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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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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말 기준 통계청이 밝힌 김천시의 인구는 134,762명(22년말 김천시 주민등록 인구는 139,324명)으로, 65세 이상 노인은 32,750명을 보여, 전체 인구 대비 노인인구 비율은 24.3%로 조사되었다. 전국적으로도 1949년 정부가 인구통계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순 인구가 감소한 것에서 나아가, 노인인구는 급증한 반면 생산인구는 감소했고, 출산율은 0.8이라는 인류역사의 신기록을 달성하고 말았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야 당장 나의 일도 아니고, 정부 차원에서도 별 대책도 없는 게 ‘돈 먹는 하마’ 같은 존재란 인식 때문에 이제는 뭐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통계이기는 하다. 그런데 조금만 그 사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상황이 결코 남의 나라, 먼 이웃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 그리고 자식, 손자의 이야기란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국 최고의 노인 비율을 자랑(?)하는 의성군의 44.2%나, 전국 2위인 군위군의 43.2%와 비교하면 한참을 젊고, 역동적인 김천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경북 평균이 21.1%에, 전국 평균은 16.8%임을 감안할 때 김천도 심각한 초고령화 기초 자치단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평화시장 위를 날아가는 새가 똥을 싸서 사람 머리를 맞춘다면 네 마리 중 한 마리는 꼭 노인의 머리 위에 똥을 싼다는 이야기다. 현실적으로는 새똥을 맞는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쉰 냄새 나는 비 생산인구라는 사회적 편견에, 경제적 빈곤과 갖은 질병과 싸우면서도 정신적 안식은 외로움이 벗일 뿐인 우리 한국 노인의 행복 지수에 대해서는 먼 산의 불이 아니라, 발등의 불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한 때가 되었다.
정부와 자치단체마다 노인복지와 빈곤 해소를 위한 수많은 정책들이 쏟아지고 있고, 그 예산 또한 천문학적 기록을 경신하고는 있지만, 노인들의 체감 행복은 글쎄...
로마와 카르타고가 싸운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를 파죽지세로 쳐들어온 한니발을 일러 로마인들은 “문밖의 한니발!”이라며 다급했던 상황을 역사는 전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문밖의 노인!’이라는 다급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떠한 정책이나 사회적 배려보다도 이제는 노인 스스로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 방점을 찍어본다. 지금의 노인 세대들은 그야말로 불모의 땅에 맨몸으로 산업화를 이루고, 반만년 역사에서 빈곤의 대물림을 종식 시킨 위대한 역사의 역군이 아닐 수 없다. 해방 이후 전쟁의 폐허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숙명처럼 감내하며,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살아온, 어쩌면 역사적 희생양의 세대이기도 하다. 짚신에서부터 고무신과 운동화 그리고 명품 구두까지를 모두 신어본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대를 산 분들이 이들이다.
따라서 살기에 급급했던 대다수 지금의 노인들은 자기 계발이나 지성을 지향하는 인문 교양적 참 정서를 함양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부족했고, 살아남기 위해 오직 출세와 자식에게서 대리만족을 구하는 맹목적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사조는 어떠한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부모와 자식의 부양 고리는 이미 끊어졌고, 결혼 적령 여성들의 결혼 기피 대상 1호가 시부모를 모신다는 것인데, 경제적 능력 없는 남편보다 기피 순위가 우위에 있다는 통계는,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배워온 노인들에게는 노년의 외로움에 더하여, 우울한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까지를 감내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이 아닐 수 없겠다.
전국 1인 가구 700만 가구 중 노인 1인 가구는 132만 명이 해당되어 이들이 외로움의 끝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자살률은 OECD국가 중 독보적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 현실을 재앙으로 표현한다 해도 지나침은 없을 듯 싶다. 이들 자살의 원인이 경제적 빈곤과 건강, 자녀와 가족간의 단절 순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물론 인생 경영에 성공하여 부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해 준 노인들이나, 양가 부모님 아끼기를 자신보다 더 위하는 심청이 같은 며느리를 둔 노인들까지 이러한 풍조에 일반화시키는 것은 논지의 비약이 있지만,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공론화로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노인들 스스로가 풀어갈 수밖엔 없는 이 시대 노인의 의무사항이기도 하다.
