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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종합 종합일반

3·1운동 100주년 기획특집-김천의 독립운동가(마지막회)

김민성 기자 입력 2019.03.27 15:11 수정 2019.03.27 15:11

구성면 상좌원이 배출한 세 명의 연안이씨 독립운동가
이명균(李明均) 이경균(李璟均) 이석균(李鉐均)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결성
파리강화회의 유림대표 독립청원서 서명 등 독립운동 전개
정부, 3인 공적기려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각각 추서

일제에 의해 나라의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김천 상좌원 출신 연안이씨문중의 이명균, 이경균, 이석균 등 세 명의 의사는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이명균(李明均)은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863년 1월 14일 김천군 석현면 하원리(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서 조선 성종대의 청백리 충간공 이숭원의 14세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일괴(一槐).
일제 강점기 절치부심하던 이명균은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애사(愛史)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해인사를 방문할 예정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해인사 방문을 취소하면서 계획이 실패하자 편강렬을 40여 일 동안 숨겨준 후 여비를 줘 만주로 망명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명균은 경상북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조직적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나 동지들이 이른바 ‘만명 탄원서’를 제출해 석방됐다.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는 가운데 영남 지역의 곽종석, 김창숙 등과 호서 지역의 김복한 계열 인물들이 중심이 돼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고자 하는 파리 장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명균은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유림단 대표로서 활동하다 체포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0년 3월 이명균은 문경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신태식, 김찬규, 이응수 등 20여 명과 함께 나곡산재(羅谷山齋)에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을 결성했다.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은 3·1운동 이후 성립된 상해임시정부 등 해외 독립 운동 단체에 대한 후원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로서, 이명균은 군량총장으로서 재정 관리 및 군자금 조달의 임무를 수행했다.
군자금 모금이 부진하자 자신의 재산을 매각해 5회에 걸쳐 10여 만 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는데 이에 상해임시정부는 감사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이명균을 후원의용단장과 재무총장에 임명했다.
이후 이명균은 김찬규, 이응수 등과 협의, 만주에 있는 서로군정서에 연락해 서로군정서 명의로 발행된 군자금 모금 위임장과 사형 선고장, 상해임시정부 명의의 독립 선전에 관한 경고문 및 ‘독립신문’을 들여왔다. 또 서로군정서 소속의 김응섭으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14발을 받기도 했다.
이를 배경으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은 1922년부터 경산, 청송, 안동, 영일, 군위, 영덕 등지의 부호들에게 군자금 37만 원을 요구하는 ‘군자금 모금서’와 이에 불응할 때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사형 선고서’를 보내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에게 자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1922년 11월 이명균은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해 가던 일본 경찰에 의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고 군자금으로 모금한 8만 3천원도 몰수당했다.
1923년 3월 대구지방법원 예심 중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탈골과 자상, 화상 등의 병을 얻어 심각한 상황에 빠지자 당시 대구복심법원 판사였던 이우익이 병보석을 주선해 3월 6일 출감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그 해 5월 2일 순국하였다.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고 1969년 성내동 자산공원에 박정희대통령의 친필로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구성면 상좌원리에는 경상북도에서 기념관과 흉상, 기념비를 세웠다.
ⓒ 김천신문
이경균(李璟均)은 구성면 상좌원리 169번지에서 1850년 태어났다. 고헌 정내석과 사미헌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 도학을 공부했으며 효행으로 누차 사림의 천거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유림 대표 137명의 연서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파리 장서 사건에 김천 대표로 공산 송준필(宋浚弼), 구성면 상좌원리의 이석균(李鉐均), 조마면 신안리의 최학길(崔學吉) 등과 함께 참여했다. 저서에는 윤강도(倫綱圖), ‘성학전수(聖學傳授)’, ‘양로례(養老禮)’, ‘연성문헌(延城文獻)’ 등과 ‘계헌집(稽軒集)’ 2권 등이 있다.
송준필이 행장을 썼고 뇌헌 정종호(鄭宗鎬)가 묘갈문을 지었다. 2010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건국포장을 받았다. 구성면 상좌원리 모성정 아래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석균(李鉐均)은 1855년 1월 19일 석현면 하원리 167번지 현 구성면 상좌원리 167번지에서 태어났다.
계헌(稽軒) 이경균(李璟均), 이돈영(李敦榮) 등과 함께 기호 노론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의 문하에서 공부했지만 한편으론 영남 남인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이석균은 곽종석·이승희·장석영 등 인근 성주·칠곡·거창 등지의 유림들과도 교유했다. 1881년 이석균은 영남 유생들이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척사(斥邪) 상소를 올릴 때 공사원으로 선정돼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는 가운데 영남 지역의 곽종석·김창숙 등과 호서 지역의 김복한 계열의 인물들이 중심이 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자 했던 파리 장서 사건에 이석균은 사촌인 이명균, 육촌인 이경균 및 최학길과 함께 동참해 서명했다. 이 사건으로 이석균은 1919년 4월에 체포돼 고초를 당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7년 사망하자 장례는 유림장으로 치러졌으며 구성면 상좌원리 모성정 아래에 추모비가 세워지고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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