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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약동 묘소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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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잡지 ‘청춘’ 1914년 10월호에 각 분야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100인을 선정, 수록했다. 이때 역사상 가장 청렴결백한 관리로 꼽은 이가 바로 김천 양천동 하로마을 출신의 평정공(平靖公)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선생이다.
노촌 이약동 선생 탄신 600주년을 맞아 선생의 학문과 청백리정신을 선양하고자 벽진이씨 평정공파종중 이만원 회장을 비롯한 지역의 각계인사들로 기념사업회가 구성되고 지난 15일 하로서원에서는 각 기관단체장과 문중, 유림관계자, 전국 각지의 벽진이씨 후손 등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춘향제와 문화제, 백일장이 열렸다.
이날 오전 10시에 봉행된 춘향제에는 개령향교 이상모 전교의 집례에 따라 초헌관에 박보생 시장, 아헌관 임춘식 김산향교 전교, 종헌관 송재두 지례향교 전교가 헌관으로 참여해 분향 헌작했다.
뒤이어 탄신을 축하하는 민요와 전통무용, 한시낭송 등으로 구성된 문화공연이 이어졌고 오후 2시에는 김천문화원 주관으로 관내 초중고등학교 학생 1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노촌 이약동 청백리백일장이 열려 이약동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청백리와 효자로 널리 알려진 선생의 삶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백일장의 글제도 ‘돼지저금통’, ‘절약’, ‘청백리’, ‘효도’ 등으로 구성돼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노촌 이약동 선생은 조선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40여년간 관직에 있으면서도 평생을 청렴결백한 삶으로 일관해 퇴임 후 청백리에 올랐고 고을수령과 관리의 기준을 제시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선생의 올곧은 행적이 소개됐다.
<노촌 이약동 선생의 생애>
1416년(태종16)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해남현령을 역임한 벽진이씨 이덕손(李德孫)과 고흥유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춘경(春卿),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藥師庵)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소년기에 개령현감을 역임한 영남의 대학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생으로 수학했고 강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봉계출신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우했다.
26세 되던 해인 1442년(세종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1년)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헌부감찰(39세), 성균관직장(43세), 청도군수(44세), 선전관(49세), 구성부사(51세), 제주목사(55세), 경상좌도수군절도사(59세), 사간원대사간(62세), 경주부윤(63세), 오위도총부부총관(66세), 호조참판(68세), 전라도관찰사(71세), 이조참판(72세), 개성유수(74세), 지중추부사(75세)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주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평정공은 성정이 부드럽고 인자해 지방관 재임 시 가는 곳마다 칭송이 따랐는데 특히 1470년 제주목사로 도임한 직후 매년 2월에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산신제로 인해 백성들이 동사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제단을 산 아래로 옮기게 한 일은 지금까지도 도민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제주도 역사서인 ‘탐라지(耽羅志)’에 이르기를 “선생이 일찍이 목사가 돼 귤 재배를 장려함으로 도내에 인애의 유풍이 있었다. 이임할 때 관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관아에 남겨두고 말을 타고 나섰다가 성문에 이르러 비로소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문 위에 걸어 놓았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채찍이 떨어졌다. 고을 사람들이 그 자취를 그려서 사모함을 부치었다.
또 바다를 건널 때 배가 바다 가운데 이르자 홀연히 기울어지며 휘돌아서 위태하게 됐다. 선생이 엄숙하게 말하길 나의 걸음에 사사로움이 있어 신명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침이 있게 하는가? 했다. 이때에 이르러 일행이 아뢰길 고을 사람들이 선생에게 전하라고 갑옷 한 벌을 일행에게 맡기며 육지에 당도하면 전하려고 했으나 여기에 이르러 귀신이 선생의 지조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이러한 이변이 있게 됐다고 하니 선생이 즉시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이에 파도가 그치며 배가 나아갔다. 사람들은 그곳을 투갑연(投鉀淵)이라 했으며 고을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춘추로 향사를 지냈는데 지금도 폐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약동이 76세에 향리인 하로마을로 낙향할 때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는데 가난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손들에게 시(詩)를 남겨 교훈으로 삼게 했다.
家貧無物得支分 내 살림 가난해 나눠 전할 것이 없고
惟有簞瓢盧瓦盆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
珠玉滿隨手散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서 욕이 되거늘
不如淸白付兒孫 차라리 청백으로 너희에게 전함만 못하리
1493년(성종13년) 78세를 일기로 공이 졸하자 성종(成宗)은 예관으로 동부승지 이자근(李自建)을 보내어 제문을 내리고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