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특집 기획시리즈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20> 대곡동(大谷洞)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11.04 08:43 수정 2015.12.07 08:43

최송설당의 염원이 깃든 민족사학의 요람지
영남제일관문이 자리한 김천의 대문으로 우뚝

대곡동(大谷洞)은 크게 부곡동, 미곡동, 다수동으로 이뤄져 있다. 김천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부곡동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김천면에 속한 원골과 금릉면에 속한 부곡(가매실), 문지알, 고래실 등 네 마을로 나눠져 있었으나 1914년 이들 마을을 합해 부곡동(富谷洞)으로 고쳤고 1962년 1·2동으로 나눴다가 1983년 다시 합했다. 
조선시대에 김산군 미곡면으로 속했던 다수동은 성종 때의 문장가 전만령(全萬齡)이 은거하면서 성산전씨 집성촌을 형성했다. 높은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이 제수됐으나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해 고장의 위상을 높였다. 1998년 다수동, 백옥동, 부곡동이 대곡동으로 통합됐다.
대곡동은 추풍령으로부터 김천시내로 접어드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동으로 1975년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김천시민의 탑이 세워졌고 2001년에는 김천시 승격 50주년을 기념하는 영남제일문이 세워지는 등 우리 고장의 관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마을과 전설
↑↑ 금강사에서 바라본 가매실
ⓒ 김천신문

가마솥을 닮았다는 부곡동
부곡동(釜谷洞)은 가매실(釜谷), 원골(院洞), 문지알(聞知謁), 고래실 등 네 마을로 이뤄졌다. 부곡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가매실은 오늘날 시민탑삼거리에서 그랜드호텔까지의 고성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조선시대 초까지 굴곡부곡(屈谷部曲)으로 불린 마을이 있었다고 부곡동(部曲洞)이라 했다. 또 주변 산세가 가마솥을 닮아 가마실 또는 가매실이라 부르고 한자로 가마솥부(釜)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부곡(釜谷)이라 했다고도 한다.
1914년 주변 마을과 통합하면서 부자마을을 만들자는 뜻으로 가마부(釜)자 대신 부자부(富)자를 써서 부곡동(富谷洞)으로 고쳤다.
원골은 서부초등학교로부터 고성산 방향으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우측의 양지마와 좌측의 음지마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원골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조선시대 말까지 마을입구에 남원(南院)이라는 관용숙소가 있음으로 해서 원동(院洞) 또는 원골(院谷)이라고 한 것이다.
또 이 마을 중앙에는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1869~1943)을 제향하는 원계서원(遠溪書院)이 자리 잡고 있다.
송준필은 한말의 성리학자로 한일합방 후 고향인 성주에서 3·1운동을 펼쳤고 파리장서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일경의 눈을 피해 1923년 원동에 은거하며 원계서당을 개설해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하다 1943년 타계했다.
1986년 서원 내에 세운 숭덕사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이다.
문지알은 현 아주아트빌에서 주공아파트 사이의 마을로 옛날 고성산 봉수대에 봉화가 오르면 산 밑에 있는 이 마을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제일 먼저 알 수 있다 해서 들을문(聞)자에 알지(知), 아뢸알(謁)자를 써서 문지알(聞知謁)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 문지알
ⓒ 김천신문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문지알의 발음이 어렵다 해서 음이 비슷한 모지(毛之)라고 적는 바람에 모지동(毛之同)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래실은 김천고등학교와 주공아파트를 지나 철도 굴다리 직전에 좌측으로 고성산 끝자락인 파고산과 당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 금릉면으로 속했던 큰 마을로 고래실이라는 지명은 파고산에서 흘러내린 앞산이 고래의 등처럼 미끈하게 생겨 고래실이라 했다고 한다.
또 달리 파고산과 당산 사이에 자리한 마을의 지형이 아궁이에서 구들장으로 불이 올라가는 불구멍의 순우리말인 고래를 닮아 고래실이라 했다고도 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 앞산이 주공아파트와 굴다리를 지나 들판 앞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1905년 경부선철도를 부설하면서 앞산을 절개해 그 흙으로 주변 저지대의 철로를 복토하면서 잘랐다고 한다.
↑↑ 고래실
ⓒ 김천신문

    
두 노인의 전설이 전하는 다수동
1998년 부곡동과 함께 대곡동에 통합된 미곡동은 1983년 미곡동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1914년부터 금릉면 백옥동(白玉洞)과 다수동(多壽洞)으로 나눠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미곡면에 속해 옥산, 본리, 노증리, 구신기, 이로리 등 다섯 마을로 나눠졌다. 미곡동 관할에는 다수(多壽), 이로(二老), 노증(老增) 등 노인과 장수를 의미하는 지명이 다수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미곡(米谷)이라는 지명은 88세의 나이를 뜻하는 미수(米壽)에서 따왔다고도 하고 새실마을의 성산전씨 재실인 미곡정사(薇谷精舍)의 미곡에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신기, 바깥새실 등으로도 불리는 새실은 새터 즉 한자로 신기(新基)로 적으므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본디의 마을로부터 새로 분가해 형성된 마을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새실마을은 조선 성종 때 생원 전만령(全萬齡)이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령에서 미곡동 새실로 이거한 후부터 대대로 성산전씨 백파(伯派)집성촌을 형성해왔다. 전만령은 1506년 조정에서 지평 벼슬을 제수했으나 시 한 수를 지어 사양한 일화로 유명하다.
    
