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은 매년 6월25일 김천관내 6․25참전용사 가정을 방문한다.
올해도 세 분의 6․25참전용사 가정을 선정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은 성금과 선물을 전달하는 한편 당시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듣고 투철한 교육관과 호국정신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다.
김천예고 학생들은 올해도 각 학년별로 한 가정씩 방문해 참전용사 분들을 위로해 드리고 준비해간 성금과 선물을 전달했다.
다음은 각 학년별로 쓴 위문소감을 정리해본 것이다.
1학년- 개령면 김순만 6․25참전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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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만 참전용사 댁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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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면에 거주하는 6․25참전용사 김순만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생활하고 계시는데 얼마 전 할아버지께서는 대장암 수술을 받아 몸이 많이 불편한 상태였지만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무척 외로워 보였고 우리에게 6․25전쟁 참전 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잘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수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할아버지께서도 두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 그때의 참혹함을 우리에게 얼마나 말씀하시고 싶으셨는지 열심히 설명하시는 모습 속에 우리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목숨이 위태로운 것도 두려웠지만 배고픔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아 오래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다음에 꼭 저희 학교에 방문하셔서 좋은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는 말씀드리고 돌아왔습니다.
6․25 참전용사 가정을 방문, 위로하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지금 현재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김순만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 계셨기에 우리나라가 현재 잘 살고 있다는 것,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며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2학년- 양천동 김인철 6․25참전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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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 참전용사 댁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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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세 고령으로 할머니와 함께 단칸방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김인철 참전용사의 생활형편은 어려운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21세 젊은 나이에 군에 입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주도 21사단에서 훈련을 받으셨고 그 뒤 대구로 건너와 6․25전쟁에 참전하셨습니다.
전투에서 총상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돼 수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해서는 다시 참전해 약 2년 정도 군대 생활을 하셨습니다.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하고 계신 김인철 할아버지께서는 바깥활동을 활발히 하실 정도로 연세에 비해서는 건강한 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조각에 소질이 있으셔서 오랫동안 조각을 하셨고 기능대회에서 조각부문 동상을 수상하실 정도로 실력이 있었는데 서랍장, 선반, 물레방아 등을 만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신화 교장선생님의 별장에 물레방아도 직접 만드셨다”는 할아버지께서는 “기회가 되면 학생들에게도 작품을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며 방문해 준데 대해 고마워 하셨습니다.
3학년- 교동 김만영 6․25참전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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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영 참전용사 댁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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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제64주년 6․25전쟁 기념식 행사를 하고 학생회 간부들과 충혼탑을 찾아가 헌화하고 묵념을 했습니다.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힘쓰신 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어 6․25참전용사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교동에 계시는 김만영 참전용사로 87세의 고령이었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아주 건강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3개월 뒤 24세의 나이로 입대해 6년간 군복무 후 제대를 하셨습니다.
6․25전쟁 때 3․8선 이북까지 올라가 전투를 하고 무공훈장을 받은 분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전투상황 이야기를 하셨는데 지금 이렇게 행복한 환경에 살면서 불만과 투정을 부렸던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김만영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지금 환경에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열심히 공부하라”는 덕담과 함께 음료수를 나눠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념촬영 후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빛이 서럽게 느껴져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