동
응명동(鷹鳴洞)은 응봉산자락의 매목마을로부터 느티골, 독정, 아홉사리 등 여러 마을이 흩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천상면에 속했고 1914년 이들 마을을 통합해 신설된 아천면 관할이 됐다. 1928년 어모면 관할로 이속됐다가 1983년 대광동과 통합해 김천시 대응동, 1998년 대신동으로 속했다. 1980년대 마을 앞에 김천공단이 조성되면서 마을이 형세가 크게 변모했다.
소꾸미와 삼애원을 지나 응봉산 아래 자리 잡은 매목마을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천상면에 속해 밀양박씨와 진주하씨가 집성을 이뤘던 마을이다.
↑↑ 매목마을
ⓒ 김천신문

매목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매의 형상을 하고 있고 마을이 자리 잡은 위치가 매의 목에 해당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매가 울면서 힘차게 비상하려는 형세라 매응(鷹)자에 울명(鳴)자를 써서 응명(鷹鳴)이라고도 했다. 이 마을에는 매봉산(응봉산), 매목, 응명 등 매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예전에 소꾸미를 거쳐 마을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이었던 속칭 고개만대이를 넘나드는 번거러움이 있었음에도 주민들은 매의 목에 해당한다는 언덕을 파헤치는 것을 금기시해왔다고 한다.
그러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 와중에 길을 새로 내면서 고개가 5m 이상 낮아져 새 길이 나고 말았다. 고개를 파내어 새 길을 낸 후 매의 목을 잘라낸 격이라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 느티골
ⓒ 김천신문

매목, 독정, 아홉사리와 함께 조선시대에 김산군 천상면으로 속했던 느티골은 조선후기 성산이씨  한 선비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예전 마을입구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느티나무골, 느티골로 불렸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홰나무괴(槐)자를 써서 괴동(槐洞)이라 했다.
독정은 김천공단 뒤편의 광덕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로 순흥안씨가 정착해 형성된 마을이다. 인근 대보마을과 함께 물이 귀해 주민들이 고통을 겪었는데 지나가던 한 스님이 이 같은 사정을 듣고 가리킨 곳을 팠더니 많은 물이 나는 샘을 얻었다. 독정이라는 지명은 마을을 살린 귀한 우물을 잘 관리하자는 뜻으로 살필독(督)자에 우물정(井)자를 써서 독정(督井)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의 유일한 우물로 마을입구에 있었던 우물은 마을회관을 지으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는데 당시 마을어른들이 귀한 우물을 매립해서는 안 된다고 회관건물 내부에 돌을 덮어 내부는 묻히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상주방면 국도변에 위치한 아홉사리는 부춘산으로부터 아홉 번째 골짜기에 마을이 들어서 아홉사리란 지명을 얻었다.
    
김천산업의 요람지로 변모한 대광동
대광동(大光洞)은 광덕산을 중심으로 동쪽과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조선시대에 대보(大洑), 묘광(妙光), 신곡 세 마을로 이뤄져 개령현 서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보의 대(大)자와 묘광의 광(光)자를 따서 대광동이라고 고치고 개령면 관할이 됐다. 1983년 응명동과 통합돼 대응동이 되면서 김천시 관할이 됐다.
묘광과 함께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서면에 속했던 대보마을은 옛날 경주석씨(慶州昔氏) 일가가 정착해 형성한 마을이다. 지금은 공단이 조성된 앞들과 못밑들 일대의 드넓은 농경지를 바탕으로 석씨 집안에서 큰 부자가 나오고 부촌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대부분의 농경지가 공단으로 편입됐다.
대보라는 지명은 마을에 물이 귀해 큰 저수지를 두개 만들고 물을 끌어썼다고 큰대(大)자에 저수지를 뜻하는 보(洑)자를 써서 대보(大洑)라 했다.
광덕산을 경계로 대보마을로부터 안산을 넘어 자리한 묘광마을은 감문방면 도로변의 속골과 묘광저수지 일대의 못개, 안쪽 본마을인 묘광 등 세 마을로 이뤄져 있다.
속골마을은 6·25전쟁 이후 새로 형성된 마을이며 못개는 묘광못 일대에 있던 주막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막촌이다.
↑↑ 묘광마을
ⓒ 김천신문

