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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갈항사 쌍석탑 - 기획시리즈<5>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2.09.07 16:51 수정 2022.10.06 16:51

김천 갈항사석탑기와 신라 원성왕가의 위상(김창겸 김천대학교 교수)

이 논문은 김창겸 교수가 ‘신라문화’ 60호(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2)에 게재한 것을 저자와 합의에 의하여.각주와 참고문헌 등은 생략하고 재편집하여 수록합니다.   <편집자>

ⓒ 김천신문
한편 갈성말치(葛城末治)는 ‘군니’는 언니(姉)로, 그리고 5행의 ‘니(妳)’는 ‘어머니’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왜 자자(姉者)인 조문황태후가 원성왕의 어머니가 아니고, 매자(妹者)인 조문황태후의 여자아우가 경신대왕의 어머니인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고유섭은 니를 모로 해석하고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언적의 자매 모두와 혼인하였고, 정처는 조문황태후이지만 경신대왕의 친어머니가 아니고, 경신태왕은 소문황태후의 매(妹)(여자아우)가 낳았다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원성왕의 어머니는 계오부인(지오부인)이고, 그녀를 조문왕후로 추봉되었기에, 친모가 다른 여인이라고 하기는 부적합하다.

이와 달리, 남풍현은 ‘군’을 왕으로 보며 ‘니’는 유모의 뜻으로 모나 이모를 가리키는, 곧 ‘군니’는 왕의 어머니인 황태후에게만 부과할 수 있는 칭호라 하였다. 5행의 ‘니’는 유모의 뜻으로써, 부인보다는 한 단계 위 항렬에 있는 모나 이모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개선사석등기에는 ‘경문대왕주’가 함께 나타나지만, 갈항사석탑기에는 경신대왕 뒤에는 존칭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군에 대한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성주사낭혜화상탑비의 ‘군부인’은 하나의 칭호로서 임금의 부인을 가리킨다는 점을 사례로 들어 ‘군’을 왕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이 석탑기의 군을 대명사로 받아들여, ‘군니’를 왕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가지는 존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여러 연구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결국 필자 역시 여기에 따르면서 ‘군니’는 ‘왕의 어머니’로, 그리고 ‘경신태왕니’는 경신대왕의 유모로 해석하겠다. 게다가 그녀가 조문황태후의 여자 아우이기에, 경신대왕에게는 친족관계상 ‘이모(어머니의 여자형제)’에 해당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갈항사석탑기의 해석에 있어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4행의 군과, 4행과 5행의 니로 판독한 글자의 뜻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3남매가 경신대왕의 외가 사람들이라는 것에는 대체로 생각을 같이 한다.

2. 갈항사와 ‘김효왕릉(金孝王陵)’

갈항사는 승전에 의해 개창된 이후 적어도 두 차례 걸쳐 중창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 중창은 두 탑을 세운 때이며, 두 번째 중창은 석탑에 기문(記文)을 새긴 때인 듯하다.

앞에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먼저 갈항사는 승전이 창건한 후 약 50여 년을 지나 크게 중창되는 것 같다. 석탑기를 보면 두 석탑은 원성왕의 어머니 가문의 시주로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758년(경덕왕 17)에 원성왕의 외숙인 언적법사와 어머니인 조문황태후 그리고 유모(이모)로 추정되는 작은 누이 등 3남매가 건립하였다. 이때 이들은 갈항사 중창을 주도하였을 것이다.

언적은 당시 갈항사의 주지였을 것이다. 이들 3남매는 원성왕의 외가인 창근(昌近) 이간(伊干)의 자식들이다. 그러므로 갈항사는 원성왕 외가인 박씨 가문의 원찰이었거나, 아니면 박씨 가문이 이 절의 대단월(大檀越)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 갈항사는 창건된 지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점차 퇴락해 가고 있었고, 이에 758년에 언적법사를 중심으로 한 박씨 가문이 크게 중창했을 것이다. 즉, 이들은 두 석탑의 조성과 함께 갈항사를 거의 중창하다시피 일으켜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원성왕이 즉위한 785년 이후 이 사실을 석탑에다 명문(銘文)을 새겼다. 이 일은 언적법사의 3남매에 의한 두 석탑의 조성과 갈항사의 중창이 있은 뒤 약 30년이 지난 뒤였다. 더욱이 석탑기를 새긴 이때도 중창은 있었다. 이처럼 갈항사는 원성왕 외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보겠다.
원성왕의 어머니 조문왕후(昭文王后)가 추봉되기 이전 호칭은 계오부인(지오부인) 박씨였다. 한편 숭복사비(崇福寺碑)에 의하면 김원량은 소문왕후의 외숙이자 숙정왕후의 외조부라고 하였다. 김원량은 원성왕의 외할머니(창근의 아내, 조문황태후의 어머니)와 남매간이고, 김원량의 딸(김신술의 아내, 숙정부인의 어머니)과 원성왕의 어머니 조문황태후(효양의 아내)는 외사촌 자매이다.

아울러 원성왕의 비인 숙정왕후는 신술(神述) 각간(角干)의 딸이다. 그러므로 김원량의 부모를 중심으로 양가가 연결되었다. 원성왕은 김원량과는 어머니는 물론 자신과의 혼인으로 중첩의 친족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김원량이 나중에 불전에 희사하고 세속을 벗어났다고 했으므로, 아마도 김원량은 재산과 토지를 희사해 사찰을 건립하고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보겠다.

아마 갈항사는 원성왕 외가가 부모를 추복하기 위한 원찰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갈항사는 원성왕이 즉위한 뒤에 아버지 김효양의 원찰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원성왕의 아버지 김효양은 상당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소유한 유력자였을 것이다. 그는 파진찬 관등을 가졌던 숙부를 추모하여 받들기 위해 무장사(䥐藏寺)를 세웠다. 무장사란 이름에서 짐작되듯 군사력도 소유하고 있었다고 보겠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갈항사의 소재지에도 김효양과 친연성을 가진 유적이 존재함을 살펴보도록 한다.

현재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오성마을) 930번지 밭 가운데 김효왕릉(金孝王陵)이라 불리는 봉분 높이 6m, 지름 15m 크기의 대형무덤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 전해오는 김효왕이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있다. 현지에서는 신라 조분이사금 때 석우로(昔于老)가 정복한 감문국 왕의 무덤으로 전해오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개령현 고적(古蹟)조에는“김효왕릉은 현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김효왕릉이라고 한다.”라 했고, 동사강목 제2상 신해년(신라 조분왕 2년)조에 “(개령)현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으며, 속칭 감문 김효왕릉이라 전한다.”라 했으며, 대동지지 개령현 능묘에는 “김효왕릉은 북쪽으로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김효왕릉이다.”고 한 기록들이 보인다. 현재도 김천지역에서는 김효왕릉을 감문국 관련 유적이라고 하면서, 심지어는 금산군, 금산현 별칭인‘금릉’을 이 김효왕릉에서 유래했다는 억측을 만들어 유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연구자들은 김효왕릉이 감문국왕 무덤이라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2018년에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이것이 외형적으로 고분의 분구 형태를 보이지만 매장 주체부가 조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분 분구의 조성 시 수반되는 인위적 절토 및 정지 그리고 성토의 특징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 정황 등으로 보아 고분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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