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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23]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2.12.13 16:00 수정 2022.12.13 16:00

조선의 7대 임금, 세조(世祖,1417~1468)
세조의 광릉(光陵)과 원찰 봉선사(奉先寺)

ⓒ 김천신문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으로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조선의 7대 왕좌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와 그의 비(妃) 정희왕후 윤씨(尹氏)의 광릉(光陵)이 있는 운악산(雲岳山)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침이 정자각(丁字閣)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용 맥을 타고 누워있는 곳이다. 풍수적으로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노니는 이른바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세조(재위, 1455~1468)는 역대 어느 왕보다 당당하려 했지만, 어린 조카와 형제, 그리고 수많은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에 오른 탓인지 평생을 병마와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선왕 문종(文宗)의 비(妃)이자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는 단종을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지 얼마 후, 세조의 형수이기도 한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나도 네 아들을 데려 가야겠다’라는 독설과 함께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곧 바로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덕종,德宗)가 원인 모를 이유로 급사(急死)하게 되었고, 세조의 얼굴과 몸에는 이상한 피부병이 생겨났다.

이후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좌에 오른 자책감에 더욱 시달려야 했고, 평생을 정신질환과 불면증, 피부병 등과 싸워야 했다. 그러던 재위 13년 3개월여 만에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앞서 “과인이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할 몸이니, 석실(石室)이나 석관(石棺) 및 병풍석 등을 사용하지 말고 검소하게 장사지내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따라서 세조의 무덤 내부의 석실은 회벽으로 바뀌었고, 묘지 밖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난간의 동자석 석주에 옮겨 새겨야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의 명령에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니었던가.

당시 한명회, 신숙주 등 최고의 권력 실세들이 세조의 능침을 중심으로 반경 90 리, 무려 250여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의 전답과 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능역(陵域)을 조성하였다. 여기에 세조의 능으로 부터 약 1.5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운악사(雲岳寺)를 봉선사(奉先寺)로 명칭을 바꾸어 세조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운악사는 원래 969년 고려 광종 20년 법인국사 탄문(坦文)이란 승려가 창건한 절이다. 운악사를 세조와 정희왕후가 생전에 쌓은 업적을 기리고 사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찰로 조성하는 작업에는 당시 영의정 정인지의 아들이었던 정현조와 구치관 등이 그 책임을 맡았다.

이후 봉선사가 완공되고 매년 세조와 정희왕후를 위한 법회가 열리면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말이 새로 생겨났다고 한다. 원래 법석(法席)이라는 용어는 불교의 ‘법회석중(法會席中)’이 줄어든 말이다. 이는 설법을 듣는 법회에 여러 회중이 둘러앉아 불경을 읽는 법연을 일컫는 말로서 매우 엄숙한 자리를 뜻했다. 하지만 봉선사에서 열리는 법회에서는 고관들의 눈도장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전국각지에서 몰려와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는 까닭에 법당 내에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법당 밖에서 법회를 치르게 되면서 항상 주위가 시끄럽고 산만해진다는 뜻으로 ‘야단법석’이란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광릉과 봉선사는 지난 500년 동안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마음대로 손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으로 내려온 것이 오늘의 ‘광릉수목원’이다. 광릉(光陵)은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전국의 다른 조선 왕릉들보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봉선사의 앙상한 고목에 매달린 잎 새가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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