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특집 기획시리즈

갈항사 쌍석탑 - 기획시리즈<3>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2.08.25 17:19 수정 2022.08.25 17:19

김천 갈항사석탑기와 신라 원성왕가의 위상(김창겸 김천대학교 교수)

이 논문은 김창겸 교수가 ‘신라문화’ 60호(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2)에 게재한 것을 저자와 합의에 의하여 각주와 참고문헌 등은 생략하고 재편집하여 수록합니다.      <편집자>

ⓒ 김천신문
이 석탑이 알려질 무렵에는 갈항사의 사찰건물이 존재하지 않는 폐사지 상태였다. 이런 이유로 기존 연구자들은 갈항사는 8세기초 창건되어 조선시대 어느 시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혹자는 조선 전기까지 사세를 유지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금오산성전투와 관련해 소실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나, 1799년 범우고가 편찬될 무렵에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계림사는 감문산에 있다. 갈항사는 금오산 서쪽에 있다. 신라 고승 승전이 석촉루로 이 절을 창건하고 관속을 위해 화엄경을 강의했는데, 그 돌이 80여 개다. 삼국유사에 보인다. 대양사는 감문산 북쪽에 있다. 문수사는 복우산에 있다. 대두리사는 금오산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영조 연간(1724-1776)에 편찬된 해동지도에는 계림사·대양사·문수사·대두리사·고방사·쌍비사와 함께 “갈항사는 금오산 서쪽에 있으며, 신라 고승 승전이 이 절을 개창해 석촉루를 관속으로 삼아 화엄을 개강했다.”고 했다. 김정호가 1861∼1866년경 편찬한 대동지지에는 “금오산은 남쪽으로 30리에 있는데 선산·인동 경계이며, 서쪽에 갈항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문헌에서 보면, 해동지도의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의 그것을 전제한 듯하다. 이에 비해 대동지지의 기록은 이들과 내용이 다르다. 만약에 김정호가 이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기술했다면, 대동지지가 편찬될 당시인 19세기 중반까지 갈항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겠다.

한편 갈항사지에 있었던 2기의 3층석탑 중에 동탑의 상층 기단의 면석에 기문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흔히 ‘갈항사석탑기’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천보 17년(758년, 경덕왕 17)에 두 탑을 건립했다고 새겨져 있다. 이 석탑기는 1914년 알려졌으며, 탑이 1916년에 경복궁으로 이건된 이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하여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에는 신라 하대 원성왕가 왕실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이미 이것에 대해 간헐적으로 언급하였지만 한편의 연구논문으로 발표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2020년 갈항사지와 인접한 김천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이번에 일단의 견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갈항사석탑기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판독과 해석을 종합 정리하고, 그 내용을 활용하여 원성왕가가 갈항사에 석탑을 건립한 배경과 상호관계를 검토하고, 또 기문에 표현된 호칭과 그 의미를 통해 석탑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나아가 이 갈항사석탑의 본래 위치로 이전과 복원의 필요성을 주장하고자 한다.

서술 순서는 먼저 기존의 연구성과를 정리하면서 석탑기에 대한 판독 및 해석과 함께 내용을 검토하고, 이어서 석탑기에 표현된 원성왕과 가족의 호칭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당시 원성왕과 왕실의 위상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맺음말로서 현실적인 문제로 기구한 사연으로 본래 있었던 곳으로 떠나 무려 100여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타지의 박물관 야외를 옮겨 다니며 비바람을 견디고 있는 갈항사석탑의 원위치로 이전 당위성 내지 복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겠다.

Ⅱ. 갈항사와 원성왕가

1. 갈항사석탑기 판독과 해석의 종합 정리

갈항사석탑기는 동탑 상층 기단의 면석에 새겨져 있다. 문장은 세로 5줄로 구성되었으며, 글씨의 크기는 약 6cm이고 행서체이다. 글을 지은이와 쓴 사람은 알 수 없다. 내용은 삼남매가 탑을 세운 사실을 새긴 것이다. 갈항사석탑기의 실물과 탁본 사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석탑기 모습(오세윤 촬영)                             석탑기 탁본(성균관대 박물관)

그러나 석탑기는 탑이 건립된 천보 17년(758년, 경덕왕17)보다 후대인 원성왕이 즉위한 후에 새겨져, 그의 어머니를 추봉한 칭호인 조문황태후가 기록되어 있고, 그러면서 죽은 뒤 시호인 원성왕이 아니라 그의 생전 재위시 휘인 경신이 쓰여 있다. 다만 천보는 중국 당 현종 때 연호로 임오(742년) 1월부터 병신(756년) 7월까지 사용하였다. 그래서 천보 15년까지만 있다. 그럼에도 천보 17년이라 하면 758년(신라 경덕왕17)에 해당한다. 즉 천보 17년이라 한 무술(758년)은 실제는 당 숙종연간인 지덕 3년(2월 12일 이전) 또는 건원 원년(2월 16일 이후)으로 표기되어야 명확하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추정하건대 석탑기는 758년(천보17) 탑의 건립보다 약 30여년 뒤인 원성왕 재위중에 새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758년(경덕왕17) 석탑을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석탑기를 새긴 것은 원성왕 즉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기존 연구자들이 이것을 판독한 결과를 비교하면 외형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1행, 2행, 3행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한다. 다만, 4행의 9번째 글자와 5행의 7번째 글자는 일치를 보지 못했다.

조선금석총람에는 두 글자를 판독 불가로 처리했으나, 점패방지진 이후 문명대, 남풍현, 정병삼, 박미선은 두 글자를 ‘내( 妳)’로 봤다. 반면에 갈성말치는 두 자를 ‘며(𣃥)’로 판독했다. 이와 달리 허흥식은 4행 9번째 글자는 ‘며(𣃥)’로 보면서, 5행 7번째 글자는 ‘내(妳)’로 읽었다.

이처럼 석탑기의 전체 54개 글자 중에 판독상 이견을 보인 것은 단 두 글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두 글자를 무엇으로 읽느냐에 따라 기문의 해석과 내용을 이해함에 매우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한다. 최근까지의 판독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두 글자 모두 내(妳)로 읽는 것에 동의하는 추세이다. 필자 또한 내(妳)로 보면서, 판독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탑천보십칠년무술중립재지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남자매삼인업이성재지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남자영묘사언적법사재며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旀
자자 조문황태후군내재며 姉者 照文皇太后君妳在旀
매자 경신태왕내재야 妹者 敬信太王妳在也

<계속>



저작권자 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