世事琴三尺 세상만사는 삼척 가야금에 부치고
生涯酒一杯 평생의 일은 한잔 술잔에 맡겼네
西亭江上月 서쪽의 정자는 강상의 아래요
東閣雪中梅 동쪽의 누각은 눈 속에 핀 매화꽃일세
    
평생을 미곡동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중종(中宗)은 여러 차례 공의 문장을 칭찬했고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묘갈문을 썼다. 마을 뒤에는 입향조인 전만령을 제향하는 미곡정사(微谷情舍)가 있다.
↑↑ 미곡정사
ⓒ 김천신문

영남제일문을 지나 좌측으로 덕대산 자락인 안산아래에 자리한 이로리는 임진왜란 때 다른 성씨를 가진 두 노인이 피난을 와서 마을을 이뤄 두이(二)자에 늙을로(老)자를 써서 이로리(二老里)라 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이로(伊老)로 쓰고 있다.
↑↑ 이로리
ⓒ 김천신문

    
예못 전설이 전하는 유서 깊은 백옥동
백옥동(白玉洞)은 내촌(안새실), 노증리(老增里), 옥산동이 속했는데 내촌으로부터 흘러내린 하천(복개천)으로부터 시내방향의 마을을 일컫는다.
새실로 통칭되는 일대 마을 중 가장 오래된 마을이며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해서 본리(本里) 또는 내촌(內村)으로 불리는 안새실은 성주골 입구에 자리 잡은 큰 마을로 마을중앙의 고목 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 내촌마을 홰나무
ⓒ 김천신문

마을의 형성된 내력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옛날 예씨(芮氏)성을 가진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나라에 큰 죄를 지어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못을 팠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때의 못이 마을인근 철로변에 있는 예못(芮池)으로 지금은 음이 변해 애인지라고 불린다.
↑↑ 예못
ⓒ 김천신문

노증리(老增里)는 현 백옥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옛날 주민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염원이 지명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노(魯)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마을에 처음 들어 왔기 때문에 노증(魯曾)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노증리의 남쪽으로는 풍수지리상으로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산세를 이루고 있어 이름 붙여진 옥산(玉山) 아래에 옥산동으로 불린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옛 이야기로만 전할 따름이다.
    
□대곡동의 문화유산
    
원계서원
↑↑ 원계서원
ⓒ 김천신문

원계서원(遠溪書院)은 부곡동 143번지 원골마을에 있는 서원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성리학자인 공산(空山) 송준필(宋浚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송준필은 파리장서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3년 김천으로 이거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원호재(遠乎齋)’라 이름하고 문 앞에 ‘황학동천백운산방(黃鶴洞天白雲山房)’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42년 원계정사(遠溪精舍)를 세웠는데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들어 4칸을 증축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 제자들과 유림에서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원설립을 추진하면서 원계정사를 해체해 현재의 서원 강당자리로 옮기고 정학당(正學堂)이라 이름 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옛 원계정사 터에 숭덕사(崇德祠)를 세웠고 1971년에 송준필의 위패를 봉안함과 동시에 동재인 제양당(制養堂), 서재인 일성재(日省齋)와 외삼문인 직방문(直方門)이 세워지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췄다.
제자들은 서원을 유지하기 위해 계(契)를 조직했는데 계원이 100여 명에 달하기도 했으나 1990년대 이후 와해되고 현재는 야성송씨 문중에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영남제일문
@IMG16@
영남제일문은 김천이 예로부터 추풍령을 통해 영남지방으로 들어오는 주요한 길목이었다는 역사적, 지리적 상징성을 기념하고자 21억원의 예산으로 2001년 7월 건립했다.
높이 20m, 길이 50m의 전통 한식구조이며 현판은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썼다. 김천출신 고원 김각한 선생이 서각을 했다.
    
최송설당 동상
↑↑ 시민탑
ⓒ 김천신문

김천중고등학교 내에 위치한 최송설당 동상은 학교 설립자인 최송설당의 전신상으로 1958년 조각가 윤호중이 제작했다. 용접이 아닌 리벳으로 청동판을 연결시켜 제작한 특이한 기법이며 2012년 등록문화재 제496호로 지정됐다.
    
시민탑
@IMG11@
시민탑은 광복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김천문화원과 김산약 임원들이 주축이 돼 1975년 8월 14일 건립했다.
당시로서는 김천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이라는 의미로 부곡동 현 위치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탑은 학이 고개를 들고 비상하려는 형태의 15m 높이로 이뤄졌는데 이것은 당시 김천시가 15개 동이었음을 반영했다고 한다.
김천출신 조각가이며 시인인 홍성문(효성여대 교수)씨가 설계해 250만원의 사업비로 완공했으며 정완영 시인이 탑문(塔文)을 썼다.
    
김천시민의 탑
우리들의 고향은 우리들의 과수원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과수원 과목이며 원정이며 또한 파수꾼이기도 하다. 두 다리로 살찐 땅을 밟으면 젖줄처럼 자양이 오르고 두 팔로 푸른 하늘을 휘어잡으면 뜨거운 태양이 손끝마다 열린다.
우리들은 제가꿈의 세월에서 제가꿈을 꽃피우고 제가꿈을 열매하여 마침내 조국이란 바구니에 빛나는 과일로 따 남겨져야 한다.
    
