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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우리 고장 어제와 오늘<21> 지좌동(智佐洞)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11.25 08:41 수정 2015.12.07 08:41

황산, 까치산, 감천 정기 서린 배산임수의 자연환경 자랑
김천시내와 혁신도시 가교역할로 나날이 발전하는 동

@IMG16@
지좌동은 감천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감천과 황산, 까치산, 갈대고개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이상적인 동으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지역이다.
갈대, 배다리, 마잠, 응곡, 호동 등 크게 다섯 마을로 이뤄져 있는 지좌동은 조선시대 김산군 군내면 관할의 마좌산리(馬佐山里)에 속했던 갈대와 마잠, 고가대면(古加大面)에 속했던 지수리(智水里)와 새말, 개령현 농소면에 속했던 응골(鷹谷)과 호동(壺洞)으로 이뤄져 있다.
1914년 고가대면 지수리(智水里)의 지(智)자와 마좌산리(馬佐山里)의 좌(佐)자를 따서 지좌동(智佐洞)이라 고치고 감천면에 속했으며 응곡과 호동을 합해 덕곡동(德谷洞)이라 고치고 농소면에 속하기도 했다.
지좌동의 중심을 이루는 황산(凰山)은 김천의 대표적인 전설인 사모바위, 할미바위에서 병풍역할을 하는 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김천혁신도시와 KTX김천(구미)역이 남면일대에 형성되면서 그 중간에 위치해 가교역할을 하게 되면서 급속도로 발전을 이어가고 있는 지좌동은 신거주지의 요람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마을과 전설
    
배다리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 지좌동
↑↑ 갈대마을
ⓒ 김천신문

원래의 지좌동(智佐洞)은 황산을 중심으로 갈대, 너머갈대, 새마을, 배다리, 공절, 마잠(馬潛) 등 여섯 마을로 이뤄져 있었다.
조선시대에 새마을은 고가대면, 마잠과 갈대, 배다리는 군내면으로 속했는데 1914년 이들 마을을 통합할 때 새마을이 속한 지수리(智水里)에서 지(智)자와 마잠이 속한 마좌산리(馬佐山里)에서 좌(佐)자를 따서 지좌동(智佐洞)으로 고치고 감천면 관할로 삼았다.
1938년 김천읍, 1949년 김천시 관할이 되고 1983년 덕곡동을 통합했다.
갈대는 감천교 너머 4호선 국도로부터 경부선 철도사이에 위치한 지좌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옛날 감천변에 갈대밭이 장관을 이뤄 갈대라는 동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馬佐山里)에 속했다.
갈대마을로부터 황산과 까치산이 야트막한 고개로 연결돼 있어 갈대고개라 불렸는데 지금의 성의중고등학교로부터 김천교도소와 김천동부초등학교 일대의 마을을 고개 너머에 있다고 너머갈대라고 했다.
↑↑ 갈대고개
ⓒ 김천신문

갈대마을로부터 경부선철도 굴다리를 지나 감천면과 경계를 이루는 도로변의 새마을은 까치산을 배후로 자리한 마을로 뒤에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해서 새마을, 새말로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해 지수리(智水里)라 했다.
황산의 북쪽, 감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배다리는 옛날 낙동강으로부터 어물을 싣고 올라온 배들이 짐을 내렸던 곳이다. 감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없었던 시절에 이 마을로부터 감호동 김천장터까지 나룻배를 이은 임시다리, 즉 배의 다리를 놓았다 해서 배다리란 지명을 얻었다.
↑↑ 배다리
ⓒ 김천신문

조선시대 말까지도 나룻배로 장꾼을 실어 날라다주거나 장날마다 배다리를 가설해주고 품삯을 받았다는 뱃사공이 이 마을에 대를 이어 살았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배다리마을 앞 감천은 6·25전쟁 때 격전장으로도 유명했는데 미군 공군기의 폭격을 받은 북한군 탱크 수십대가 오랫동안 감천변에 방치돼 있다가 모래에 파묻히고 말았다고 한다.
이 같은 증언을 바탕으로 1970년대 관계당국에서 조사단을 파견해 수개월동안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라 결국 찾는데 실패했다.
배다리와 마잠마을 사이에는 공절, 공탈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 공절마을
ⓒ 김천신문

