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김창겸 교수가 '신라문화' 60호(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2)에 게재한 것을 저자와 협의에의하여 각주와 참고문헌 등은 생략하고 재편집하여 수록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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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김천 갈항사석탑기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판독과 해석을 종합정리하고, 그 내용을 활용하여 신라 원성왕가가 갈항사에 석탑을 건립한 배경과 상호관계를 검토하고, 이어서 석탑기에 표기된 원성왕과 가족의 호칭을 분석하여, 원성왕과 왕실의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갈항사는 신라시대 승전이 개창하여 19세기중엽 『대동지지』 편찬시까지 존속한 듯하다. 갈항사석탑기의 작성은 원성왕의 어머니인 조문황태후가문이 석탑을 건립하고 갈항사를 중창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김천지역에 현전하는 이른바 ‘김효왕릉’은 갈항사와 연계된 유적이며, 명칭유래에는 원성왕의 아버지 김효양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특히 갈항사석탑기의 “경신대왕”과 “조문황태후”란 용어를 통해서 볼 때, 신라 원성왕은 황제, 그의 가족은 외연상 황실의 위상을 가졌던 것을 밝혔다.
갈항사지 동서 3층석탑은, 동탑 기단부에 새겨진 석탑기를 통해 언제 누구의 발원으로 이 탑이 세워진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불교사, 미술사는 물론 신라 역사와 금석학과 언어학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이 석탑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가 제 모습을 갖추어서, 건립자의 발원대로 본연의 구실과 기능을 하여야 한다.
Ⅰ. 머리말 – 갈항사지 동서 3층석탑의 이력 -
1962년 11월 2일 개최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제16차 회의는‘국보사적재지정’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 결과 ‘국보재지정’에 있어, 추가지정된 것은 제1분과위원회 제6차회의에서 지정된 39점과 13차회의에서 지정된 22점에 대해 재확인 지정함과 동시에 47점을 추가 지정했다.
이 회의에서 추가 지정된 47점 국보목록에는 황수영 위원이 제안하여 지정된 8점 중 하나로‘제535호 갈항사지삼층석탑’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1962년 11월 23일 개최된 제1분과위원회 제17차회의에서 ‘국보재지정 확인’안건에 ‘명칭 및 일부 자구수정된 국보명단’의 ‘신규지정번호’에 “제99호 갈항사지삼층석탑을 갈항사삼층석탑으로”를 결정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갈항사지삼층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 제99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의 금오산 서쪽 기슭에 있는 폐사지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갈항사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본디 갈항사지에는 동서로 배치된 두 개의 3층석탑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1916년 2월 12일 밤 일본인 도굴꾼들이 탑을 훼손하고 유물을 훔쳐간 사건이 발생해, 탑마저 일본으로 밀반출될 위기에 처했다가, 1916년 6월 동탑을, 1921년 3월 서탑을 조선총독부 박물관, 즉 경복궁 야외 정원으로 옮겨 복원 전시되어졌다. 지금은 2005년 서울 용산에 건립된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조물 정원 야외전시실에 이전 복원되었다. 갈항사와 관련해 『삼국유사』권4, 승전촉루조에 기록이 있다. 이에 의하면, 갈항사는 신라시대 승전법사가 상주 영내 개령군에 정사를 짓고 돌해골들을 권속으로 삼아 화엄경 강의했으며, 이후 이 돌들이 전해온다고 했다.
승전은 당의 법장에게서 화엄을 배우고, 신라로 돌아올 때는 법장이 신라 의상에게 보내는 탐현기·교분기 등 법장의 저술과 그 내용을 적은 서신을 가져와 전한 고승이다. 그러므로 의상이 부석사에서 입적한 뒤에 승전은 그곳을 떠나 갈항사를 창건했을 것이다.
갈항사가 사찰로서 제대로 모양을 갖춘 것은 758년 갈항사 동서 3층석탑이 조성된 경덕왕대로 보인다. 그리고 더욱 발전하여 위세가 매우 커진 시기는 석탑기가 새겨진 신라 원성왕대로 추측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