경제적 어려움은 자기 스스로가 빠진 상대적 박탈감에 기인할 뿐 돈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에서 월 30여만 원의 생명수당(?)이라 할 수 있는 기초노령연금을 주는 이상, 생명을 건사하고 유지해야 하는 몫은 노인들의 몫이다. 하루 1만 원은 무조건 쓰야 한다. 이 물가에 무슨 소리 하느냐고 할 게 아니라 막걸리 한병 사다가 화분에 기른 싱싱한 야채 안주로 왕의 밥상이 부럽지 않은 식단을 꾸미고, 아침이면 복지회관이나 문화센터에서 공짜로 가르쳐주는 라인댄스를 배우거나 노래, 악기연주, 탁구 같은 오만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당연히 동류를 만날 수 있고, 아주 높은 확률로 이성의 파트너도 만날 수 있다. 그럴수록 씻기 싫은 노인의 생리와는 헤어질 수 있고, 덤으로 할아버지 냄새난다는 손녀의 섭섭한 원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복지관에서 싼 점심을 먹고 남은 돈으로 편의점에 가서 아메리카노 커피 두 잔에 약 3천원을 투자해서 이성의 파트너와 공원의 벤치로 가 곱게 물드는 은행잎을 보며, 우리가 저보다 더 아름답다는, ‘단풍보다 할배’를 부르짖어라.
내일 은밀히 만날 약속을 하고 나면 육체적 욕망에서도 벗어난 늙음이 이래서 신나는 거란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그래도 3천 원이 남으면 김천에서 제일 긴 버스노선을 타고 종점까지 가서 곱게 물드는 노을을 보며, 학창시절에 읊었던 시 할 줄 읊고 돌아오면 된다. 내일은 또 무얼할까 두렵던 내일이 오히려 기다려지게 될 것이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친구나 파트너에게 손글씨로 편지를 써보자. 친구가 있어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길 것이다. 눈이 침침하더라도 공짜인 카톡 기능이라도 익혀 며느리, 손자, 손녀에게 예쁜 이모티콘 정도는 보낼 줄 알아야 한다.
생명과학적 차원에서 보면 탄생 자체가 2억5천만 분의 일의 확률로 수정하여 탄생한 이래, 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죽음에 이르지 않고 칠십 몇, 팔십 몇, 구십 몇 살을 살아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존귀한 ‘나’를 무엇에 비교하겠는가? 나 자신이 움직이는 박물관이라는 자부심 속에 탄생도, 죽음도 하나의 조건이고 연기(緣起)일 뿐이라는 인연법에 의지하면 다가오는 죽음이 결코 두렵잖은 새로운 출발임을 믿게 될 것이다.
제발 다중시설이나 남 앞에서 자기주장 관철 시키겠다고 큰소리로 떠들지 말고, 나를 찾아 봉사활동 오는 요원들에게 어떤 성숙되고 아름다움 말로 이들의 삶에 활력을 줄 것인가를 인생의 선배로서 늘 고민해야 한다. 80이 넘어서는 쓸데없는 암검진이니 각종 검사도 받을 필요가 없다. 수술이니 연명치료 한다고 무장해제 당한 채, 고통 속에서 병원 먹여 살리는 것보다, 주어진 날만큼 내 멋대로 신나게 살다가, 즐겁게 죽겠다는 각오가 나를 더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준다는 진실을 김천의 노인들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황금같이 남은 내 인생의 주인공도 나고, 스스로 빈곤감과 외로움 속에서 자신이 만든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것도 자신이다. 늙음이 찾아오면 늙으면 되고, 죽음이 찾아오면 태어날 때에 내가 모르게 태어났던 것처럼, 죽음도 나 모르게 맞이하면 된다. 신나게 늙고, 즐겁게 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