공절이라는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옛날 절이 있었는데 망한 후 빈 절이 있었다 해서 ‘비어있는 절’이란 뜻으로 공절이라 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마을 앞에 비옥한 마잠들이 펼쳐져 있어 채소가 많이 생산됐는데 일설에는 일제 강점기 김천지역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 적도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범람한 감천물이 몇 해 간격으로 마잠들에 유기질이 풍부한 흙을 날라다줌으로써 따로 거름을 하지 않아도 농사가 대풍을 이룰 만큼 잘 됐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된 채소는 질이 좋기로 유명해 개령면 황계리 번개들과 봉산면 덕천리 남전들이 함께 김천지역의 대표적인 채소 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많은 주민들에 의해 채소산지로서의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너머갈대 고갯마루로부터 지좌동사무소 아래 자리 잡은 마잠마을은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馬佐山里)에 속했었다.
향지 ‘금릉지(金陵誌)’에는 김천역의 역리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말을 키우거나 마차나 수레를 제작하고 고치는 일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마잠마을
ⓒ 김천신문

마잠마을의 지명에 말마(馬)자가 들어간 이유는 일대주민들의 말과 같이 말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전통은 오래도록 이어져 1960년대 말까지 말을 키우고 짐을 나르는 인부들이 마잠마을을 중심으로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또 달리 마잠이라는 지명은 마좌산(馬佐山)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황산의 형세가 감천 너머에서 보면 말의 발굽을 닮았기 때문에 마잠이라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지좌동 일대는 말과 관련된 지명과 유래가 많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또 마잠마을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김천지방으로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이 정착해 신앙촌을 형성한 마을로 포교를 위해 김천에 온 김성학 알렉시오신부가 1913년 김천지역에서 최초로 마잠공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호동 무실 응골로 이뤄진 덕곡동
현재는 지좌동으로 통합된 덕곡동(德谷洞)은 원래 호동, 무실, 응골 등 세 마을로 나눠져 있었다.
조선시대 말까지 개령현 농소면에 속했던 호동과 무실마을은 1914년 두 마을이 합해져 덕곡동이 됐고 1983년 지좌동으로 속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농소면 신촌리, 서쪽으로 마잠, 남쪽으로 감천면 금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최근 무실삼거리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등 혁신도시 건설과 함께 국도변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시내에서 감천교를 건너 갈대고개를 넘어서 지좌동사무소를 지나면 입구에서 볼 때는 전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지점에 덕곡동의 중심마을인 호동이 자리 잡고 있다.
↑↑ 마을입구에서 바라본 호동마을
ⓒ 김천신문

특히 경부선 철도가 마을 앞을 관통하면서 약 100년을 넘게 고립된 섬과 같은 마을이 돼버렸다.
호동은 1600년대 초 인근의 농소 신촌마을 옆 권동지라는 저수지 인근에 살던 진주강씨, 동래정씨, 평택임씨 일가들이 도적떼가 극성을 부리고 수해가 자주 일어나자 현재의 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오늘의 호동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호동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마을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어 입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막상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확 넓어지는 항아리 또는 병과 같은 형태의 지형이라 해서 병실이라 부르고 한자로 병호(壺)자를 써서 호동(壺洞)이라 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빙서리라 불렀다.
실제로 장고개로 불리는 고갯마루 안쪽으로만 마을이 있을 때는 밖에서는 이곳에 마을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은폐됐던 마을이다. 병자호란을 비롯한 여러 전쟁 때도 적병들이 마을이 없는 줄 알고 그냥 지나쳐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또 달리 덕곡동이라고도 했는데 신촌에서 도둑이 들지 않고 땅이 기름진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면서 큰 부자가 많이 나와 하늘과 땅의 덕을 입었다고 해서 덕덕(德)자를 써서 덕곡(德谷)이라 했다고 한다.
도둑이나 왜적이 들어오지도 않고 또 부자가 많이 배출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주함으로 예전에는 아주 큰 마을로 발전했으나 근년 들어 시내로 많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뜻있는 마을주민들은 안타까워한다.
↑↑ 무실마을
ⓒ 김천신문

무실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까치산 아래에 자리 잡은 무실마을을 만날 수 있다.
무실은 조선 광해군 때 문병주라는 선비가 낙향한 이래 대대로 남평문씨 충선공파 집성촌을 형성해오고 있다.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마을 뒷산인 까치산의 제일 큰 골짜기인 배나무골에 큰 배나무가 많아 우거질무(茂)자에 열매실(實)자를 써서 무실(茂實)이라 했다고 한다.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고목 배나무가 산 곳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고사하고 없다.
또 마을이름을 달리 응곡동(鷹谷洞)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마을 뒷산인 까치산이 시내쪽에서 보면 까치를 닮았지만 무실마을에서 볼 때는 날아오르는 매의 형세를 하고 있어 매응(鷹)자를 써서 응골 또는 응곡(鷹谷)이라 했다고 한다.
    
