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상규 대표의 꿈은 말을 타고 광야를 누비며 가축을 키우는 것이다. 김천초등학교, 김천중학교, 성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주농대 축산과로 진학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꿈은 꿈일 뿐이었다.
축산과를 졸업하고 소를 키웠지만 곧바로 현실에 직면했다. 냄새도 냄새지만 자본금 회전율이 너무 느렸다.
깨끗하고 계획적이며 빠른 자금 회전을 원했던 것과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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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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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업을 결심하고, 규모가 크면서도 깨끗한 농업이 무엇인지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것이 버섯이다.
여상규 대표는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인상이 깊었다는 의미다.
발견을 했으니 실행에 나섰다. 첫 단계는 전국의 유명 버섯 농가를 찾아가는 것이다. 특성을 공부하기 위해 버섯농가에 메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험을 쌓다 보니 버섯농가마다 특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식과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1990년 마침내 버섯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팽이버섯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버섯농가에 팽이버섯을 주로 했다.
여상규 대표의 선택은 팽이버섯을 생산할 수 있는 액체 종균생산이다.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버섯 종균사업을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뭔가가 필요함을 느낀 것이다.
1996년 경남에서 이현욱 박사가 새송이버섯을 연구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직접 찾아가서 실험단계인 새송이 버섯의 데이터를 얻었다.
다음은 연구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니지만 현장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쌓아나갔다. 그 당시 돈으로 수억원이 소요되는 지루하면서도 힘든 나날들이었다.
3년 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새송이버섯 종균 개발에 성공했다.
등장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너도 나도 새송이 버섯에 뛰어 들었다.
2007년에는 미국, 케나다에 수출길을 열었다. 당시에는 중국 버섯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먹지도 못하는 누런 버섯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싱싱하고 탐스러운 새송이 버섯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중국 버섯의 자리를 새송이 버섯이 대신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선별부터 선적 등 수출 과정이 너무 복잡해 지금은 종균을 생산해 농가에 보급하는 일이 주력하고 있다.
“백산에서 개발한 기술이라고 하면 모두가 따라 했습니다. 아무리 극비로 취급해도 한 달이 지나면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고 1년 뒤에는 전국에 기술이 퍼졌습니다. 기술 개발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버섯사업을 부흥시키고 버섯 농가에 혜택이 돌아가니 이해하고 있습니다.”
백산농산은 전국의 새송이버섯 종균기술을 선도하고 있고 종균 가격의기준이 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입니다. 그 중에서도 개발한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경험과 느낌입니다. 기술 중 95%는 전수가 가능합니다. 나머지 5%는 전달이 불가능합니다. 개발자 특유의 감각과 느낌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백산이 지금 자리를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 5%입니다.”
여상규 대표의 사회 환원 방법은 특이하다.
버섯농가를 위해 종균가격을 낮추는 것이 일반적인데 절대로 가격은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에 100g 생산하던 농가가 400g, 500g 생산할 수 있는 종균을 보급한다.
같은 가격에 4배 5배의 수확을 올리니 농가에서는 종균가격의 4~5배 싸게 느껴진다. 그래서 역시 백산농산은 다르다는 말이 돌고 있다.
농가 사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콩, 옥수수 등 곡물을 배합한 버섯 배지를 소 사료로 제공할 생각이다. 사료 파동이 발생했을 당시 너도나도 배지를 받아가 사료로 사용했다. 균류가 들어 있어 등급이 잘 나왔고 성장도 빨랐다.
하지만 지금은 시들해졌다.
수분이 있어 보관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지의 혼합과정이 복잡해 꺼리는 농가가 생겼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건식이다.
장기간 보관할 수 있고 혼합과정이 없어 농가에 유리하다. 하지만 기름값이 많이 들고 시설비도 많이 들어가는 등 비용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 농가에 건식 배지사료를 제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