묘광은 임진왜란 때 죽산전씨 익산교수파 전몽봉(全夢鳳)이 익산에서 피난을 와 정착한 이래 대대로 죽산전씨 익산공파 집성촌을 형성해 오고 있다.
마을 앞에 드넓게 전개된 연못 묘광지(妙光池)에 비친 달빛이 신비하리만큼 아름답다 해서 묘할묘(妙)자에 빛날광(光)자를 써서 묘광(妙光)이라 했다고 한다.
    
□대신동의 산
    
달봉산
김천시청의 배후로 자리 잡고 있는 달봉산은 신음동 주민들의 산책로이자 체력 단련장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해발 306m의 도심 속 야산으로 신음동과 교동, 삼락동에 걸쳐 있다.
달봉산이라는 이름은 옛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데 일설에 따르면 옛날 큰 물난리가 났을 때 이산의 꼭대기 일부만 잠기지 않았다고 꼭대기를 뜻하는 사투리인 따배이 말랭이라 불렸는데 언제부터인가 달봉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달봉이라는 이름은 정월대보름날 이 산에 올라 달집태우기를 하며 달맞이를 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달리 부춘산(富春山)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산의 남쪽 자락에 옛날 큰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는 부거리(富巨里)가 있음으로 해서 마을 주민들이 이 산의 정기를 받아 번성하기를 염원하며 성할부(富)자에 만물이 소생하는 의미를 가진 봄춘(春)자를 따서 부춘산이라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청룡산(靑龍山) 또는 당산(堂山)으로도 불렸다. 이 산이 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청룡꼬리라 불린 바위가 수년 전까지 부거리 입구 경북선철 로 옆에 남아있었다. 당산으로 불린 것은 이 산 정상에 옛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집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알려진다.  
달봉산은 난함산으로부터 문암봉과 오파산(삼거리봉), 구화산을 따라 이어졌다. 인근의 오파산(五波山)은 해발 328m로 지금은 삼거리봉으로 불리고 있으나 ‘조선환여승람’에는 “구화산(九華山)이라고도 하며 군의 동쪽 2리에 있다”라고 나타나 있다. 또 ‘금릉승람’에는 “군 동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라고 돼있다.
    
□대신동의 문화유산
    
김산향교
@IMG11@
조선시대 김산군의 청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국립학교였던 김산향교(金山鄕校)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30년에 발간된 ‘신중동국여지승람’에 “군의 남쪽 1리에 향교가 있다”고 기록돼 있는 점으로 미뤄 조선 중종 이전에 창건됐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전소됐다가 1634년(인조12년)에 진사 강설이 대성전과 명륜당을 재건하고 그의 아들 강여구가 동․서재와 대성전을 복원했다.
김산향교는 중설로서 50명의 학생을 수용했으며 공자를 비롯한 5성과 동방 18현을 모시고 있는 향교로 대성전, 명륜당, 동무,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돼 있다.
김산향교 터에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된 고산사(孤山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향교 터를 물색하던 관아에서 그 절을 허물고 김산향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1718년에 여이명(呂以鳴)이 쓴 ‘금릉지(金陵誌)’에는 당시 김산향교의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내가 어렸을 때 향교에 출입하면서 어른들이 인사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보고 과연 인륜이 밝음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조심하는 마음이 생겨 향교문을 드나들 때 의관을 바로하고 태만한 생각을 못했다. 전에는 동재, 서재에 유생들이 50~60명에 불과했는데 지금 와서는 100여명이 넘고 향사일에는 고성으로 떠들고 천한 사람이 귀인을 능멸하는 등 망칙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향교의 권위가 떨어지고 풍기가 문란해져가는 모습을 뜻있는 선비로서 안타깝게 그리고 있는 대목이다.
    
