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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종합 종합일반

광복 72주년

권숙월 기자 입력 2017.08.16 13:23 수정 2017.08.16 01:23

“김천지역에도 독립운동의 불길 활활 타올랐다”
독립유공 포상자 56명의 눈물겨운 투쟁사 재조명 돼야!

↑↑ 편강렬 의사
ⓒ 김천신문
조국이 일제의 식민통치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도 올해로 72주년을 맞았다.
과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결과물로 우리가 독립한 것으로 인식해온 경향이 많았으나 최근 대한민국의 독립은 외부환경의 변화에 따른 일방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선조들의 헌신적인 항일독립운동의 결과물이라는 의식의 변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김천지역에서도 다른 지역 못지않은 치열한 저항운동이 펼쳐졌고 56명의 독립운동 관련 유공 포상자를 배출했던 것이다. 광복 72주년을 맞아 만주와 김천에서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다 순절한 편강렬의사의 삶과 활약상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조국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는 기회로 삼고자한다.

편강렬(片康烈) 선생은 절강편씨로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과 오청계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며 할아버지대에 황해도 연백으로 이주했다. 선생은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片相薰)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토왜복수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선생은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대진소(13道 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했다. 이때 선생은 중군장 허위(許蔿)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웠으나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1914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선대의 고향인 다남리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서당을 개설하고 어모면과 개령면, 감문면 청소년들을 모아 강학하고 삼성암에서 무술을 연마시켰다.

3·1운동 이후 선생은 동생인 덕렬(德烈)을 상해의 임시정부에 파견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황해도 안악에서 최명식(崔明植), 간병제(簡秉濟) 등과 군사주비단(軍事籌備)을 조직해 안악군 대표를 맡았다. 군사주비단은 군립군의 국내 진입 시 원조를 목표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밀정의 밀고로 이 사실이 일경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황해도 경찰부에서는 각 군에 비상경계망을 내리고 검거에 착수했으며 이때 선생도 붙잡혀서 1919년 9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출옥한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중국으로 망명해 1923년 10월경 산해관(山海關)에서 강진지(姜震之), 양기탁(梁起鐸), 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됐다. 의성단은 광활한 만주를 무대로 열과 성과 담력으로 시종일관 하면서 민족운동사상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의성단은 주로 장춘선(長春線) 공주령(公主嶺)으로부터 장춘에 이르는 철도 연선의 양측 200여리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250여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장차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에 주력했다.

1924년 선생은 단원들과 함께 장춘성 내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다.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명을 살상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대낮에 봉천(현재의 심양) 시내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해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본부로 돌아오기도 했다. 8월에는 부하 10여명을 거느리고 전가전(傳家甸)으로 가서 군자금 400~500원을 모집하고 하얼빈으로 갔다. 이곳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統一會)를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미리 탐지한 일경이 비상소집 돼 불행하게도 포위를 당했으며 장시간의 총격전 끝에 마침내 일경에게 체포됐다.

1924년 8월 22일 신의주로 압송된 선생은 1925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이 확정됐다. 2년여를 신의주 감옥에서 고문과 옥고로 시달린 선생은 피골이 상접해 죽음에 직면하게 됐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선생은 “죽어도 왜놈병원에서는 치료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1929년 1월 16일 선생은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일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남산공원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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