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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김영호 / 화양연화 대표 / 전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 교장
비가 잠시 그친 우수(雨水)의 오후 3시 30분에 작은 쪽문으로 교문을 들어서서 50미터 쯤 가니 시계탑이 있다. 1983년에 6회 졸업생이 기증한 것이라는 표시가 있다. 시간은 1시 25분에 고정되어 있다. 시계탑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도 운동장이다. 오른쪽으로는 가장자리를 따라 주차장으로 가는 포장도로가 있다. 오전에 내린 비로 질퍽한 운동장에는 풀라타너스 8그루와 참나무 2그루가 마냥 서 있다. 6학년 때도 참 커보였던 나무는 반백년 세월의 무게도 더하고 있다. 2층인 교사(校舍)도 예전 그대로이다. 2층 서편에서 두 번째 교실이 6학년 1반 교실이다. 교사 뒤쪽에는 남자 아이들이 오줌을 멀리 올리기 시합을 하던 변소(便所) 건물도 있다. 잠시 비가 그친 오후에 새소리조차 끊어진 대신초등학교의 풍경이다. 대신초등학교의 바로 앞에서 김천과 구미를 잇는 지방도로가 있다. 그 앞에는 경부선의 대신역이 있다. 김천고등학교와 대구교육대학교를 나닐 때 통학을 하던 역이기도 하다. 지금은 폐역이 되고 대신역이라는 상호의 카페가 대신역의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학교 뒤쪽으로는 새롭게 왕복 4차선으로 확장된 김천과 구미를 잇는 지방도로가 있다. 그 뒤로는 1970년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가 있다. 개통식을 하던 날 전교생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었던 기억도 있다. 대신초등학교는 아포읍의 대신 1, 2, 3리와 봉산 1, 2, 3리의 6개 마을과 남면 초곡 1, 2리 2개 마을을 합쳐서 8개 마을에서 600여 명 이상의 학생들이 다녔다. 1960년대 후반의 입학식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나들이 같이 다니기도 했지만 특별한 기억은 없다. <김영호>라는 이름만 겨우 쓰고 입학을 해서 한글을 읽고 쓰는 데 힘이 들었다.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통지표를 보면 1, 2학년 때는 5단 척도인 <수>, <우>, <미>, <양> <가> 중에서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가>와 <양>이 대부분이다. 1학년 때 여자 담임선생님은 굉장히 무서웠다. 글씨를 몰라서 더 힘이 들기도 했다. 같은 마을의 친구는 선생님께 혼나는 것이 무서워서 일주일 정도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1년 뒤에 다시 입학을 하기도 했다. 2학년 때 고영희 담임선생님은 천사 같은 분이었다. 3월 초에 모든 아이들이 커다란 종이에 삐뚤삐뚤한 글자를 조금씩 써서 칠판 옆에 붙였다.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이었는데 학생주도형 환경정리를 한 것이다. 여전히 글자를 다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선생님께 혼이 난 기억은 없다. 3학년 때는 여자 담임선생님이다. 한글을 완전히 깨우치니 공부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4학년 때도 3학년 담임선생님이 반을 맡았다. 시험 치는 날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특히 사회 과목에 자신이 있었다. 4학년 때는 어떤 시험을 치더라도 최고점이 남자면 여자가 청소를 하고, 최고점이 여자면 남자가 청소를 하게 했다. 사회 시험을 치는 날이면 청소는 여자들 몫이었다. 시험에도 출제된 대구의 사과, 청주의 담배, 강화도의 화문석 등을 달달 외우던 기억이 새롭다.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아내의 이름과 같다. 6학년 때 처음으로 남자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1반은 김명진 선생님, 2반은 남균 선생님이다.
영호의 마을인 대신 3리 시내이에서 대신초등학교까지는 2킬로미터 정도를 걷는 학교 가는 길이다. 김천에서 구미를 왕복하는 합승이라는 작은 버스가 구름 같은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가곤 했다. 6학년 때 마을의 남자 친구 7명 모두가 6학년 1반이 되었다. 우리 마을의 여자 동기들은 13명인데 절반이 같은 반이었던 것 같다. 6학년은 2반까지 있었는데 한 반에 50명이 넘었다. 남자 7명은 학교를 갈 때는 모두가 함께 신작로를 걸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매일같이 축구를 하는 영호만 다른 동네의 친구들과 겨울바람이 휑하니 지나가는 신작로를 걸었다.
겨울이 시작되면 겨울방학을 할 때까지 7명의 남자 동기들은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에 갔다. 가끔 도시락을 싸서 가기도 했지만 반찬 걱정, 김치 국물 등이 책가방에 흐르는 등의 문제도 있었다. 까까머리 소년 7명은 4교시를 마치자마자 마을을 향해서 뛰었다. 우리나라 지도 같이 생긴 마을의 남부지방에 사는 친구들부터 차례대로 집으로 들어갔다. 영호의 집은 개마고원 부근이다. 허겁지겁 점심을 먹은 7명은 다시 마을 입구에 모여서 학교로 달렸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달려서 학교에 도착하면 운동장은 점심시간을 즐기는 아이들로 북새통이다. 운동장을 천천히 걸으면서 가쁜 숨이 진정될 때면 교무실 앞에 걸린 쇠종이 5교시를 알렸다.
올해는 3월 4일이 초등학교 시업식이자 입학식이다. 예전에는 시업식과 입학식은 2~3일의 틈이 있었다. 주 5일 수업이 정착되면서 수업일수 등의 문제로 입학식과 시업식은 같은 날짜에 하고 있다. 대신초등학교는 2015년에 폐교가 되었다. 다니던 학생들은 아포초등학교와 김천 혁신도시의 율곡초등학교로 갔다. 영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우리 마을에만 100여 가구에 120명 이상의 초등학생이 있었다. 지금 고향 마을은 84가구에 초등학생이 단 한 명도 없다. 중고등학생도 없는 것 같다. 인구절벽(人口絶壁)의 시대라고 한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2024년 2월 19일 월요일 우수(雨水)에 대신초등학교를 둘러보는 내내 상념에 잠기다가 잠시 추억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