봉황대
@IMG12@
봉황대(鳳凰臺)는 연화지, 김산향교와 함께 교동이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의 읍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으로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5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봉황대는 사방 3간의 2층 다락으로 1700년 창건돼 읍취헌(邑翠軒)이라 불렀다. 원래 김산관아의 북쪽인 지금의 김천법원 자리에 있었는데 1838년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지금의 자리인 연화지 중앙으로 옮겼다.
연화지는 1707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군수를 지낸 윤택(尹澤)이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연못을 솔개연(鳶)자에 바뀔화(嘩)자를 써서 연화지(鳶嘩池)라 이름 지었고 그 날아간 봉황의 방향이 읍취헌 쪽인지라 다락이름도 읍취헌에서 봉황대로 고쳤다.
따라서 연화지는 솔개이고 봉황대는 날아오르는 봉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솔개가 봉황이 돼 날아오르는 군수 윤택의 꿈이 실현된 공간이다.
많은 시인묵객들의 시에 연화지와 봉황대가 등장하는데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때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은 봉황대에 올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금릉 아름다운 땅, 맑은 물결이 일렁이네/ 물속에 비단비늘이 가득하고 바람에 수양버들이 나부낀다/ 푸른 것은 3만개의 연잎이요 붉은 것은 열 길의 연꽃이네/ 좋은 경치를 감상함은 내 분수가 아니니 떠나는 수레 타고 이곳을 지난다.
    
낙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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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정(樂園亭)은 대광동 묘광저수지에 있는 정자로 묘광마을 출신인 죽산전씨 문중에서 1935년 건립했다.
묘광지로도 불리는 저수지는 조선시대 중엽 묘광마을에 정착해 집성촌을 형성한 죽산전씨문중에서 인근 전답에 관개할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축조했으나 현재는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신동의 자랑
    
강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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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공원은 직지천변에 축산농가들이 무단으로 가축을 사육하면서 오염이 극심했던 곳에 조성된 공원이다.
1999년 1년간의 공사 끝에 공연장과 분수대, 주차장 등으로 이뤄진 강변공원을 조성해 시민들이 가장 붐비는 자연 휴양지로 탈바꿈했다.
봄과 가을에는 소풍장소로, 여름에는 물놀이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여름 휴가철엔 자리를 차지하기가 힘들 정도로 붐비며 문화예술행사의 장으로도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직지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는 조각공원 앞을 지나 그린빌 앞까지 연결돼 있는 산책로로 시민들의 건강증진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코스모스꽃이 만발해 시민들의 정서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조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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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공원은 옛 우시장 부지에 조성된 김천지역 최초의 도심 소공원으로 2000년 개장해 지금까지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김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공원 내에는 18점의 조각작품과 3만여 그루의 조경수가 시민들을 반긴다. 이곳에는 관리소와 파고라, 정자 등 편의시설이 들어섰고 베드민턴과 족구장 등 체육시설도 설치돼 있어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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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동의 산업체
    
김천물류센터, 아모레퍼시픽의 핵심 물류 거점으로 탈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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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창립 70주년을 맞은 아모레퍼시픽은 아시아 미(美)의 정수를 세계에 전한다는 기업 소명인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Asian Beauty Creator)’의 실현을 위해 꾸준히 정진해 오고 있다. 이를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 물류 기술을 활용해서 전 세계 고객들에게 최상의 제품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 화장품 B2B, B2C 시장에서의 대응력을 강화하기 위해 현재 국내에서 경기도 오산, 경상북도 김천 등 2개의 화장품 물류 거점을 운영 중이다.
아모레퍼시픽 김천물류센터는 올해 7월 전체면적 4만796㎡(1만8천개의 팔레트를 보관할 수 있는 규모)의 물류 거점으로 새롭게 탈바꿈 했다. 김천물류센터에서는 그동안 충청, 호남, 영남 등 국내 수도권 이남 지역의 물류뿐만 아니라 ㈜아모레퍼시픽그룹 내 관계사인 에뛰드 제품의 국내 물류 및 해외 수출 과정 전체를 관장해왔다. 2016년부터는 에뛰드 뿐만 아니라 관계사인 이니스프리의 B2C 물류 대응까지 그 역할을 확대해나갈 예정이어서 김천물류센터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김천물류센터 작업장에는 그동안 아모레퍼시픽 물류에서 축적해온 노하우와 선진 물류 비즈니스 모델을 융합해 최초로 도입된 설비들도 자리 잡고 있다. 물류센터는 앞으로 급증할 주문량을 고려해 설계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작업 처리와 납기 준수를 통한 고객 서비스 향상, 효율적인 근무 시간 배분을 통한 근로자 만족도의 향상 등도 예상된다.
아모레퍼시픽 김천물류센터는 내부에 휴게실, 탁구장, 풋살장 등 최신식의 부대시설을 갖췄으며 앞으로도 임직원의 복지 증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나간다는 방침이다.
    
