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소설 송설당”의 연재를 끝내고, 김천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김창겸 조교수가 2020년 김천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 지원으로 저술한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와 신라 원성왕가의 위상”이란 논문을 게재함에 앞서, 갈항사의 잃어버린 궤적을 간략히 더듬어 봤다.
남면 오봉리 갈항사지 |
금오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남면 오봉리 30, 산자락에 한 폐사지(廢寺址)가 있다. 이름하여 갈항사지이다. 통상 폐사지에는 사찰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역사를 가늠할 만한 유물이 있어 옛 시절을 확인할 수 있지만, 갈항사지는 그 흔적이 묘연하다. 현재 과수원으로 바뀐 갈항사 터는 세월에 묻히고 과수원으로 다시금 땅속에 매몰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흔적, 쌍탑도 먼 타향 서울로 가버렸으니, '사지(절터)'라기보다는 그저 '터'라고 함이 마땅할지도 모르겠다.
갈항사는 신라 승려 승전이 692년(효소왕 1년)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작은 절로 개창했다가 758년(경덕왕17)에 중창됐다. 갈항사 삼층석탑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영묘사 언적법사와 조문 황태후, 경신태왕 등이 중창에 관여했다. 경신이 원성왕의 이름이므로 석탑은 원성왕 재위기간인 785년부터 799년 사이에 조성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갈항사라는 표기가 있어 조선중기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기록이 없으므로 폐사됐던 것 같다. 절터에 동.서 삼층석탑 2기가 오랫동안 절터를 지켰다. 한때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은 일본으로 반출될뻔했다가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국보 제99호로 지정돼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있다.
갈항사 삼층 석탑 |
갈항사의 동.서 삼층석탑이 있던 흔적은, 무성한 풀밭 가운데 세워진 작은 비석 두 개로 찾아볼 수가 있다. 자기의 본디 터를 잃고 타의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게 된 갈항사 쌍탑은 고향 김천을 마냥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석가탑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비례미를 가진 갈항사 삼층석탑은, "두 탑은 천보17(758)년 오라비와 언니, 여동생 3인의 업으로 완성했다. 오라비는 경주 영묘사 언적법사이고, 언니는 소문황태후이며, 여동생은 경신태왕 이모이다(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 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 妹者敬信太王妳在也)" 라는 명문이 있어 조성 시기와 누가 탑을 세웠는지를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통일왕조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해, 안정적이며 압도하는 웅장함이 돋보인다. 초층 탑신석 상단 중앙까지는 밑변이 긴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더했고 층간의 높이와 지붕의 비례를 일정하게 체감시켜서 시각적 효과를 보이도록 했다.
통일초기의 안정감과 웅장함은 8세기 중엽에 이르러 하부 정삼각형 구도와 절묘한 체감율이 적용된 신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석탑들이 등장한다.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이런 비례를 가진 석탑들은 경주를 비롯해 지방에도 유행했는데,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이 그 전형이다.
갈항사 석조 석가여래 좌상 |
한편, 절터에는 두 구의 불상이 있는데, 빈 절터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던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전각에 안치돼 있다. 온화하며 세련미가 있는 불상은 둥근 얼굴에 미소를 띠고, 눈, 코, 입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닳아 없어진 코,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석불의 무릎과 손가락은 떨어졌다. 대좌는 불신과 앙련(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새겨진 상대석만 있고, 광배와 하대석은 파괴돼 사라졌다. 깨어지고 손상된 모습을 보니 아마도 고단하고 지난한 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갈항사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
갈항사지에는 노상에 방치돼있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1구가 더 있다. 불신의 상태는 석조여래불보다 안 좋다. 비로자나불의 불두가 사라졌고, 불신도 파괴가 심각하다. 감옥 같은 쇠창살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지만, 그래도 표정은 밝다. 갈항사지의 여름밤은 애잔한 그리움이 있다.
글/사진 : 편집국장 전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