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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을 빛낸 역사 인물 <제29편>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2.12.16 10:47 수정 2024.01.22 10:47

홍문관 교리 만취당 정이교(鄭以僑)

김천을 빛낸 역사 인물 <제14편>

홍문관 교리 만취당 정이교(鄭以僑)

봉계 영일 정씨 교리공파 입향조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한 참 선비

김천 봉산면 신리와 예지리는 속칭 봉계(鳳溪)라 불리는 큰 마을이다. 예로부터 영일정씨 교리공파 집성촌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 입구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승화 장군과 시조시인 정완영 선생의 업적을 알리는 비(碑)가 우뚝 서 있다. 영일정씨 문중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마을 중앙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유한(鄭維翰)의 처 영천이씨 부인의 정려각과 절의천, 문중서당인 봉암서당이 있다. 이를 통해 이 마을이 영일 정씨 세거지임을 한눈에 짐작하게 한다. 영일 정씨가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한 이가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입향조 정이교(鄭以僑)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만취당(晩翠堂)으로 성균관 사성을 지낸 정종소(鄭從韶)와 평산윤씨 사이에서 1449년(세종31년) 영천에서 태어났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정종소를 일컬어 “재임하는 곳마다 명성을 얻어 해동에 덕망 있는 관리”라고 칭송하면서 ‘오천(烏川)의 정 선생(鄭 先生)’이라 했다. 정종소의 학덕과 절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형 정이휘(鄭以揮)는 문과에 급제해 장수도(長水道) 찰방을 역임했고 동생 정이심(鄭以諶)은 1486년(성종 1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정이교 묘소(봉산면 태화리 태평산)

정이교는 사직(司直)을 지낸 안동 권치손(權致遜)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일찍이 부인과 사별한 후 김천 하로의 절제사를 지낸 화순최씨 최한백(崔漢伯)의 딸(공조판서 최선문(崔善門)의 손녀)을 재처로 맞았다.

최씨 부인과의 사이에 정공징(鄭公徵)·정공건(鄭公虔)·정공필(鄭公弼)·정공청(鄭公淸)·정공예(鄭公藝) 등 다섯 아들을 뒀다. 두 딸도 뒀는데 류무빈(柳茂濱)·이달수(李達秀)에게 출가했다. 정공징은 한성부서윤, 정공건은 사복시첨정, 정공필은 영암군수, 정공청은 영산현감, 정공예는 통덕랑 선릉참봉을 지내는 등 다섯 아들 모두 사마시와 문무과에 급제해 가문을 빛냈다.

정이교는 어려서부터 가학을 통해 학문을 접했다. 아버지의 절개를 이어받아 곧은 성품을 갖췄다. 아버지 정종소는 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영주목사를 재임했다. 외숙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영월에 유배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에게 보내는 격문도 지었다. 중간에 복위운동이 무산되자 정종소는 단종 복위의 뜻을 같이하며 존경하던 하로 출신의 공조판서 최선문의 집에 피신하게 된다. 아들 정이교가 영천에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내왕하던 중 최선문의 아들 절제사 최한백의 딸과 혼인을 했다. 아들이 없던 최한백은 사후에 사위집안인 영일 정씨 문중 선산 태평산에 안장됐다. 제사도 영일정씨문중에서 현재까지 봉행하고 있다.

정이교는 1468년(세조14) 진사과에 합격하고 1470년(성종1) 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과 홍문관정자가 되어 사고(史庫)의 사초(史草)를 정리하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찬술에 참여했다. 1471년 12월 ‘예종실록’을 수찬한 공로로 직급이 올랐다.

장인 최한백의 묘소

1482년(성종13) 이조 좌랑으로서 여호를 변론했다. 여호가 안악군수에 임명된 것에 대해 승정원과 삼사가 합사해 개차(改差)를 주장했다. 하지만 정이교는 여호가 과제(科第)에 합격한 사람으로 일찍이 사헌부헌납을 지냈고 조관(朝官)에 익숙하며 특히 자산군수로 재임할 때에 공적이 있음을 근거로 제시했다. 결국 여차는 개차되지 않았다.

1484년(성종15) 사헌부 지평이 됐으며 이때 한성부 낭청(郎廳 정원 외에 임시로 임용된 6품 이하의 관원) 김당의 불법을 적발하고 파직하게 했다. 김당은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다가 나무로 통을 만들고 가지는 자기 집으로 보내는 비리가 있었다. 또 그 전에 이조의 녹사(綠事)로 있으면서 천거하는 단자(單子)를 지우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몰래 기록한 전력도 있었다. 마음씨가 근본적으로 바르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정 이교는 1486년(성종17) 이조 정랑으로서 중시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와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다. 1487년(성종18) 왕세자가 입학할 때 가필선(假弼善)으로 참여해 호피를 하사받았다.

태평재

1488년에는 가례도감의 낭청(郎廳) 일을 수행하고 말 한 필을 하사 받았다. 이후 경상도 영천에 있는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해 청도군수가 돼 선정을 베풀었다. 1496년(연산군2)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궐내에 생모 폐비 윤씨의 사당을 설치해 신주를 모시겠다는 어명을 내리자 폐비 윤씨를 위한 새로운 사당과 신주를 세우는 일을 철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 선비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이에 사헌부지평 신복의(辛服義)가 어명을 거역하는 정이교에게 관직 제수가 부당하다는 논의를 일으켜 외직인 함흥군수에 제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바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1498년(연산군4)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많은 선비들이 극형을 당하자 연산군에게 “한쪽 말만 듣고 함부로 인재를 제거함은 부당하다”는 직언을 해 연산군의 분노를 샀다. 1498년 8월 함흥군수로 좌천돼 그해 12월 함흥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소 조위(曺偉), 김일손(金馹孫) 등 영남지역 김종직 학통의 사림들과 뜻을 같이 해 이들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에서 ‘금란계(金蘭契)’를 결의하고 풍류와 덕업을 닦았다. 이들이 수계(修契)한 현판은 지금도 촉석루에 걸려 있다.

정 이교는 사후 봉산면 태화리 태평재 영모당사(永慕堂祠)에 제향됐다. 묘소는 부인 화순 최씨와 함께 합장돼 봉산면 태화리 태평산에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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