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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칼럼- 효 문화는 변하고 있는가!

권숙월 기자 입력 2014.11.06 13:25 수정 2014.11.06 01:25

류성무(대한노인회 김천시지회 부지회장)

 
ⓒ i김천신문
부모님 생전에 효도하지 못하고 사후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자식들이 많은 게 오늘의 현실이다. 본인 역시 그 중 한사람으로 실감하고 있다.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을 때는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고 사거(死去)하기 때문이다.

 효는 모든 덕목에서 가장 고귀한 정신문화로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정신유산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인상(老人像)은 어떠한가? 노인의 자살률, 빈곤률, 교통사고율이 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노인 학대, 독고, 무위고, 유괴, 방임 등도 국가적 사회적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 고귀한 전래의 효도문화는 참으로 퇴색하고 무색할 정도이다.
공자의 효삼(孝三)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능양(能養)하는 것이다. ‘능양’은 소, 말, 개를 기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능양만 잘하면 효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부모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선택이 아닌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항상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근심걱정을 끼치지 말고 편안하게 하는 부자자효(父慈子孝)는 상대적이고 호혜관계(互惠關係)이다.
모름지기 효 교육은 가풍, 가통, 가법을 중심으로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 한다. 부모는 훌륭한 선생이다. 뛰어난 자식 뒤에는 뛰어난 부모가 있다.

 그러나 효 문화의 변화를 살펴보면 농경사회 대가족제도에서 산업화사회의 핵가족 시대를 맞아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으로 별거하므로 효도방법이 옛날과 같은 형식으로 강요할 수 없거니와 가부장적 구조질서로 실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대식 효 문화는 웃어른들과 대화와 소통으로 자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민을 해결하고 소통의 범위를 확대하여 어른들이 모범을 보이면서 끊임없는 칭찬과 격려로 스스로 하는 기회와 창조정신을 기르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칭찬도 일종의 교육이다. 칭찬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버지에게 서로 칭찬하는 것이 상호주의적 ‘하모니,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자식의 과잉보호와 맹목적 사랑이 자제력을 지닐 수 없게 하고 자활능력이 없으며 마침내 의지하는 버릇을 가지게 한다. ‘귀한 자식 매로 키우고 매 끝에 효자 난다’는 속언은 참고할만한 일이다.

 예를 들면 기본예절과 미풍양속을 소홀히 하고 공부만 잘 하고 좋은 대학에만 입학하면 그것이 최고의 효자라는 편견은 잘못이다. 돈만 벌면 된다는 우리 사회의 병폐와 같이 공부만 잘 하면 된다는 자식관은 인성교육을 망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현대식 효, 예전과 같이 부모와 동거 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극복하는 데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수칙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는 주기적으로 부모님의 건강검진을 하여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고 둘째는 전화나 휴대폰 기타 다양한 방법으로 부모와 조석으로 연락하여 동정을 살피며 셋째는 의식주를 보살펴 좋은 환경에 영양공급으로 건강증진에 힘쓰고 넷째는 독고부모님께는 황혼재혼을 서둘러서 노후에 즐거운 나날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대효(大孝)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가끔 여행도 하게 해드리고 취미생활과 외식에도 신경 쓰고 여섯째는 자녀에게도 할아버지 할머니께 자주 연락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앞에 열거한 효 문화의 변화를 보면 상호평등에 내지 수평적이고 인격적인 면으로 이루어 내리사랑으로 현대식 효를 널리 보급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수신(修身)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수신을 하려면 부모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 백행의 근본이 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효는 그 실천방법이 달라질 뿐 근본은 시대를 초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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