□대곡동의 인물

민족사학을 일군 여성교육자 최송설당
@IMG12@
김천중고등학교 뒤 고성산 자락에는 일제 강점기 막대한 재산을 민족육영사업에 바친 최송설당(崔松雪堂) 여사의 묘소가 있다.
묘소로 오르는 길옆으로 1919년 여사가 말년을 보내기 위해 만해 한용운의 자문을 받아 지었다는 정걸재(貞傑齋)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다. 1935년 정걸재의 부속건물로 지었다는 취백헌이 그나마 보존되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송설당이 정걸재를 건립한 이듬해인 1920년 음택지로서 가묘를 잡을 때 전국 최고의 지관을 초청해 고성산 일대를 돌아보게 했는데 당초 지관은 지금의 학교 기숙사 터를 길지로 잡아줬다고 한다. 그러나 송설당은 끝내 이를 사양하고 두 번째로 꼽은 자리에 자신의 가묘를 만들게 했는데 훗날 그 자리에 학생들이 원대한 꿈을 펼치는 학교기숙사가 들어섰으니 후학에게 좋은 묘터마져 양보한 송설당의 혜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송설당은 1855년(철종6년)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현 문당동)에서 화순최씨 최창환(崔昌煥)과 경주정씨 사이에서 무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대사성을 지낸 최사로(崔士老)의 후손으로 조선시대말까지 문무를 겸비한 명문가였는데 증조부 최봉관이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 연루돼 후손들이 전라도 고부로 유배가면서 집안이 기울어졌던 것이다. 김천으로 이주한 부친은 서당을 개설했는데 이때 부친으로부터 받은 엄격한 교육적 환경이 훗날 송설당의 교육관과 여류문인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배경이 됐다.
부친이 1886년 별세하자 조상의 한을 풀어 드리기로 맹세하고 재산을 정리해 1894년 상경하기에 이른다. 당시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엄비를 총애해 왕자출생을 갈구할 때였는데 송설당이 왕자탄신을 발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출산용품을 진상한 일이 계기가 돼 영친왕의 보모상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이로부터 1907년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10여년간의 궁중생활을 하며 고종으로부터 조상의 죄를 벗는 신원(伸寃)을 받았고 많은 재산을 모아 고향 김천에 무수한 자선을 베풀었다. 또한 당대의 지식인들과도 당당히 교류하며 여류문인으로서 한시 259수와 국문가사 50편을 남겼는데 ‘소나무’라는 시를 통해 송설당의 웅혼한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담장 안에 심은 소나무 한 자 남짓하여
  가지와 잎 몇 성상 겪었냐고 물었더니
  내 나이 이미 늙음을 비웃기나 하듯
  다른 날 동량됨을 보지 못 하리네.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김천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세운 것이 으뜸이었는데 1930년 학교 설립을 위해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32만원이 넘는 전 재산을 선뜻 출연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우민화정책으로 실업학교만을 허가하던 총독부의 방해공작을 거뜬히 물리치고 1931년 인문계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은 식민지배를 벗어나는 길은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정신 함양에 둔 송설당의 강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해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 잡고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마라.”
송설당은 1939년 이 유언을 남기고 8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꿈에도 그리던 여사의 소원이 헛되지 않아 김천중고등학교는 개교 이래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무수한 동량(棟樑)을 배출한 명문사학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IMG13@
    
□대곡동의 명소
    
부곡맛고을 거리
@IMG14@
부곡맛고을은 다양하고 특색 있는 음식점 100여개소가 밀집돼 있는 김천 대표 먹거리동네로 유명하다.
1998년 들판이던 200여 필지 6만6천㎡ 규모로 조성된 부곡택지 일대에 위치한 부곡맛고을. 대곡동사무소에서 부곡우체국 사이에 들어선 부곡맛고을엔 음식 종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맛 또한 뛰어나 외식하기에 더없이 좋은 맛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송설로에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벚나무에 조명등을 설치하고 2008년부터 매년 맛고을축제를 열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곳 부곡맛고을에는 또한 부곡근린공원을 비롯해서 부곡택지 2호공원, 3호공원이 조성돼 있어 찾아오는 이들에게 미식(美食)과 함께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며 100여 면의 공용주차장을 확보해 이용자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대곡동의 맛집
    
