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231년 신라의 전신인 경주 사로국에 의해 멸망한 비운의 왕국이 있었으니 바로 김천의 감문국이다. 개령면 동부리 감천변을 중심으로 성립돼 수백 년 동안 이 지방을 다스렸던 감문국은 사로국의 대장군 석우로의 말발굽아래 찬란했던 왕국은 사라지고 김천지방은 신라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철저히 파괴되고 잊혀졌던 감문국(甘文國)의 역사가 1781년 지난 2018년 1월 26일 감문국이야기나라조성사업 기공식을 시작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하게 됐으니 곧 김천역사의 뿌리를 다시 찾게 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전망이다.
김천시에서는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과 역사 속의 기록들을 찾아 전시·교육·체험시설을 조성해 감문국과 잊혀진 옛 이야기들과 구전문화의 재현을 통해 다양한 관광컨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지난 2014년부터 백두대간권 종합계획결정고시를 시작으로 줄기차게 이번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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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면 동부리를 비롯해서 감문면 삼성리, 문무리 일대에 156억원(국비 68억, 도비 10억, 시비 77억)을 투입해 2019년까지 역사체험지구와 역사탐방지구, 역사문화전시관, 금효왕릉전시장 등 감문국 관련 시설을 구축할 예정이다.
이번 감문국이야기나라조성사업 기공식을 계기로 높아진 시민들의 감문국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감문국의 실체를 살펴본다.
감문국의 등장과 발전
삼한시대 변한계 12국 가운데 하나로 분류된 감문국은 기원전후로 낙동강과 그 지류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많은 읍락국가 중의 하나로 신석기문화와 단절돼 새로운 청동기문화인이 외부에서 이동해 성립했다기보다는 토착민에 의한 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김천지방의 경우에도 구성면 송죽리 감천변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유물이 대량 출토됐고 같은 감천유역인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서도 동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인 지석묘가 집단으로 발견된 것이 좋은 예이다.
따라서 감문국의 건국주체는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 걸쳐 감천유역에 산발적으로 집거(集居)하던 토착민 집단들이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의 전환기 무렵 상대적으로 유리한 생산기반을 가진 감천 중하류인 개령·감문 일대로 이동해 주변의 읍락을 통합, 흡수해 형성한 대표 읍락국가로 볼 수 있다.
우리 사서에 감문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로 신라조(新羅條)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년 7월조에 “以伊湌昔于老爲大將討破甘文國伊其地爲郡” 즉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된 이래 모든 사료에 감문으로 등장하고 있다.
감문국은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해 비옥한 충적평야지를 기반으로 기원 후 1세기경 성립돼 정치적 성장을 꾀하고 있었으나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전 단계에서 여타 소국에 비해 일찍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사로국 즉 신라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
조선중기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후기의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관련 사료를 종합해 볼 때 감문국의 중심지는 현재의 개령면 동부리 일대로 추정된다. 그 영역은 감문면과 아포읍, 어모면, 조마면까지 미쳤을 것으로 보이며 일부학자들은 선산군 무을면 일대까지를 감문국의 영역으로 보기도 한다.
감문국의 국가규모에 대해서는 특별한 근거는 없으나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진한, 변한의 규모를 “大國四五千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라 한 것이나 중국측 사서로 추정되는 ‘동사(東史)’에 “牙浦叛大發三十夜渡甘川水見漲而退” 즉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건너려했으나 물이 불어나 되돌아 왔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볼 때 당시 감문국의 규모는 600 내지 700가구에 달하고 군사 30인을 대군(大軍)으로 표현할 정도의 국세를 보유한 정도의 소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개령면 동부리와 양천리, 서부리, 감문면 송북리와 오성마을 등에 산재한 유적과 지명 등을 통해서도 감문국의 면모를 짐작 할 수 있다.
감문국의 흔적
친(親)가야, 반(反)신라 정책을 견지하며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던 감문국은 서기231년 신라의 왕족이며 대장군인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토멸된 후 1700여년의 풍상 속에서 대부분의 유물이 멸실되어 온전한 형태의 자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감문국 토벌의 중심인물인 석우로의 흉폭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야사(野史)에 전하는데 감문국을 토벌해 공신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석우로가 왜국(倭國)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에서 술에 취해 사신에게 말하기를 “머지않아 너희나라 임금을 잡아다가 소금 만드는 노예로 삼고 왕비는 밥 짓는 노비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감문국이 석우로의 군사에 의해 얼마나 철저히 파괴됐을 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각종유적과 지명, 전설 등을 통해 감문국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궁궐터와 궁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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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산이 감문국의 내성(內城)이었다면 경제적 기반인 감천일대의 농경지와의 중간지점인 동부리와 양천리 일대가 감문국의 중심인 궁궐터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감문국의 궁궐위치에 관하여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嶠南誌)’에는 “柳山北東院傍甘文國時宮闕遺基猶存” 즉 “유산의 북쪽 동원 옆에 감문국시대의 궁궐터가 남아있다”라고 적고 있다.
문헌마다 공통적으로 유산 북쪽과 동원 옆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산은 현재의 유동산(柳東山)을 가리키며 관용숙소였던 동원(東院)은 동부동에서 양천리로 넘어가는 역마고개 인근에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역마고개마루 일대가 궁궐의 중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문국 ‘개령지’에서 궁궐지로 추정한 연당(蓮塘)은 현재도 유동산 아래 선산방면 지방도 옆에 일부가 남아있다.
금효왕릉
감문국 왕릉으로 전해지는 금효왕릉(金孝王陵)은 궁궐지로부터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km떨어진 현재의 감문면 삼성리(오성마을) 930번지 밭 가운데에 봉분높이 6m, 지름15m 크기로 김천지방에 남아있는 최대의 고분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말무덤으로 불려왔는데 여기서 ‘말’은 ‘크다’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보아야하므로 말무덤은 큰 무덤 곧 수장(首將)의 무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효왕릉에 관해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에는 “在縣北二十里有大塚俗傳甘文金孝王陵” 즉 “현의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장릉
장릉(獐陵) 또는 장부인릉으로 불리는 이 고분은 개령면 서부리 웅현(熊峴)도로변의 옛 사자사(獅子寺)터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경작지로 개간돼 정확한 봉분의 형체를 분별할 수 없다.
구전으로 감문국시대의 어느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으며 향지 곳곳에 장릉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獐陵在縣西熊峴里俗稱甘文國時獐婦人陵”(장릉은 현의 서쪽 웅현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길 감문국시대 장부인의 능이라고 한다)이라 적었다.
(자료제공: 김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