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리(둔골屯谷, 운양雲陽)
면소재지인 옥산으로부터 국도4호선을 따라 대구방향으로 가다보면 도로변과 운곡천 좌우로 자리잡은 둔골(등골)과 운양마을을 만날 수 있다.
운곡리는 원래 개령현 남면에 속했었는데 1914년 운양과 둔골을 합한 후 운양(雲陽)의 운(雲)자와 둔곡(屯谷)의 곡(谷)자를 따서 운곡(雲谷)이라 했고 1971년 둔골을 운곡1리로 ,운양을 2리로 분동했다.
초등학교가 있는 운곡1리 둔골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장흥위씨(長興魏氏) 부장공파(副將公派) 집성촌으로 전체 120가구중 60여가구에 달한다.
이 마을에 처음 위씨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1590년대말로 전란시 이순신장군의 부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위대홍(魏大弘)장군이 전국의 명당을 물색하던중 마을앞에 이르러 운남산의 지세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임을 간파하고 후손의 번성을 바라며 정착했다고 마을주민이자 공의 14대손인 위유생(74세)씨가 전한다.
장흥위씨가 들어오기 전까지 마(馬)씨와 조(趙)씨가 살았다고도 하는데 마을뒷산 골짜기의 조가밭골에는 조씨들이 살면서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조가밭골 인근에는 장군바위, 벼락바위 등으로 불리며 흡사 인위적으로 새긴 것 같은 발자국이 찍힌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어느 장군이 자신의 손발과 타고 다니던 말의 발자국을 새겨두고 갔다고 하는데 장군이 배출된 마을에는 예외없이 장수바위전설이 전해지는 것으로 볼때 위대홍장군과 관련이 있을것으로 추측된다.
이 마을은 원래 부상역(扶桑驛)의 관리들과 인근에 주둔하던 군사들에게 지급되는 둔토(屯土)가 있어 둔골(屯谷)이라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등골(登谷)로 변해버렸다.
마을중간에는 수백년 세월에 걸쳐 후손들의 안위를 굽어살폈을 장흥위씨 재실 관산재(冠山齋)가 거룩히 서있다.
▷장흥위씨 입향조 위대홍 장군의 비석과 관산재
등골에서 국도와 운곡천을 건너 맞은편 운남산 자락의 운양마을은 경주이씨와 나주임씨 일가들이 세거하는 총35가구의 작은 마을로 운남산 아래 양지쪽에 마을이 있다하여 운양(雲陽)으로 했다고 마을주민 이상준(68세)씨가 전한다.
▷송곡리(솔방松坊, 마곡麻谷)
운곡과 부상 사이의 국도변에 위치한 송곡리는 1914년 솔방(松坊, 살구점(杏店),마곡(麻谷)을 합하여 송곡의 송(松)자와 마곡의 곡(谷)자를 따서 송곡동(松谷洞)이라 하고 1971년 솔방과 살구점을 1리, 마곡을 2리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해김씨가 주로사는 솔방마을은 본동에 해당하는 국도변의 솔방과 안솔방, 살구점 등 세 개의 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원래 청주한씨(淸州韓氏)일가에 의해 지금의 안솔방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때 마을이 큰 피해를 입게되면서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로 불렸던 현재의 도로변으로 집단이주를 하게 된 것이라고 마을이장 한상헌(50세)씨가 전한다.
▷과거 주막이 있던 주막거리 일대
마을의 이름을 솔방 또는 송방(松坊)이라 한 것은 옛날 마을 뒤에 송방사(松方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마을에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송곡2리 마곡마을은 솔방에서 부상고개를 올라가다가 우측 골짜기에 위치한 전체36가구의 작은마을로 본동인 마곡과 도로변의 샘물터 두 부락으로 구성되어있다.
옛날 마을뒷산에 고려시대에 창건된 마곡사(麻谷寺)라는 절이 있어 마을이름을 마곡이라했다고 하고 달리 진골이라고도 하는데 진골에 대한 연원은 알 길이 없고 마곡사는 폐사가 되어 절터만이 전할 따름이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드문 산신제를 아직도 매년 음력 1월7일 지내고 있다며 마을의 단합을 자랑하는 마을이장 서태문(58세)씨는 마침 마을에 잔치가 있어 돼지를 잡았다고 부득불 불청객을 잡아앉혀 한상 차려 낸다.
사방을 분갈 할 수 없을 만치 쏟아지는 모처럼의 눈발이 마곡마을 인심만큼이나 흐뭇하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