김천 유일 한우판매인증점 내고향한우촌
@IMG15@
부곡동 1505번지(김천고 맞은편)에 위치한 내고향한우촌(전화 430-2479)은  김종희(61세)씨가 15년간 운영해온 한우 암소고기 전문점이다.
내고향한우촌은 김천유일의 한우판매인증점. 경상북도와 전국한우협회로부터 인증을 받아 더욱 믿음이 간다.
‘한우판매인증제’는 소비자의 신뢰확보와 안정적인 소비촉진을 위해 생산자단체인 전국한우협회가 100% 한우를 판매하는 한우전문판매점에 대해 인증을 부여하는 제도로서 축산물등급판매소, 국립축산과학원, 전국주부교실중앙회, 한국소비생활연구원, 한우자조금관리위원회, 전국한우협회 등 축산전문가와 소비자단체가 인증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인증심사를 하므로 인증의 가치와 공정성이 높다. 또한 한 번의 인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증관리요원이 월1회 이상 인증점을 방문해 인증평가 기준의 준수 여부를 확인, 관리하기 때문에 더욱 신뢰할 수 있다.
내고향 한우촌은 2~3년산 1등급 이상의 암소고기만을 사용해 고기가 질기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한우암소고기 특유의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인근 고령 도축장에서 도축한 최상의 고기를 사용하며 구이용은 하루 전 도축한 것을, 생고기는 매일 아침 도축한 것만을 판매하기 때문에 최고의 맛과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기값은 전국최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유는 정육점을 경영했던 다년간의 노하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내고향한우촌은 최상의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한발 앞선 서비스로 좋은 식당의 표본이 되고 있다.
지난 8년간 부곡맛고을 회장을 지낸 김종희 대표는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좋은 한우만을 엄선해 공급함은 물론 정감 가는 서비스로 지역의 대표식당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며 “주기적으로 열리는 한우판매인증점 세미나에 참석해 다양한 레시피의 비법도 교육받고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식당경영자들의 노하우까지 전수받아 영업에 접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천대표 로컬푸드 웰빙음식점 선채령  
@IMG16@
부곡동 1489번지에 위치한 로컬푸드 웰빙음식점 선채령(전화 435-3332)은 향토음식 자원화 일환으로 김천관내에서 생산되는 우수한 지역 농·특산물을 식재료로 사용하는 음식점이다. 건강한 음식이 브랜드인 선채령은 신선한 식재료와 김천인의 입맛을 먼저 생각한 음식으로 오픈한지 3개월에 불과하지만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손님 몰이를 하고 있다.
향토음식 브랜드 선채령은 지역의 신선한 식재료로 만든 건강 웰빙 음식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로 지역특산물을 활용해 김천 향토음식 우수성을 알리고 시민 건강은 물론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김천시가 역점을 두고 준비한 음식점이다.
황악산, 대덕산, 금오산과 더불어 감천과 직지천이 흐르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천혜의 자원을 한 몸에 모두 품은 자연 그대로의 청정지역으로 이 청정지역에서 예로부터 자라온 포도, 감자, 양파, 산채, 표고버섯 등 좋은 식재료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선채령에서는 이 식재료를 가지고 신선한 산나물은 물론 흑돼지를 활용해 담백한 맛을 살린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1인 1만원과 2만원 메뉴가 있다. 1만원 메뉴에는 흑돼지 보쌈이 주메뉴이고  산나물이 들어간 돌솥밥에 도토리전, 고혈압·동맥경화 예방에 좋다는 표고버섯이 들어간 된장찌개가 나온다. 게르마늄 성분이 많이 함유된 자두가 첨가된 물김치, 기혈을 보호해 하초명문을 보한다는 오메가3, 지방산도 많고 적포도주 보다 염증을 가라앉히는 성분의 폴리페놀이 많은 호두와 전국 생산량의 11%를 차지하는 김천포도엑기스를 이용한 소스로 만든 샐러드 등 신선하고 맛있는 상차림을 만날 수 있다.
2만원 메뉴에는 주메뉴인 보쌈을 포함해 흑돼지 고추장불고기, 떡갈비 등과 흑돼지 요리가 추가돼 멋스러운 도자기 그릇에 담겨져 나와 레스토랑 코스요리 부럽지 않다. 
    
