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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와 향토사연구회 회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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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김천향토인물학술발표회가 27일 오후 2시 김천문화예술회관 소강당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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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보생 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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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역 향토사연구회 회원을 비롯한 200여명의 도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학술발표회는 김천향토사연구회가 주최한 행사. 강용규 총무 사회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는 국민의례, 내빈소개, 이석호 회장 인사, 박보생 시장 축사에 이어 학술발표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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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호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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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간은 박정숙 경상대 교수가 ‘학암 강석구 선생 응지소차’에 대한 발표를 하고 둘째시간은 전병철 경상대 교수가 ‘동포 배흥립 장군 기행록’에 대한 발표를 했다.
박정숙 교수의 ‘학암 강석구의 응지소차에 관해’주제 학술발표를 했다. 박 교수에 의하면 1726년 구성면 광명리 기동에서 태어난 강석구 선생은 1810년 8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검소하게 생활하며 관직에 대해 초연한 마음으로 당시 어지러운 조선의 정계에 소신 있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강석구 생애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1796년 정조가 내린 교령에 ‘응지소차(應旨疏箚)’를 올린 것이다. 이 일에 대해 ‘조선역대명신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무신년에 임금을 뵙고 인사를 올리고 기유년에 올린 상소문은 10조의 긴 글인데 전정의 저린 고기와 같으니 공의 사람됨을 알려한다면 어찌 여기에서 보지 않으리오.”
강석구의 ‘응지소차’는 1796년 3월 25일 내린 정조의 구언교에 따라 쓴 것인데 ‘조선왕조신록’에 따르면 그때 정조는 다음과 같은 교지(敎旨)를 내렸다.
“조정과 민간의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마음속에 간직한 것을 진언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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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철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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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철 교수는 ‘동포기행록에 남겨진 배홍립의 행적과 그 의의’를 주제로 한 학술발표를 했다.
1546년 조마면 신안리 세래에서 태어난 배흥립 장군은 1608년 6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인물. 임진왜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 공로가 인정돼 1604년에는 공조참판에 임명됐으며 1605년 ‘선무원종일등공신’에 기록됐지만 지금까지 그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형편이었다.
이에 김천향토사연구회는 이번 학술발표회를 앞두고 그의 시문과 행적을 모아 편찬된 ‘동포기행록’을 번역하고 책자로 발간, 배포했다.
“분격하느라 육지에선 몸을 잊었고/ 바다에서 분주하게 전함을 달렸네/ 그래도 시름겨운 생각 가시지 않아/ 달빛 내리는 병영에서 잠 못 이루네” -‘동포기행록’에 수록된‘환진야음’ 전문
전병철 교수는 위 시문을 소개하고 “배흥립 장군은 수많은 전투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으며 공훈을 책정할 적에는 힘써 사양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 교수의 이날 발표는 “낮에는 전쟁터에서 자신을 잊고 싸웠으며 밤에 진영으로 돌아와서 나라에 대한 근심으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고 결론지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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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향토사연구회의 이날 학술발표회장에서는 박정숙·전병철 교수와 윤승창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전국회장에게 청악 이홍화 서예가가 휘호해 족자로 만든 작품을 전달하는 순서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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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날 학술발표회 현장에는 강용규 총무의 부인 최호선씨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이 차와 떡 등을 참석자들에게 대접하며 김천의 이미지를 제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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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향토사연구회 주역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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