□지좌동의 문화유산

마잠공소
↑↑ 마잠공소
ⓒ 김천신문

지좌동의 옛 마을 지명의 하나인 마잠은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피신해 온 천주교 신자들이 김천 지역에서는 최초로 신앙촌을 형성한 곳이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부친인 서철순이 이 마을에 살면서 아들 서상돈을 낳았고 신도 권종웅이 박해를 피해 대항면 대성리 공자동에 살다가 마잠으로 피난 오고 권종웅의 인도로 마잠마을의 임 바오로가 영세를 받고 입교했다.
또 마을에 별감 벼슬을 지낸 서 토마와 허 요셉 가정, 곽 안나와 부모도 신자가 되면서 마잠마을이 지역 천주교의 산실이 됐다.
마잠마을은 처음에는 대구본당에서 관할했으나 1894년 왜관 가실본당이 설립되면서 가실본당 관할로 바뀌었다. 1901년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가 가실성당에 재임할 때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건의해 김천성당 설립을 허락받고 1901년 5월 27일에 김천성당 초대 신부로 부임해 지좌동 마잠마을에서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했다.
김성학 알렉시오신부가 마잠마을에서 포교를 위해 왕래할 때 조랑말을 타고 다녔다고 하는데 파란 눈의 서양인이 말을 타고 다니자 이를 신기하게 여긴 동네 아이들이 말 뒤를 따라 다녔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1913년에는 마잠마을에서 아이들을 모아 산발적으로 글을 가르치다가 이 마을의 천주교 신자인 김옥배의 부친이 땅을 기증해 지좌동 405번지에 지좌동성당의 전신인 마잠공소가 설립됐다.
마잠공소에 매주 1회씩 황금동 신부가 방문해 미사 집전을 하면서 마잠마을의 신자 수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1930년 4월 16일(어떤 자료에는 1935년 6월 16일)에 마잠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됐으며 이때부터 명칭이 지좌동천주교회로 바뀌었다.
지좌동성당 근처인 지좌동 396번지에 현재 옛 마잠공소 터가 남아 있다. 지좌동성당에서는 마잠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돼 지좌동성당으로 바뀐 1930년 4월 16일을 지좌동성당 설립일로 삼고 있어 지좌동성당이 마잠공소를 계승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지좌동의 산