□대곡동의 학교
    
김천고등학교
부곡동 777번지에 위치한 김천고등학교는 1931년 3월 17일 김천고등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1931년 5월 9일 개교됐다. 1938년 4월 1일 김천중학교로 개칭됐으며 1951년 9월 22일 사립 김천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57년 4월 1일 김천중고등학교로 병합되고 1981년 5월 9일 중학교와 분리됐으며 2008년 8월 31일 송설학원의 역사를 담은 송설역사관이 개관됐다. 2009년 7월 15일 경상북도교육청으로부터 자율형 사립고로 지정된 김천고등학교는 2015년 현재 제63회에 걸쳐 2만2천781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중학교
부곡동 777번지에 위치한 김천중학교는 김천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 학교로 1931년 5월 9일 김천고등보통학교로 개교돼 1938년 4월 1일 김천중학교로 개칭됐으며 1943년 4월 1일 공립 김천중학교로 전환됐다. 1949년 9월 1일 경상북도초등교원양성소 김천분교장이 설치되고 1951년 9월 1일 3년제 중학교로 개편된데 이어 1953년 2월 18일 사립 김천중학교로 전환됐으며 1957년 4월 1일 김천고등학교와 병합됐다 1981년 5월 9일 김천고등학교와 분리돼 오늘에 이른 김천중학교는 2015년 현재 제79회에 걸쳐 1만8천3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다수초등학교
다수동 143번지에 위치한 다수초등학교는 1947년 9월 1일 김천다수국민학교로 개교돼 1996년 3월 1일 김천다수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2015년 현재 제63회에 걸쳐 5천915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부곡초등학교
부곡동 1512번지에 위치한 김천부곡초등학교는 2001년 3월 1일 개교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14회에 걸쳐 2천56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서부초등학교
부곡동 8번지에 위치한 김천서부초등학교는 1937년 6월 10일 김천태화정공립보통학교로 개교돼 1945년 10월 30일 김천서부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된데 이어 1996년 3월 1일 김천서부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2009년 3월 24일 김천교육청 부설 영재교육원, 2009년 12월 2일 김천발명교실이 설치돼 운영 중인 김천서부초등학교는 제73회에 걸쳐 1만6천764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 
대곡동(大谷洞)은 크게 부곡동, 미곡동, 다수동으로 이뤄져 있다. 김천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부곡동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김천면에 속한 원골과 금릉면에 속한 부곡(가매실), 문지알, 고래실 등 네 마을로 나눠져 있었으나 1914년 이들 마을을 합해 부곡동(富谷洞)으로 고쳤고 1962년 1·2동으로 나눴다가 1983년 다시 합했다. 
조선시대에 김산군 미곡면으로 속했던 다수동은 성종 때의 문장가 전만령(全萬齡)이 은거하면서 성산전씨 집성촌을 형성했다. 높은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이 제수됐으나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해 고장의 위상을 높였다. 1998년 다수동, 백옥동, 부곡동이 대곡동으로 통합됐다.
대곡동은 추풍령으로부터 김천시내로 접어드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동으로 1975년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김천시민의 탑이 세워졌고 2001년에는 김천시 승격 50주년을 기념하는 영남제일문이 세워지는 등 우리 고장의 관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마을과 전설
#대곡1(금강사에서 바라본 가매실)
가마솥을 닮았다는 부곡동
부곡동(釜谷洞)은 가매실(釜谷), 원골(院洞), 문지알(聞知謁), 고래실 등 네 마을로 이뤄졌다. 부곡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가매실은 오늘날 시민탑삼거리에서 그랜드호텔까지의 고성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조선시대 초까지 굴곡부곡(屈谷部曲)으로 불린 마을이 있었다고 부곡동(部曲洞)이라 했다. 또 주변 산세가 가마솥을 닮아 가마실 또는 가매실이라 부르고 한자로 가마솥부(釜)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부곡(釜谷)이라 했다고도 한다.
1914년 주변 마을과 통합하면서 부자마을을 만들자는 뜻으로 가마부(釜)자 대신 부자부(富)자를 써서 부곡동(富谷洞)으로 고쳤다.
원골은 서부초등학교로부터 고성산 방향으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우측의 양지마와 좌측의 음지마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원골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조선시대 말까지 마을입구에 남원(南院)이라는 관용숙소가 있음으로 해서 원동(院洞) 또는 원골(院谷)이라고 한 것이다.
또 이 마을 중앙에는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1869~1943)을 제향하는 원계서원(遠溪書院)이 자리 잡고 있다.
송준필은 한말의 성리학자로 한일합방 후 고향인 성주에서 3·1운동을 펼쳤고 파리장서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일경의 눈을 피해 1923년 원동에 은거하며 원계서당을 개설해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하다 1943년 타계했다.
1986년 서원 내에 세운 숭덕사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이다.
문지알은 현 아주아트빌에서 주공아파트 사이의 마을로 옛날 고성산 봉수대에 봉화가 오르면 산 밑에 있는 이 마을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제일 먼저 알 수 있다 해서 들을문(聞)자에 알지(知), 아뢸알(謁)자를 써서 문지알(聞知謁)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대곡2(문지알)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문지알의 발음이 어렵다 해서 음이 비슷한 모지(毛之)라고 적는 바람에 모지동(毛之同)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래실은 김천고등학교와 주공아파트를 지나 철도 굴다리 직전에 좌측으로 고성산 끝자락인 파고산과 당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 금릉면으로 속했던 큰 마을로 고래실이라는 지명은 파고산에서 흘러내린 앞산이 고래의 등처럼 미끈하게 생겨 고래실이라 했다고 한다.
또 달리 파고산과 당산 사이에 자리한 마을의 지형이 아궁이에서 구들장으로 불이 올라가는 불구멍의 순우리말인 고래를 닮아 고래실이라 했다고도 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 앞산이 주공아파트와 굴다리를 지나 들판 앞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1905년 경부선철도를 부설하면서 앞산을 절개해 그 흙으로 주변 저지대의 철로를 복토하면서 잘랐다고 한다.
#대곡3(고래실)
    
두 노인의 전설이 전하는 다수동
1998년 부곡동과 함께 대곡동에 통합된 미곡동은 1983년 미곡동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1914년부터 금릉면 백옥동(白玉洞)과 다수동(多壽洞)으로 나눠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미곡면에 속해 옥산, 본리, 노증리, 구신기, 이로리 등 다섯 마을로 나눠졌다. 미곡동 관할에는 다수(多壽), 이로(二老), 노증(老增) 등 노인과 장수를 의미하는 지명이 다수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미곡(米谷)이라는 지명은 88세의 나이를 뜻하는 미수(米壽)에서 따왔다고도 하고 새실마을의 성산전씨 재실인 미곡정사(薇谷精舍)의 미곡에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신기, 바깥새실 등으로도 불리는 새실은 새터 즉 한자로 신기(新基)로 적으므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본디의 마을로부터 새로 분가해 형성된 마을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새실마을은 조선 성종 때 생원 전만령(全萬齡)이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령에서 미곡동 새실로 이거한 후부터 대대로 성산전씨 백파(伯派)집성촌을 형성해왔다. 전만령은 1506년 조정에서 지평 벼슬을 제수했으나 시 한 수를 지어 사양한 일화로 유명하다.
    
