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에서 최초로 합창음악을 시작한 사람은 테너 박태원이다. 1917년 7월 제일교회성가대를 조직하면서부터다. 박태원의 동생 박태준, 현제명, 김문배 등이 그 전통을 이어왔다. 8·15 해방을 전후해 고태국, 김진균 6·25 이후엔 김경우, 신상조, 안종배, 임성길(사진) 등이 대구의 합창문화를 일궈왔다.
이 가운데 임성길은 1926년 6월 10일 김천시 남산동 36-29번지에서 아버지 임대현, 어머니 이덕님 슬하로 태어난 사람이다. 김천국민학교를 거쳐 김천고보에 재학할 때에 매주 월요일마다 김천으로 올라와 출강하는 박태준 선생으로부터 음악을 익혔다(김천고보 제9회 졸업). 서울에서 고려합창단, 대한합창단, 새한합창단 활동을 하며 음악 수련을 하고 1952년부터 시온중학교 음악과에 재직했다.
임성길은 원래 시인이었다. 김천시문학구락부가 동인지 『오동』을 창간할(1947. 8.) 때 편집과 재정을 담당하면서 자유시 “회한” “밤”을 발표했다. 그해 자유시 “자화상”, 이듬해에 “무덤”이 『예술조선』지 신인상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그는 김천에서 최초로 중앙문단에 오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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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길 시인, 합창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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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김천극장에서 김천고보 음악교사 정용문의 작곡발표회가 있었다(1948. 10.). 임성길은,김천여중 음악과를 떠나 서울레코드사에 재직하고 있는 나화랑(본명 조광환)과 각각 바리톤과 테너로서 독창 및 남성2중창을 했다. 그는 오상익 등과 남성4중창단을 조직해 공연하면서 YMCA합창단 혼성합창을 지휘했다. 『세계민요전집』을 제작해 각급학교에 보급, 아동음악경연대회를 전개하는 등 이 지방 음악문화 활성화를 도모했다.
임성길은 6·25가 발발하자 대구로 내려가 앞서 소개한 음악인들과 함께 음악인으로 변신했다. 대구 중앙방송국 4중창단 활동을 하다가, 국방부 정훈합창단이 대구 문화극장에서 한국교향악단과 제2회 연주회를 할 때부터 본격적으로 합창 지휘를 했다. 이때 바그너의 “탄호이저” 중 ‘축복의 행진곡’을 연주한 기록이 보인다. 이 국방부정훈합창단이 해단되자 임성길은 군목합창단으로 재창단, 대구의 여러 교회에서 연주와 군 위문공연의 지휘를 도맡아 하며 민형식, 라경관 등과 함께 대구의 합창문화를 일궈냈다.
종전이 되어 육군본부가 서울로 올라가며 군목합창단이 자연 해산되자 임성길은 대구코오러스로 재창단(단장 최성환, 1954.), 대구시로부터 “대구시민의 노래”와 운영비를 지원받으며 합창을 이끌어왔다. 이즈음 대구 아동문학가협회가 발간한 『동요작곡집』(1957)에 자신의 동요 “돌날”(여영택 작사), “가 보았으면”(김진태 작사), “봄맞이”(윤혜승 작사) “병아리”(서영남 작사) 등 4곡을 발표했다. 그는 대구코오러스는 물론 대구교향악협회(회장 이효상, 1957.), 대구방송합창단 등에서 지휘를 전담하며 대구 합창문화를 선도한 지휘자였다.
임성길은 대구 계성고교 음악과에 오래(1954∼1991) 재직하였다. 대구 장로회성가단을 창설(1984), 초대 상임지휘자, 대구음악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구 합창음악의 꽃밭을 일궈냈다. 지휘자 임성길은 대구가 전국 어느 도시보다 합창문화를 왕성히 꽃피우게 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 음악인의 한 사람이라고 대구음악사는 전한다. 2006년 11월 21일 대구에서 별세했다.
민경탁 본지 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