조선시대 삼산에 속했던 황산
↑↑ 황산
ⓒ 김천신문

해발 279m의 황산은 지좌동 마잠과 배다리, 갈대, 호동마을을 끼고 있는 도심야산으로 감천까지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예전에는 자산(鷓山), 응봉산(鷹峰山)과 함께 김천을 상징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하나였다.
지금은 누를황(黃)자의 황산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과거에는 봉황새황(凰)자의 황산이라 했으며 김천을 대표하는 전설인 사모바위, 할미바위 전설에서 신랑으로 비유되는 모암산 사모바위와 신부로 비유되는 황금동 할미바위가 혼례를 올릴 때 병풍역할을 했다 해서 병풍산으로도 불렸다.
호동쪽에서 볼 때는 말의 발굽을 닮아 마좌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까치산과는 갈대고개를 경계로 나뉘며 감천을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김천 시내와 감천이 한눈에 조망되는 관계로 산 정상부 곳곳에 군사용 참호가 산재해있는데 이것은 황산이 김천시내 전역이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황산의 등산로는 지좌동 배다리마을에서 오르는 두 갈래 길과 아주아트빌에서 오르는 세 구간이 대표적인 산행길이다.
황금동에서 김천교를 건너 배다리마을 방향으로 접어들자마자 황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알리는 나무팻말이 나타난다.
100m 남짓 오르면 ‘김천읍 남산정(金泉邑 南山町)’이라고 새겨진 묘비가 등산로 옆에 나타나는데 김천을 읍으로 남산동을 정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서 일제강점기 때의 묘소로 보인다.
묘 위쪽으로는 엉성한 군 막사와 진지로 추정되는 시설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황산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산임을 짐작하게 한다.
20분 정도 걸려 산 정상에 올라서면 감천 너머로 시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황산과 함께 옛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삼산으로 일컬어지던 응봉산과 자산이 이수인 감천과 직지천을 사이에 두고 노닐고 있는 형국이니 조상들이 아마도 삼산이수를 정할 때 이곳 황산에 올라본 연후에 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상에서 하산하기 위해서는 김천교와 아주아트빌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어느 길을 택하던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아카시아의 천국 까치산
@IMG11@
까치산은 황산과 함께 지좌동을 대표하는 도심야산으로 해발 256m에 이르는 크게 높지 않은 산이다. 형국이 까치를 닮았다 해서 까치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응골 쪽에서는 까치가 아닌 송골매를 닮았다 해서 송골매응(鷹)자를 써서 응골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겼다.
산중에는 다른 산과 달리 고목 아카시아나무와 야생 밤나무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어 누구나 쉽게 등반할 수 있다. 새마을 가기 전 철도굴다리 인근에서 길을 잡으면 1시간 내에 정상에 도달할 수 있고 성의중고등학교방면으로 하산할 수 있다.
현재의 성의중고등학교 일대는 까치골로 불리며 옛날 선비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말 까치산 자락에 들어가 과거공부를 하던 한 선비가 있었는데 옛 감문국이 있었던 개령현에 살던 박씨성을 가진 한 아리따운 처녀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훗날 선비가 죽기직전 처녀가 그 사실을 알고 찾아가 선비를 살렸고 혼인을 한 후 학문에 매진해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처녀를 흠모하던 선비가 썼다는 시 한수가 구전으로 전해진다.
    
이 천둥 이 비 나려 감천물로 어우러지면
님 계신 감문 땅 속절없이 닿으려나.
길은 외줄기 하릴없이 깊어가는데
까치골 밤꽃향기 눈치 없이 짙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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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산 등산로는 새마을과 까치골 성의중고등학교, 덕일한마음아파트, 응골 등 여러 코스가 있으며 대부분 정상까지 1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야산이다.
지좌동 갈대마을 동양강변아파트에서 새마을 방향으로 가다가 철길 굴다리 지나자마자 왼편에 ‘까치산 등산로’라는 푯말이 세워진 등산로 시작점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정상까지는 1천600m, 덕일한마음아파트까지는 2천900m 거리라고 친절히 안내돼있다. 잘 정리된 나무계단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야생화가 흐드러진 오솔길과 고목 아카시아가 군락을 이룬 소담한 등산로가 나타난다.
30여분 만에 오른 정상에는 손때가 묻은 철봉과 소박한 정자와 함께 해발 256m임을 알리는 나무 표석이 서 있다. 정상에서는 김천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감천과 어우러진 시가지 풍경이 아름답다.
정상으로부터는 덕일 한마음아파트와 성의중고등학교로 하산할 수 있는데 하산길에는 그 많던 아카시아가 사라지고 소나무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성의중고등학교로 이어지는 하산길 헬기장 주변으로는 이름 없는 한 선비가 노래했다는 까치골의 밤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덕곡동의 자랑
    
덕곡체육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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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곡동 1042번지 일원에 위치한 덕곡체육공원은 김천시가 7년간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하다 매립이 종료되면서 2004년 6월 2만7천㎡(8천100평) 규모로 조성한 공원이다. 
이곳 덕곡체육공원은 다른 공원과 차별화되게 게이트볼장, 농구장, 배구장, 족구장, 배드민턴장을 비롯한 체력단력시설 14종 33점 외에도 산책로, 초가정자, 파고라, 의자 등 편익시설을 설치해 시민들에게 건강증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공원의 동쪽은 경부고속철도, 서쪽은 경부선철도와 접하고 있어 철도 이용객들에게 김천이 깨끗한 환경과 아름다운 도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공원 비탈법면 400m구간에 수목으로 문양을 디자인해 심었다.
덕곡체육공원에 심어진 나무는 13종 38만8천700주. 소나무, 왕벚나무, 광나무, 사철나무 등을 심고 4점의 조각품을 설치해 혐오시설인 쓰레기 매립장을 친환경적인 휴식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IMG14@ 
    