世事琴三尺 세상만사는 삼척 가야금에 부치고
生涯酒一杯 평생의 일은 한잔 술잔에 맡겼네
西亭江上月 서쪽의 정자는 강상의 아래요
東閣雪中梅 동쪽의 누각은 눈 속에 핀 매화꽃일세
    
평생을 미곡동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중종(中宗)은 여러 차례 공의 문장을 칭찬했고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묘갈문을 썼다. 마을 뒤에는 입향조인 전만령을 제향하는 미곡정사(微谷情舍)가 있다.
#대곡4(미곡정사)
영남제일문을 지나 좌측으로 덕대산 자락인 안산아래에 자리한 이로리는 임진왜란 때 다른 성씨를 가진 두 노인이 피난을 와서 마을을 이뤄 두이(二)자에 늙을로(老)자를 써서 이로리(二老里)라 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이로(伊老)로 쓰고 있다.
#대곡5(이로리)
    
예못 전설이 전하는 유서 깊은 백옥동
백옥동(白玉洞)은 내촌(안새실), 노증리(老增里), 옥산동이 속했는데 내촌으로부터 흘러내린 하천(복개천)으로부터 시내방향의 마을을 일컫는다.
새실로 통칭되는 일대 마을 중 가장 오래된 마을이며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해서 본리(本里) 또는 내촌(內村)으로 불리는 안새실은 성주골 입구에 자리 잡은 큰 마을로 마을중앙의 고목 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대곡6(내촌마을 홰나무)
마을의 형성된 내력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옛날 예씨(芮氏)성을 가진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나라에 큰 죄를 지어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못을 팠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때의 못이 마을인근 철로변에 있는 예못(芮池)으로 지금은 음이 변해 애인지라고 불린다.
#대곡7(예못)
노증리(老增里)는 현 백옥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옛날 주민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염원이 지명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노(魯)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마을에 처음 들어 왔기 때문에 노증(魯曾)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노증리의 남쪽으로는 풍수지리상으로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산세를 이루고 있어 이름 붙여진 옥산(玉山) 아래에 옥산동으로 불린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옛 이야기로만 전할 따름이다.
    
□대곡동의 문화유산
    
원계서원
#대곡8(원계서원)
원계서원(遠溪書院)은 부곡동 143번지 원골마을에 있는 서원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성리학자인 공산(空山) 송준필(宋浚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송준필은 파리장서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3년 김천으로 이거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원호재(遠乎齋)’라 이름하고 문 앞에 ‘황학동천백운산방(黃鶴洞天白雲山房)’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42년 원계정사(遠溪精舍)를 세웠는데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들어 4칸을 증축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 제자들과 유림에서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원설립을 추진하면서 원계정사를 해체해 현재의 서원 강당자리로 옮기고 정학당(正學堂)이라 이름 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옛 원계정사 터에 숭덕사(崇德祠)를 세웠고 1971년에 송준필의 위패를 봉안함과 동시에 동재인 제양당(制養堂), 서재인 일성재(日省齋)와 외삼문인 직방문(直方門)이 세워지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췄다.
제자들은 서원을 유지하기 위해 계(契)를 조직했는데 계원이 100여 명에 달하기도 했으나 1990년대 이후 와해되고 현재는 야성송씨 문중에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영남제일문
#대곡9(영남제일문)
영남제일문은 김천이 예로부터 추풍령을 통해 영남지방으로 들어오는 주요한 길목이었다는 역사적, 지리적 상징성을 기념하고자 21억원의 예산으로 2001년 7월 건립했다.
높이 20m, 길이 50m의 전통 한식구조이며 현판은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썼다. 김천출신 고원 김각한 선생이 서각을 했다.
    
최송설당 동상
#대곡10(최송설당 동상)
김천중고등학교 내에 위치한 최송설당 동상은 학교 설립자인 최송설당의 전신상으로 1958년 조각가 윤호중이 제작했다. 용접이 아닌 리벳으로 청동판을 연결시켜 제작한 특이한 기법이며 2012년 등록문화재 제496호로 지정됐다.
    
시민탑
#대곡11(시민탑)
시민탑은 광복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김천문화원과 김산약 임원들이 주축이 돼 1975년 8월 14일 건립했다.
당시로서는 김천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이라는 의미로 부곡동 현 위치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탑은 학이 고개를 들고 비상하려는 형태의 15m 높이로 이뤄졌는데 이것은 당시 김천시가 15개 동이었음을 반영했다고 한다.
김천출신 조각가이며 시인인 홍성문(효성여대 교수)씨가 설계해 250만원의 사업비로 완공했으며 정완영 시인이 탑문(塔文)을 썼다.
    
김천시민의 탑
우리들의 고향은 우리들의 과수원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과수원 과목이며 원정이며 또한 파수꾼이기도 하다. 두 다리로 살찐 땅을 밟으면 젖줄처럼 자양이 오르고 두 팔로 푸른 하늘을 휘어잡으면 뜨거운 태양이 손끝마다 열린다.
우리들은 제가꿈의 세월에서 제가꿈을 꽃피우고 제가꿈을 열매하여 마침내 조국이란 바구니에 빛나는 과일로 따 남겨져야 한다.
    
