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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종합 종합일반

비운의 왕비 인현왕후 되살리다

권숙월 기자 입력 2017.05.08 21:08 수정 2017.05.08 09:08

은둔처인 청암사에서 인현왕후 복위의식 재현

ⓒ 김천신문
  청암사에서 인현왕후(仁顯王后) 복귀의식이 재현돼 각계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지난 7일 인현왕후가 머물던 극락전에서 열린 복위의례는 청암사가 문화재청과 경상북도, 김천시의 지원을 받아 재현한 행사. 왕명으로 교지를 전달하러 온 예관이 보광전에서 기도 중인 인현왕후에게 교지를 낭독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소복을 벗고 왕후의 복색을 갖춘 인현왕후가 풍물패의 축하와 가마에 묶인 흰 천을 잡고 참가자들이 뒤따르며 복위된 왕후를 배웅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김천문화원의 자문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증산면장이 왕명을 전달하는 관리역을 맡고 증산면농악대가 풍물공연을, 주민들과 지역대학 학생들이 역할을 나눠 맡는 등 사찰과 주민이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인현왕후는 조선 제19대 숙종(肅宗)의 계비(繼妃)로 1667년(현종 8년) 여양부원군 여흥민씨 민유중(閔維重)과 은진송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현왕후의 외할아버지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은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서인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고 아버지 민유중, 오빠 민진후 등 일가의 대부분이 송시열의 제자로 인현왕후의 가문은 서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다.

1680년(숙종 6년) 인경왕후가 죽고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송시열의 추천으로 1681년(숙종 7년) 5월 2일 자신보다 여섯 살 많은 숙종과 가례를 올리고 국모가 됐다.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1688년(숙종 14년) 숙원장씨(淑媛張氏)가 왕자 윤(昀)을 낳으면서 갈등이 심해졌다.

1689년(숙종 15년) 숙종이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려하자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극렬 반대하면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이어지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숙원장씨는 희빈(禧嬪)이 됐다. 인현왕후는 남인들의 주장으로 1689년 5월 2일 폐위돼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후 5년간 사가(私家)생활 중 약 3년간 청암사 등에 은거했다.

1694년(숙종 20년) 폐비복위운동을 계기로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 다시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4월 12일 왕비로 복위됐다. 1701년(숙종 27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다 36세를 일기로 죽어 경기도 고양의 명릉(明陵)에 묻혔다.
ⓒ 김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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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와 청암사의 인연

장희빈의 모함과 인현왕후를 후원하며 왕권을 위협하는 서인세력의 권력비대화를 막고자하는 숙종의 정치적 이해가 작용한 가운데 인현왕후는 1689년(숙종 15년) 서인으로 강등돼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남인세력의 감시와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탄압이 도를 더해가던 중 1692년(숙종 18년) 5월 안국동 인현왕후의 사가(私家)에 도둑까지 들자 집을 떠나 인적이 드문 첩첩산중 수도산 청암사로 피신해 3년간 은거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인현왕후의 어머니 은진송씨부인의 외가인 상주(尙州)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물심양면으로 지원이 가능한 청암사에 머무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암사에서는 외부로부터 인현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법당 맞은편에 사대부가 양식의 극락전과 남별당(백화당)을 신축하는 등 극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 42수관세음보살을 모신 보광전을 지어 복위기도처로 제공했다. 인현왕후는 상주 외가에서 보내준 시녀 한명을 데리고 살면서 기도를 드리거나 수도산 곳곳을 다니며 시문을 짓는 것으로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그때 인현왕후가 주로 다녔던 길이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연결되는 현재의 “인현왕후 길”이라고 전해진다. 1694년(숙종 20년) 숙종이 남인세력을 몰아낸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복위된 후 청암사에 보낸 친필 언문편지에서 “내가 큰스님의 영험한 기도덕분으로 복권되었다”라며 수도산을 사찰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훗날 극락전을 중창할 때 대들보에서 발견된 ‘시주록(施主錄)’에는 궁중상궁 26인의 이름이 올라있어 인현왕후로부터 시작된 청암사와 궁중여인들과의 인연은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1900년대 초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던 최송설당에까지 이어졌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인 ‘마음의 고향’(1949년)이 청암사에서 촬영된 배경에 인현왕후와 청암사의 이러한 드라마틱한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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