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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향기- 칠월 이야기

권숙월 기자 입력 2015.07.15 11:47 수정 2015.07.15 11:47

이희승(시인·신음동)

ⓒ 김천신문
비가 그친 어제 오늘, 내가 즐긴 아침시간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거기 ‘풍덩’ 빠져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한참 그렇게 일상을 밀어둠으로써 나는 내 하루의 시작이 무난하고 잡다한 일들을 사유할 수 있어 지극히 그 시간들을 사랑한다.

달리 말하면, 순간순간 찾아오는 감정의 불순물들과 일상의 분비물들을 비 온 뒤의 청량함으로 걸러내 보려는 나의 오랜 습관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도시의 실핏줄인 허름한 골목에서 평안을 찾는 이문재 시인의 오랜 그리움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심코 시선이 간 폰의 액정화면 가득 엄마의 얼굴이 뜬다. 묵음으로 되어 있어 하마터면 못 받을 뻔하였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가는 파장처럼 엄마는 내 아침의 여유를 흔든다. 하지만 부러, 불편한 고관대작들의 가마를 피하려고 찾아가는 *피맛길처럼 엄마와 대화하는 것은 언제고 반가운 또 다른 나의 피맛길인 것이다. 

엄마도 내가 누리는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을까. 가난함이 사무치는 돌아가신 아버지 집안에 시집옴과 동시에 엄마는 그 같은 호사와 결별 당한 채 살아 왔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에도 돌아서면 또 다른 일거리들이 줄지어 보채는 농촌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은 어쩌면 먼 나라 이야기이리라. 생각하는데, 한 톤 높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이래 전화를 안 받나? 병원에 계신 사둔한테는 자주 가보나? 오늘 딴 자두 네 동생 편에 보낼 테니 받아래이.”
지난 가을부터 골절로 병원에 계신 시어머님 걱정도 잊지 않는 속사포로 이어지는 말에는 언제나 모정이 듬뿍하다. 나를 이렇게 챙기는 사람이 또 있을까, 누가 나를 이렇게 챙기고 싶어 할까.

해마다 6월 말이 되면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친정집 일이다. 자두를 따는 것은. 엄마 덕분에 본격적으로 자두가 나오기 시작하는 유월부터 우리 집 냉장고는 쉴 새 없이 갖가지 종류의 자두로 채워진다. 쉬 벌겋게 무르는 자두를 따야 해서 틈이 나지 않는 시간인데도 남동생 편에 광주리 가득, 자두를 보내오는 것이다.

오늘도 새벽부터 일어나 미숫가루 한 잔을 시작으로 풀들이 바리케이드 친 밭을 헤치며 자두를 땄겠지. 창고 가득 수십 개의 광주리를 부려 놓고 그 광주리 안에 든 자두 한 알, 한 알을 분이 닦이지 않도록 포장했을 거야. 크기별로 포장하기 위해 얼마를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고 허리를 구부렸다 폈을까. 거실을 채우는 이 향기는 엄마의 시큰거리는 관절이 고통을 불렀던 향기일 거야…….
젊은이들이 도시로, 도시로 돌아올 기약 없는 사냥을 떠난 후 70이 코앞인 연세의 노인도 청년처럼 일하게 만드는 해체된 농촌 공동체다.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는 나도 심사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두농사 그만 지으면 안 돼? 관절수술 하려면 농사는 접어야 한다는데.”
“농사 안 지으면 뭐하고? 나는 자두가 일 년 내내 있었으면 좋겠다. 니나 사둔어른한테 자주 가 봐라.”
말로는 골백번도 더 위해주는 딸에 일침을 놓는다. 못난 딸이 며느리 노릇을 못하는 것 같아 엄마는 그것이 아플 뿐이다.
“……자주 갈게.”
뜨끔한 나는 바로 풀이 죽어 버린다. 오랫동안 병약한 아버지를 돌보면서도 힘든 농사일을 거뜬히 해낸 엄마에 비해 조금만 힘들어도 엄살 피는 딸의 이기심과 무심함은 어이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얼굴이 폰 속으로 함몰됨과 동시에 나는 아까의 그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하늘은 고맙게 나에게도 푸르다. 그 맑은 모습에 빠져 있는 나를 언제고 밀어내는 법이 없다. 하늘의 넉넉함을 닮아야겠다.
    
*종로의 뒷골목. 이문재 시인의 ‘골목에 대한 명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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