□대곡동의 인물

민족사학을 일군 여성교육자 최송설당
#대곡12(최송설당 유품)
김천중고등학교 뒤 고성산 자락에는 일제 강점기 막대한 재산을 민족육영사업에 바친 최송설당(崔松雪堂) 여사의 묘소가 있다.
묘소로 오르는 길옆으로 1919년 여사가 말년을 보내기 위해 만해 한용운의 자문을 받아 지었다는 정걸재(貞傑齋)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다. 1935년 정걸재의 부속건물로 지었다는 취백헌이 그나마 보존되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송설당이 정걸재를 건립한 이듬해인 1920년 음택지로서 가묘를 잡을 때 전국 최고의 지관을 초청해 고성산 일대를 돌아보게 했는데 당초 지관은 지금의 학교 기숙사 터를 길지로 잡아줬다고 한다. 그러나 송설당은 끝내 이를 사양하고 두 번째로 꼽은 자리에 자신의 가묘를 만들게 했는데 훗날 그 자리에 학생들이 원대한 꿈을 펼치는 학교기숙사가 들어섰으니 후학에게 좋은 묘터마져 양보한 송설당의 혜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송설당은 1855년(철종6년)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현 문당동)에서 화순최씨 최창환(崔昌煥)과 경주정씨 사이에서 무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대사성을 지낸 최사로(崔士老)의 후손으로 조선시대말까지 문무를 겸비한 명문가였는데 증조부 최봉관이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 연루돼 후손들이 전라도 고부로 유배가면서 집안이 기울어졌던 것이다. 김천으로 이주한 부친은 서당을 개설했는데 이때 부친으로부터 받은 엄격한 교육적 환경이 훗날 송설당의 교육관과 여류문인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배경이 됐다.
부친이 1886년 별세하자 조상의 한을 풀어 드리기로 맹세하고 재산을 정리해 1894년 상경하기에 이른다. 당시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엄비를 총애해 왕자출생을 갈구할 때였는데 송설당이 왕자탄신을 발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출산용품을 진상한 일이 계기가 돼 영친왕의 보모상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이로부터 1907년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10여년간의 궁중생활을 하며 고종으로부터 조상의 죄를 벗는 신원(伸寃)을 받았고 많은 재산을 모아 고향 김천에 무수한 자선을 베풀었다. 또한 당대의 지식인들과도 당당히 교류하며 여류문인으로서 한시 259수와 국문가사 50편을 남겼는데 ‘소나무’라는 시를 통해 송설당의 웅혼한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담장 안에 심은 소나무 한 자 남짓하여
  가지와 잎 몇 성상 겪었냐고 물었더니
  내 나이 이미 늙음을 비웃기나 하듯
  다른 날 동량됨을 보지 못 하리네.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김천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세운 것이 으뜸이었는데 1930년 학교 설립을 위해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32만원이 넘는 전 재산을 선뜻 출연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우민화정책으로 실업학교만을 허가하던 총독부의 방해공작을 거뜬히 물리치고 1931년 인문계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은 식민지배를 벗어나는 길은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정신 함양에 둔 송설당의 강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해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 잡고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마라.”
송설당은 1939년 이 유언을 남기고 8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꿈에도 그리던 여사의 소원이 헛되지 않아 김천중고등학교는 개교 이래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무수한 동량(棟樑)을 배출한 명문사학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대곡12-1(최송설당 여사 거처하던 취백헌)
    
□대곡동의 명소
    
부곡맛고을 거리
#부곡맛고을 아치
부곡맛고을은 다양하고 특색 있는 음식점 100여개소가 밀집돼 있는 김천 대표 먹거리동네로 유명하다.
1998년 들판이던 200여 필지 6만6천㎡ 규모로 조성된 부곡택지 일대에 위치한 부곡맛고을. 대곡동사무소에서 부곡우체국 사이에 들어선 부곡맛고을엔 음식 종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맛 또한 뛰어나 외식하기에 더없이 좋은 맛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송설로에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벚나무에 조명등을 설치하고 2008년부터 매년 맛고을축제를 열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곳 부곡맛고을에는 또한 부곡근린공원을 비롯해서 부곡택지 2호공원, 3호공원이 조성돼 있어 찾아오는 이들에게 미식(美食)과 함께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며 100여 면의 공용주차장을 확보해 이용자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대곡동의 맛집
    
