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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광복 70주년을 맞아 거국적인 경축분위기와 함께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다.
김천출신 독립운동가 중에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인물임에도 그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개령면 동부리 출신 김태연의 불꽃같은 삶을 조명해본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단야(金丹冶)’로 널리 알려진 김태연(金泰淵)은 김천 동부리 출신이다. 1900년 독실한 기독교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뜻에 따라 1908년 기독교 계열 학교인 개진학교에 입학했다.
1915년 대구의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 고등보통과에 입학했으나 일본인 교사와 미국인 선교사인 학교교장의 한국인 차별에 항거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1916년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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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단야 김태연. 그 옆이 박헌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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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고향 김천으로 돌아와 개령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회에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출소 후 비밀결사단체인 적성단에 들어가 활동하다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21년 상해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돼 기관지 ‘벌거숭이’ 편집인으로 활동하다 1922년 신의주에서 체포돼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도 활동했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을 피해 상해로 망명,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공 기관지 ‘불꽃’ 주필이 됐다.
이 무렵 조공 ‘해외부’ 설립에 참여했으며 국내 공산당의 재정을 조달했다. 그 해 4월 순종의 사망소식을 듣고 “상(喪)에 복(服)하고 곡(哭)하는 민중에게 격(檄)함” 등의 격문을 상해에서 만들어 국내로 보냈다.
1934년 박헌영의 전 부인 주세죽과 결혼하고 1936년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과장으로 근무했다. 1937년 일제의 밀정이란 혐의를 받고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 체포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 의해 1급 일제 밀정으로 판결받았으며 1938년 사형을 당하면서 불꽃같은 짧은 삶을 외국 타향에서 마감했다.
그동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라 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김태연의 활약상은 2000년대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5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김천출신이거나 김천과 연고가 있는 독립운동가로서 정부의 훈·포장, 표창을 받은 독립운동가가 5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