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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28]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3.12.21 17:25 수정 2023.12.21 17:25

조광조(1482~1519)와 남곤(1471~1527)
“나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당시 기묘삼흉(己卯三凶)으로 지목된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급진 개혁론을 주장하며 등장한 조광조(趙光祖) 일파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등장한 조광조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지난 연산군 때의 난정(亂政)을 하루빨리 극복하고 유교적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이상정치(理想政治)의 실현을 주장하였다.

남곤과 조광조는 김종직, 김광필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렇듯 조광조와 남곤은 같은 스승 같은 서당에서 공부하였지만 11살이라는 큰 나이 차이만큼이나 그들 각자의 생각은 서로 크게 달랐다. 조광조는 급진적인 개혁을 바랐으나 연배인 남곤은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다. 조광조는 문학은 선비가 할 일이 아니며 경전(經典)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남곤은 참된 선비라면 학술과 문예에 모두 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조광조와 남곤의 서로 다른 성격 차이에는 일찍부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데 한 규수가 앞으로 지나갔다. 조광조는 규수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저만치 가버린 규수를 뒤돌아보기까지 하며 길을 걸었던 반면에, 남곤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계속 앞만 보고 걸어갔다고 한다. 조광조가 이 같은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으며 자신의 수양 부족을 자책하자, 조광조의 어머니는 총각이 여인을 보고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위로하였다. 이후 남곤의 모질고 냉정한 성격을 파악한 조광조의 어머니는 아들이 냉정한 남곤과 사귀지 못하도록 집을 이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정(朝廷)에서 남곤과 조광조의 조우(遭遇)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간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남곤에게, 성리학과 수신을 내세우며 등장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士林派)의 급격한 득세는 남곤 일파의 자존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남곤과 심정, 홍경주 등은 조광조에게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 궁녀들을 사주하여 ‘목자기쇠(木子己衰) 주초수명(走肖受命)’ 즉 “목자(이씨왕조)는 쇠퇴하고, 주초(走+肖=趙), 즉 조광조가 천명을 받는다”라는 허황한 내용으로 사화에 불씨를 지폈다.

요즘 같으면 한번 웃고 지나갈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사화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조광조는 역신으로 몰려 유배 길에 올랐다가 곧바로 사사(賜死)되었고 그간에 조광조를 추종하던 젊은 신진사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형을 받아야 했다. 당시 사화의 내용을 정리한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에 의하면 그때 화를 입은 인물로는 조광조를 필두로 김식(金湜),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구(金絿), 김정(金淨), 최운(崔澐) 등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관직에서 밀려나거나 귀양길에 올랐다. 이후 신진사료의 진출을 막기 위해 남곤과 심정, 홍경주 등이 허황하게 꾸며내었다는 사화의 전모(全貌)가 밝혀지면서 남곤과 심정은 모든 관직에서 파직되었다.

이후 세간에는 남곤과 심정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소인배를 뜻하는 <곤쟁(정)이 젖>이라는 말이 퍼졌다. 또한 남곤은 선비로서 스스로 잘못을 자책하며 자신의 저서를 불태웠는가 하면, “내가 죽은 뒤에 시신을 비단으로 염습하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오늘날 세모(歲暮)을 앞두고 오래도록 숙성시킨 곤쟁이 젓갈로 김장하는 풍습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선인들이 관직에 재임 중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반성하고 자숙하는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태도는 아닐까 한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 최재호의 인문강좌 <명심보감> 수강문의 010-8777-9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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