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오피니언 기고

시론 - 시조(時調)에서 ‘시(時)’의 의미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2.09.05 17:53 수정 2022.09.06 17:53

이교상(李敎相)

현대의 시조는 다변화된 정서(情緖)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수렴(收斂)해야 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갱생(更生)을 향한 혁신을 절실하게 모색(摸索)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으로서의 부정적인 측면이 사람들에게 더욱 부각 되어 시조의 위치가 다시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혁신(革新)은 대개 충격으로 인해 명징(明澄)한 세계를 떠올리기에, 시인들은 먼저 의식에 잠재된 편견과 고정관념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시조의 정형성(定型性)을 지혜롭게 아우르면서, 다채로운 세상의 풍경을 개성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그래서 보다 다양한 형식의 변주까지 과감하게 수용해 내용에서의 고답(高踏)과 형식에서의 단조로움을 미학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시조는 그 명칭에서 이미 현실을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일부 시인들은 고정된 카테고리(category) 속에 애써 시조를 가두려고 한다. 그들은 정형화된 평시조만 시조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논조(論調)의 문제는 시조를 열린 문학으로 인식하지 못해서 시조가 마치 전근대적 옛날 문학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평시조가 시조의 근본이기는 하지만, 그 형식만으로 다채로운 현대의 풍속을 이해하고 개성적으로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그리고 날마다 조악(粗惡)하게 산문화되어가는 현실을 현대의 문학으로 승화(昇華)하지 못하는 한계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시조의 정형성을 더욱 의미 있게 확장해야 하고, 그 어느 때보다 열린 의식(意識)이 시인의 가치(價値)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동안 시조는 경직(硬直)된 이론을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했다. 그 하나 단적인 예로 ‘時’자의 의미를 당대의 여러 상황을 오로지 비판과 해학(諧謔) 및 풍자(諷刺)로 받아들여 시조가 지닌 폭을 축소한 경우이다. 그 해석이 결코 잘못된 인식이라고 할 수 없으나, 그것을 마치 정답인 것처럼 적시(摘示)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시조는 늘 현재진행형의 문학이다. 시대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의식도 변하는 것이다. 단순한 논리만으로 다변화된 시대 정서를 강하고 진정성 있게 포섭(包攝)하거나 대변(代辨)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는 확장된 사고로 인간의 심리와 사상, 감지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기표까지 읽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의 개성이 강조되는 중심에 ‘時’자가 놓여야 한다.

시대의 흐름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그 흐름의 중심에서 비켜있으면 어떤 진실도 사실도 이내 잊히고 지워지는 달의 그림자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 시조 시인이 취해야 하는 행동양식은 더 넓은 세상으로의 탈출을 향한 의지이다. 그곳에서 고착화(固着化)된 관습과 습성을 닦아내고, 역동적인 현실을 혁명적으로 도모해야 한다. 그것이 時’가 되는 최선의 방법이다.

시인들이 어떤 사실을 다양한 상상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문학적 관점에서 긍정적인 요소이다. 음색과 발성이 다채로워질수록 시조는 ‘詩’로서의 보편성(普遍性)을 더욱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형식에 의해 축소(縮小)되고 소멸될 수 있는 감성들을 절정의 경지로 솟구쳐 올릴 수 있다. 이런 환경이 조성되면, 시조에게 덧씌워져 있는 온갖 악몽들이 걷히면서, 그동안 외적인 기율로 인해 쉽게 다가오지 못했거나 외면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시조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말하듯 시조를 쓰고, 노래하듯 시조를 낭송할 것이라고 믿는다.

필자 이교상(李敎相)
경북 김천 출신이며,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석사).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에는 ‘긴 이별 짧은 편지’, ‘시크릿 다이어리’와 단시조집 ‘역설의 미학’이 대표적이다. 현재 계간지 “창작21” 편집위원이며, “이교상학당 시조아카데미”를 운영한다.



저작권자 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