김천 유일 한우판매인증점 내고향한우촌
#대곡14(내고향한우촌)
부곡동 1505번지(김천고 맞은편)에 위치한 내고향한우촌(전화 430-2479)은  김종희(61세)씨가 15년간 운영해온 한우 암소고기 전문점이다.
내고향한우촌은 김천유일의 한우판매인증점. 경상북도와 전국한우협회로부터 인증을 받아 더욱 믿음이 간다.
‘한우판매인증제’는 소비자의 신뢰확보와 안정적인 소비촉진을 위해 생산자단체인 전국한우협회가 100% 한우를 판매하는 한우전문판매점에 대해 인증을 부여하는 제도로서 축산물등급판매소, 국립축산과학원, 전국주부교실중앙회, 한국소비생활연구원, 한우자조금관리위원회, 전국한우협회 등 축산전문가와 소비자단체가 인증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인증심사를 하므로 인증의 가치와 공정성이 높다. 또한 한 번의 인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증관리요원이 월1회 이상 인증점을 방문해 인증평가 기준의 준수 여부를 확인, 관리하기 때문에 더욱 신뢰할 수 있다.
내고향 한우촌은 2~3년산 1등급 이상의 암소고기만을 사용해 고기가 질기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한우암소고기 특유의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인근 고령 도축장에서 도축한 최상의 고기를 사용하며 구이용은 하루 전 도축한 것을, 생고기는 매일 아침 도축한 것만을 판매하기 때문에 최고의 맛과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기값은 전국최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유는 정육점을 경영했던 다년간의 노하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내고향한우촌은 최상의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한발 앞선 서비스로 좋은 식당의 표본이 되고 있다.
지난 8년간 부곡맛고을 회장을 지낸 김종희 대표는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좋은 한우만을 엄선해 공급함은 물론 정감 가는 서비스로 지역의 대표식당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며 “주기적으로 열리는 한우판매인증점 세미나에 참석해 다양한 레시피의 비법도 교육받고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식당경영자들의 노하우까지 전수받아 영업에 접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천대표 로컬푸드 웰빙음식점 선채령 
#대곡15(선채령)
부곡동 1489번지에 위치한 로컬푸드 웰빙음식점 선채령(전화 435-3332)은 향토음식 자원화 일환으로 김천관내에서 생산되는 우수한 지역 농·특산물을 식재료로 사용하는 음식점이다. 건강한 음식이 브랜드인 선채령은 신선한 식재료와 김천인의 입맛을 먼저 생각한 음식으로 오픈한지 3개월에 불과하지만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손님 몰이를 하고 있다.
향토음식 브랜드 선채령은 지역의 신선한 식재료로 만든 건강 웰빙 음식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로 지역특산물을 활용해 김천 향토음식 우수성을 알리고 시민 건강은 물론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김천시가 역점을 두고 준비한 음식점이다.
황악산, 대덕산, 금오산과 더불어 감천과 직지천이 흐르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천혜의 자원을 한 몸에 모두 품은 자연 그대로의 청정지역으로 이 청정지역에서 예로부터 자라온 포도, 감자, 양파, 산채, 표고버섯 등 좋은 식재료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선채령에서는 이 식재료를 가지고 신선한 산나물은 물론 흑돼지를 활용해 담백한 맛을 살린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1인 1만원과 2만원 메뉴가 있다. 1만원 메뉴에는 흑돼지 보쌈이 주메뉴이고  산나물이 들어간 돌솥밥에 도토리전, 고혈압·동맥경화 예방에 좋다는 표고버섯이 들어간 된장찌개가 나온다. 게르마늄 성분이 많이 함유된 자두가 첨가된 물김치, 기혈을 보호해 하초명문을 보한다는 오메가3, 지방산도 많고 적포도주 보다 염증을 가라앉히는 성분의 폴리페놀이 많은 호두와 전국 생산량의 11%를 차지하는 김천포도엑기스를 이용한 소스로 만든 샐러드 등 신선하고 맛있는 상차림을 만날 수 있다.
2만원 메뉴에는 주메뉴인 보쌈을 포함해 흑돼지 고추장불고기, 떡갈비 등과 흑돼지 요리가 추가돼 멋스러운 도자기 그릇에 담겨져 나와 레스토랑 코스요리 부럽지 않다. 
    
□대곡동의 학교
    
김천고등학교
부곡동 777번지에 위치한 김천고등학교는 1931년 3월 17일 김천고등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1931년 5월 9일 개교됐다. 1938년 4월 1일 김천중학교로 개칭됐으며 1951년 9월 22일 사립 김천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57년 4월 1일 김천중고등학교로 병합되고 1981년 5월 9일 중학교와 분리됐으며 2008년 8월 31일 송설학원의 역사를 담은 송설역사관이 개관됐다. 2009년 7월 15일 경상북도교육청으로부터 자율형 사립고로 지정된 김천고등학교는 2015년 현재 제63회에 걸쳐 2만2천781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중학교
부곡동 777번지에 위치한 김천중학교는 김천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 학교로 1931년 5월 9일 김천고등보통학교로 개교돼 1938년 4월 1일 김천중학교로 개칭됐으며 1943년 4월 1일 공립 김천중학교로 전환됐다. 1949년 9월 1일 경상북도초등교원양성소 김천분교장이 설치되고 1951년 9월 1일 3년제 중학교로 개편된데 이어 1953년 2월 18일 사립 김천중학교로 전환됐으며 1957년 4월 1일 김천고등학교와 병합됐다 1981년 5월 9일 김천고등학교와 분리돼 오늘에 이른 김천중학교는 2015년 현재 제79회에 걸쳐 1만8천3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다수초등학교
다수동 143번지에 위치한 다수초등학교는 1947년 9월 1일 김천다수국민학교로 개교돼 1996년 3월 1일 김천다수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2015년 현재 제63회에 걸쳐 5천915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부곡초등학교
부곡동 1512번지에 위치한 김천부곡초등학교는 2001년 3월 1일 개교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14회에 걸쳐 2천56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서부초등학교
부곡동 8번지에 위치한 김천서부초등학교는 1937년 6월 10일 김천태화정공립보통학교로 개교돼 1945년 10월 30일 김천서부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된데 이어 1996년 3월 1일 김천서부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2009년 3월 24일 김천교육청 부설 영재교육원, 2009년 12월 2일 김천발명교실이 설치돼 운영 중인 김천서부초등학교는 제73회에 걸쳐 1만6천764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저작권자 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