□지좌동의 맛집
    
최상급만을 고집하는 한우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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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곡동 654-7번지에 위치한 한우명가. 무실삼거리에서 아포-구미 방향으로 300m 남짓 내려가 왼쪽 도로변에 자리한 한우명가는 오세길-이순자 부부가 운영하는 한우전문 음식점이다.
재선 시의원 출신의 오세길 사장이 이곳에 한우명가를 개업한지는 7년에 불과하지만 평화동에서 오장군으로 명성을 떨치던 때를 빼놓을 수 없으니 이들 부부의 고기 집 경력은 20년에 가깝다. 
“저희는 1등급 위의 등급인 A+와 A++만을 취급합니다. 김천시로부터 한우인증업소로 지정받은데 이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원산지 표시 우수음식점(제710037호)으로 지정 받은 한우전문점이지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는 거의 매월 저희 업소를 방문해 고기 DNA검사, 위생상태 등에 대한 검사를 합니다.”
한우명가에서는 최상급의 한우고기만을 고집하고 있다. 7년째 고령(때로는 군위)축산물공판장에서 경매를 본 도축된 한우를 온마리로 들여와 직접 해체해서 취급하기 때문에 한우명가를 이용해본 손님들은 “품질은 물론 맛이 으뜸”이라며 쉽게 단골이 된다.
한우명가의 대표 음식은 불고기와 육회. 육회는 특히 육질이 담백하면서도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 같은 맛으로 미식가들은 불고기에 육회를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우명가의 또 하나 장점은 품질은 최고급이면서도 값은 저렴하다는 것. 식육점과 식당을 나눠 운영하기 때문에 상차림비가 추가돼도 저렴하다는 것이다.
“한우고기는 좋은 고기를 들여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상당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숙성도 제대로 시켜야 하고요.”
한우명가(전화 432-6151)에서는 택배를 통한 판매도 이뤄지고 있다.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각지에 적지 않은 단골이 확보돼 있어 구이용은 물론 국거리, 곰거리, 심지어 우족 주문까지 들어오는 것을 보면 한우명가의 명성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지좌동의 학교
    
성의고등학교
지좌동 621번지에 위치한 성의고등학교는 1901년 8월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에 의해 성의학교로 개교돼 1911년 2월 성의학교 여자부가 병설되고 1947년 4월 1일 보통과정의 사립 성의학교가 중등과정과 속성과정의 성의학원으로 변경됐다. 1949년 3월 10일 성의여자초급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0년 1월 31일 성의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됨과 아울러 남녀 병설교로 인가를 받았다. 1952년 3월 14일 남자부 6학급, 여자부 3학급의 성의상업고등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1955년 10월 1일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해 근무한 것도 특기할만한 사항일 듯. 1970년 3월 1일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가 평화동에 개교되면서 여자부가 분리되고 1985년 3월 1일 성의종합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된데 이어 1986년 10월 12일 성의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61회에 걸쳐 1만7천570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문성중학교
지좌동 601번지에 위치한 문성중학교는 1968년 4월 10일 학교법인 제일학원 설립 인가를 받고 그해 12월 3일 문성중학교로 남 1학급, 여 1학급, 전체 6학급 인가를 받아 1969년 3월 3일 개교됐다. 1971년 남 4학급으로 학칙이 변경된데 이어 1992년 3월 1일 남 5학급으로 학칙이 변경됨으로 남녀공학이 끝나고 남자학교가 된 문성중학교는 2015년 현재 제44회에 걸쳐 8천523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성의중학교
지좌동 677번지에 위치한 성의중학교는 성의고등학교와 같은 재단 산하 학교로 1901년 8월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에 의해 성의학교로 개교됐다. 1911년 2월 여학교가 병설되고 1947년 4월 1일 성의학원으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1949년 3월 10일 성의여자초급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같은 해 5월 1일 개교된데 이어 1950년 1월 31일 성의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됨과 아울러 남녀 병설 학교가 됐다. 1970년 여자부가 분리돼 남자학교로 오늘에 이른 성의중학교는 2015년 현재 제67회에 걸쳐 1만3천161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천동부초등학교
지좌동 730번지에 위치한 김천동부초등학교는 1954년 3월 25일 김천지좌국민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1954년 4월 1일 개교됐다. 1970년 6월 30일 김천동부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된데 이어 1996년 3월 1일 김천동부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56회에 걸쳐 7천475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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