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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20]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2.09.07 13:02 수정 2022.09.07 13:02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수습하다.

ⓒ 김천신문
김시습은 조선 전기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저자이다. 본관은 강릉이며,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이고,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오세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천재였지만, ’아웃사이드’의 지식인으로 평생을 광인(狂人)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부귀와 공명에 타협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용기 있는 사상가였다.

매월당은 3세 때 이미 글을 짓고, 5세에 이르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는 재능을 보였다. 집현전 학사였던 최치운(崔致雲)이 이를 보고 기특한 재주를 가졌다 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짓게 하였다. 한번은 이웃에 사는 재상 허조(許稠)가 찾아와 ‘노(老)’자를 넣어 시를 지어보라 하자,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 라고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이 승정원 지신사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시재(時才)를 시험해 보게 하였다.

박이창이 어린 시습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여러 차례 문장력을 시험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마치 “푸른 소나무 가지 끝에서 백학(白鶴)이 춤을 추는 듯” 시습의 시구(詩句)에는 막힘이 없었다. 세종은 김시습이 좀 더 성장하고 학문이 완성된 다음 나라의 큰 재목으로 쓰겠다는 약조와 함께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어 주었다. 이후 시습은 임금께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서고금의 진서(眞書)를 두루 섭렵하며 학문의 완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는 사이 세종과 문종이 잇달아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등극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일으킨 지 2년 후 단종을 몰아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단종의 양위 소식에 접한 매월당은 3일 동안 통곡한 다음 천륜(天倫)을 배신한 세조 밑에서는 절대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웠다. 이때 매월당의 나이 약관 21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게 되었다. 1456년 6월, 세조가 정권을 잡은 지 3년여가 흐른 다음이었다. 그때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단종 복위’ 계획이 탄로 나면서, 광화문 육조거리는 갑자기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死六臣)들의 찢어진 사체와 선혈로 낭자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세조 치하에서 후환이 두려워 그 누구도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매월당이 처참하게 흩어진 시신들을 하나하나 바랑에 담아 한강을 건너 노량진 산기슭에 묻은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사육신의 묘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매월당의 기행(奇行)에 놀란 세조가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오게 하자, 매월당은 온몸에 인분(人糞)을 뒤집어쓴 체 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매월당이 세조의 부름을 뿌리치고 발길을 향한 곳은 경주의 금오산(金鰲山, 남산)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한 한(恨)을 불교적 설화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바로 「금오신화」이다.

1481년 그의 나이 47세에 이르러 잠시 환속하였으나, 폐비 윤 씨 사건이 일어나는 등, 명덕(明德)을 펼치기에는 세상이 너무 어수선하였다. 그는 다시 부평초 같은 운수(雲水)의 길을 걸으며, ‘신인술가(神人術家) 괴한기승(怪漢奇僧)’이란 평을 들어야 했다. 결국 매월당은 자신의 재주를 세상을 향해 단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체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수 59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불의의 시대에 맞서 명예와 재물을 버릴 수 있었던 만세 사표(師表)가 되었다. 훗날 율곡(栗谷)은 자신이 지은 「김시습 전」에서 매월당은 ‘심유적불(心儒跡佛) 즉, 선비의 마음을 갖고, 선승의 족적(足跡)’을 남긴 인물로 적고 있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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