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김창겸 교수가 ‘신라문화’ 60호(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2)에 게재한 것을 저자와 합의에 의하여.각주와 참고문헌 등은 생략하고 재편집하여 수록합니다. <편집자>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개령현 고적(古蹟)조에 “김효왕릉은 현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김효왕릉이라고 한다.”라 했고, 동사강목 제2상 신해년(신라 조분왕 2년)조에 “(개령)현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으며, 속칭 감문 김효왕릉이라 전한다.”라 했으며, 대동지지 개령현 능묘에 “김효왕릉은 북쪽으로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김효왕릉이다.”라고 한 기록들이 보인다. 현재도 김천지역에서는 김효왕릉을 감문국 관련 유적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금산군, 금산현 별칭인‘금릉’을 이 김효왕릉에서 유래했다는 억측을 만들어 유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연구자들은 김효왕릉이 감문국왕 무덤이라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2018년에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이것이 외형적으로 고분의 분구 형태를 보이지만 매장 주체부가 조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분 분구의 조성 시 수반되는 인위적 절토 및 정지 그리고 성토의 특징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 정황 등으로 보아 고분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김효양은 죽은 뒤, 785년에 아들 김경신이 즉위하여 그를 명덕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이것은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가는 동안은 지속적으로 불린 공식 호칭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멸망한 뒤 후대인들은 신라왕조에 실제 재위한 국왕 중에는 명덕대왕이 없었기에, 직접 그의 이름을 사용해 김효양대왕 또는 김효양왕으로 불렀을 것이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 현지에서는 발음상 수월성으로 축약되어‘김효양’으로 표기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왜 이 지역에 김효양과 관련한 무덤이 전해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웃에 있는 갈항사와 연계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탑기에서 보듯이, 갈항사는 원성왕의 어머니 조문황태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갈항사는 소문황태후의 남편인 김효양과도 관련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효양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기 위해 무장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듯이, 그는 사찰 건립에 관심이 컸고, 김경신 가문은 무장사·갈항사·영묘사·숭복사 등 여러 사찰과 연계하여 상당한 세력을 부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조문황태후의 외숙인 김원량은 재산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를 창건하였으며, 나중에 속세를 벗어났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김효양 가문은 군사적 성격을 가진 원찰 무장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과 연계하였고, 이들 사찰을 경영할 수 있는 상당한 경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보겠다.
조문황태후 남매는 경주에서 멀리 벗어난 개령군에 있는 갈항사를 중창하였을까? 아마도 소문황태후의 남편, 즉 김경신 아버지인 김효양과의 관련이 작용한 것 같다. 당시 김효양은 중앙에서 고위직을 갖지 못하고 지방관에 임명되어 개령군에 내려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승전이 692년에 당에서 귀국한 이후 신라 내에서 당시 의상계와 별도로 문도를 육성하며 화엄사상을 가르쳤으나, 승전의 가르침이 당시 불교계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수도에서 떨어진 지방에서, 즉 당시 불교계 주변부에서 활동하였기에 이곳에 사찰을 개창했을 것이다.
이 사찰에 주목한 김효양과 소문태후는 언적을 불러 주지케 하고, 원성왕 외가의 경제력을 동원하여 개령군 일대를 토지를 기진하여, 이곳에 석불좌상을 조성해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는 원찰로 삼았던 것이다. 이로써 갈항사가 소재하는 개령군 지역은 원성왕 외가의 경제적 연고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경신이 즉위하기 이전에 김효양은 사망했고 조문황태후는 갈항사를 남편 김효양을 추복하는 원찰로 삼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인근에 김효양과 연계된 유적이 만들어졌고, 이것을 후대에 김효양왕릉이라 하다가 김효왕릉으로 축약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해 본다.
Ⅲ. 신라 원성왕가의 황실적 위상
1. ‘경신대왕’과 황제
지금부터는 갈항사석탑기에 표현된 ‘경신대왕’과 ‘조문황태후’라는 호칭을 통해서 원성왕가가 황제와 황실적 위상에 있었음을 서술하도록 한다. 여기의 ‘경신대왕’은 신라 원성왕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경신대왕은 승하한 뒤에 원성왕이란 시호를 받기 이전, 즉 재위기의 존칭이다.
원성왕의 재위시 존칭‘경신대왕’에서, 대왕은 황제에 대비되는 칭호로 사용한 것으로 보겠다. 한국사에서 삼국시대 고구려·백제는 물론 신라 군주들은 국내적으로 자신의 지위와 입장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나타낼 필요를 느끼면서 황제나 천자 또는 일본의 천황과 같은 직접적 표현은 쓰지 않았으나 의미상으로는 같은 내용의 “대왕(태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
그런데 신라시대 사용된 대왕은 크게 구분하면, 하나는 실제 재위한 군주의 대왕과 또 하나는 왕의 선대 중 후대에 추봉된 대왕이다. 당시 재위 중인 국왕을 지칭할 때 금주대왕·국주대왕이라고 한 것도 있지만, 융기대왕, 천운대왕, 경신대왕, 경응대왕처럼 생전의 휘(諱)에다 대왕을 더한 호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