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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너와 함께라면 매일 봄날이련만

전영수 기자 입력 2023.03.31 11:07 수정 2023.03.31 11:07

빛이 있는 곳에는 색깔이 있다 - 연화지의 봄밤

어릴 적부터 친분을 쌓아오던 벗의 아버지가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어제 긴 이별을 한 탓에 그의 가슴에 생채기가 쌓여가던 날 저녁, 가족과 함께 벚꽃, 개나리 등 봄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 연화지(鳶嘩池)를 찾았다.



테니슨(A. Tennyson)은 “마음에 아물지 않은 상처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가슴 깊이 새겨진 사랑이 설령 이별을 맞더라도 아예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했지만, ‘영원히’란 시간의 길이에 이별은 결국 아픔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곁에 있어서 좋아죽겠다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옆에 없어서 애닳아 하는 것이 사랑일까. 사랑은 그리움의 깊이를 나타내기에, Bobby의 ‘벚꽃’처럼, “너와 함께라면 매일 봄날이련만, 내게 있어 너는 하룻밤에 쓸려간 낭만이었기에 여운보다 추억이 자리하겠지.”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모든 것은 삶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구태여 고민하지 말자. 좋으면 ‘그냥’ 좋은 거다, ‘그냥’이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화지의 벚꽃 봄은 언제 가는지도 모르게 계절의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지만, 봄날의 생명과 피어나는 선명한 색깔은 그것의 값을 아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느낌을 선물한다.



여린 손처럼 올라오는 새순들. 그 연둣빛은 초록으로 가는 과정의 빛깔이다. 연둣빛을 미완성인 빛깔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무엇을 보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미묘한 맛이 되고 멋이 되는 색이다. 나무가 색깔이 바뀌는 것은 멋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의 전략이라는 것도 잊진 말아야 한다.

황혼, 그 후에 다가온 어둠! 사방에 어둠이 깔리면 연화지엔 형형색색의 조명등이 켜지고 물 위에는 빛의 향연이 전개된다. 광학현상에서 여러 빛이 동시에 물질을 통과해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빛의 중첩원리’가 성립한다.



파동도 없이 잔잔한 연화지에 비춰진 벚꽃 무리와 흔들림 없는 봉황대의 모습. 어느 것이 실제(實際)인지, 어느 것이 물에 비춰진 모습인지 알 수가 없지만, 곧으며 지나치지 않아 오히려 기품 있게 투영된 연화지의 야경은 몽환적이다.

순간 생각이 어디론가 달아나서 사고 자체가 정지된 듯했다. 색을 본다기보다 빛을 느낀다는 기분이 들었다. 색깔이 압도하지도, 빨아들이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빛이 색(色)의 형태로 흘러나와 스며드는 촉각적 느낌이 들었다.



또한 그 색은 외부(外部)에 원천(源泉)을 둔 빛으로 생겨나서, 인위적으로 투사되는 환영(幻影)주의적 색이 아니라, 일상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는 일상의 빛으로 빚어진 “부드러운 발광”이었다.

연화지에 흡수된 빛이 반사되어 나오면서, 색이 산란(散亂)되어 스며들고 깊이가 생긴다. 그러나 색은 기만적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를 않는다. 지각된 색과 인지된 색의 사이에는 간극(間隙)이 존재한다. 그래서 탄성이 나온다.



오늘 이 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限)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가 이미 밟고 지나간 길에 초대받고 있을지라도, 봄밤은 알고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연화지의 이 밤에 사랑에 빠지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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