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김창겸 교수가 ‘신라문화’ 60호(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2)에 게재한 것을 저자와 합의에 의하여.각주와 참고문헌 등은 생략하고 재편집하여 수록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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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처음에는 왕비로 하였다가 뒤에 왕후로 책봉하였다. 이것은 신라시대의 왕후가 왕비보다 지위가 높은 황제국의 제도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결국 신라 국왕은 황제에 해당하고, 정식 처는 황후의 칭호와 지위를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갈항사석탑기에서는 경신대왕의 어머니를 왕태후·태후보다는 “황태후”라고 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어머니는 태후라 하고 제후의 어머니는 대비라 하는데, 삼국사기에서 신라 하대 왕의 어머니를 ‘(왕)태후’라 한 경우는 허다하며, 나아가 황태후라고 지칭한 경우까지 있었다.
이에 의하면 원성왕은 황제였고, 어머니는 황태후였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실재 재위치는 않았으나 대왕으로 추봉되어 종묘에 모셔지는 등, 황제국의 제도에서 황제적 지위와 황족의식을 표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성왕대 신라가 황제국을 표방하였음은 아들을 태자로 책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황제국에서는 왕위계승예정자를 태자라 하고, 제후국에서는 세자라 호칭한다. 원성왕은 즉위 직후인 785년(원성왕 1)에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죽음에, 792년(원성왕 8) 8월 둘째 아들 의영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의영마저 죽음에 부득이 795년(원성왕 11) 정월에 적손 준응(소성왕)을 또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사실 신라에서는 왕위계승자를 (왕)태자라고 하였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원성왕 재위시 신라는 황제국체제였던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원성왕가 왕실이 사용한 특수용어들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원성왕의 장례를 인산이라 하였다. 인산은 제왕과 그 비의 장례를 말한다.
이상에서 원성왕이 비록 천자나 황제를 직접 칭하지는 않았지만 동등한 의미를 가진 대왕을 사용하였고, 그의 정처는 황후, 어머니는 황태후, 아들은 태자라고 호칭했으며, 또 그의 장례를 인산이라 하여 황제를 상징하는 용어를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갈항사석탑기의 “경신대왕”과 “조문황태후”를 통해서, 원성왕은 황제였고, 원성왕가는 황실의 위상을 가졌으며, 신라는 황제국을 표방했던 것을 확인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갈항사석탑기에 대한 기존의 판독과 해석을 종합 정리한 후에, 원성왕 외가가 갈항사에 석탑을 건립한 배경과 상호 관계를 검토하고, 그리고 석탑에 표기된 원성왕과 가족의 호칭을 분석하여 원성왕과 왕실의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갈항사는 신라시대 승전이 개창하여 19세기 중엽에 김정호의『대동지지』편찬시까지 존속한 듯하다. 또 석탑기의 작성은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황태후 가문이 석탑을 건립하고 갈항사를 중창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특히, 이 지역에 소재하는 이른바 김효왕릉은 갈항사와 연계된 유적이며, 그 명칭의 유래는 아마 원성왕의 아버지 김효양과 관련성이 있을 듯하다. 또 갈항사석탑기의 “경신대왕”과 “조문황태후”이란 용어를 통해서 원성왕대 신라는 황제국을 표방했으며, 원성왕가는 외연상 황실의 위상을 가졌던 것을 밝혔다.
한편 갈항사지 동·서 3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석탑 중에서 유일하게 건립 시기를 밝힌 명문이 있고, 현재는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 장식만 없어졌지만 비교적 전체적인 모습이 온전하게 잘 남아있어, 비록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 층 기단 가운데 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서, 당시의 석탑 양식이 잘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갈항사지 동·서 3층 석탑은 건립의 연대와 주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석탑으로, 특히 동탑 기단부에 새겨진 석탑기가 새겨져 있기에 한국 불교사, 미술사는 물론 신라 역사와 금석학과 언어학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김천지역은 갈항사석탑의 반환운동을 전개했다. 1995년 문공부에 반환요청 서신을 보냈으나, 그해 12월 1일자로 문공부로부터 반환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2003년에 김천지역 사회단체가 중심이 되어 갈항사 3층석탑의 반환을 위해 범시민운동으로 캠페인을 전개하였고, 김천시는 같은 해 말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문화재 반환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은 이것은 국가 소유 문화재이기 때문에 반환할 수 없다는 답변을 하면서, 하나의 대안으로 재현품을 제작해 원소재지에 전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의 이러한 답변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그것은 현재 소유자로서의 생각과 태도에 불과하고, 상대적으로 김천시와 시민들의 피탈적인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갈항사지는 폐사지로 전락했다, 지금은 동·서 3층 석탑이 있었던 곳엔 표지석만 있을 뿐이고, 당시 조영된 석조여래좌상(보물제245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우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속히 동·서 3층 석탑이 돌아와 본디 제 모습을 갖추어, 이것들을 건립한 발원자들의 바램대로 본연의 구실과 기능을 하여야 한다.
아울러 김천시 남면사무소에 보관중인 갈항사신장상도 돌아와야 하겠다. 그리하여 일찍이 고유섭이 ‘단려(端麗)하고 아순(雅淳), 가장 문아(文雅)한 탑의 하나’라고 평(評)한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