□대신동의 학교
    
김천대학교
삼락동 754번지에 위치한 김천대학교는 1978년 12월 28일 김천실업전문대학으로 설립 인가를 받아 1979년 3월 4일 개교됐다. 1982년 11월 29일 김천보건전문대학으로, 1989년 10월 31일 김천전문대학으로, 1998년 5월 1일 김천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2009년 7월 10일 4년제 대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2010년 3월 1일 학칙을 제정하고 제1회 입학식을 가졌다.
    
경북보건대학교
삼락동 480번지에 위치한 경북보건대학교는 1956년 2월 13일 김천간호고등기술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개교됐으며 1972년 12월 18일 김천간호전문학교로 승격됐다. 1976년 12월 22일 현 위치로 이전된 경북보건대학교는 1979년 3월 1일 김천간호전문대학으로 개편 인가를 받고 1993년 12월 20일 김산전문대학으로, 1998년 5월 1일 김천과학대학으로, 2012년 5월 8일 김천과학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된데 이어 2015년 5월 11일 경북보건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
교동 581번지에 위치한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는 1942년 5월 1일 김천공립상업학교로 개교돼 1944년 4월 1일 김천공립농업학교로 전환됐으며 1949년 4월 25일 김천농림중학교로, 1950년 4월 29일 김천농림고등학교로, 1995년 3월 1일 김천농공고등학교로, 2012년 3월 1일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66회에 걸쳐 1만4천773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예술고등학교
교동 527-1번지에 위치한 김천예술고등학교는 음악과 1학급 포함 총 3학급 규모로 1986년 3월 1일 개교된 특수목적고등학교로 2001년 3월 1일 조형예술과가 신설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27회에 걸쳐 2천13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한일여자고등학교
교동 527-1번지에 위치한 한일여자고등학교는 1972년 3월 1일 개교된 사립여자고등학교로 2015년 현재 제41회에 걸쳐 1만3천188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중앙중학교
삼락동 548번지에 위치한 김천중앙중학교는 1953년 5월 1일 금릉중학교로 개교돼 1978년 3월 1일 김천중앙중학교로 교명을 변경됐으며 1980년 6월 20일 현 주소지로 이전됐다. 2015년 현재 제60회에 걸쳐 1만4천648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한일여자중학교
교동 527번지에 위치한 한일여자중학교는 1970년 3월 1일 개교돼 오늘에 이른 사립여자중학교로 2015년 현재 제45회에 걸쳐 1만3천13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금릉초등학교
금산동 328번지에 위치한 금릉초등학교는 1926년 5월 25일 금릉공립보통학교로 개교돼 1996년 3월 1일 금릉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된 학교로 2015년 현재 제86회에 걸쳐 7천14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동신초등학교
신음동 1308번지에 위치한 김천동신초등학교는 2003년 3월 1일 개교된 학교로 김천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으며(병설유치원생 포함 991명) 2015년 현재 제13회에 걸쳐 2천226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신일초등학교
신음동 506-2번지에 위치한 김천신일초등학교는 1997년 3월 1일 김천신일초등학교로 개교돼 2002년 9월 1일 12학급이 김천동신초등학교로 분리됐으며 2015년 현재 제17회에 걸쳐 2천709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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