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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음악

성찰의 경전으로 깊이 질문하고 답 찾기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3.01.16 12:39 수정 2023.01.18 12:39

최광모 시조를 읽다

이 교 상(시인) – 시조집 <디지털 장의사> 해설



시조는 다른 장르와는 달리 단숨의 미학을 내재한 음표(音標)로 삶을 노래하는 문학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점묘한 고단한 생의 의미들을 유기적으로 은밀하게 치환(置換)하고 환치(換置)한다.

환언(換言)하면, 오늘의 시조는 부박(浮薄)한 세상을 물 위에 띄워놓고 그 속에 떠도는 뭉게구름과 사사롭게 부는 바람 등을 다채롭게 궁굴리는 윤슬이다.

그리고 날마다 사람들의 곁을 끝없이 맴도는 어둠과 비감(悲感)을 아우른다. 그런 정서들을 외면하지 않는 최광모의 시조는 무엇보다도 아픈 상처들을 무리하게 조각(彫刻)하거나 기쁨과 슬픔을 애써 분리하지 않고 두루 살펴 통섭(通涉)한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대부분 어두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강박(强迫)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그 시선과 마음이 가닿아 있다. 그리고 과장된 감정의 노출과 모션(motion)이 없는 최광모의 시조는 그의 성격을 닮아 현란하지 않고 매우 정직하다.

자세히 읽어보면 날것들을 오래 숙성시킨 노력이 곳곳에 역력(歷歷)하다. 어쩌면 그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바닥에 존재하는 물컹한 생각들을 지문(指紋)으로 매만지는 것일 것이다.

최광모 시인

최광모의 시조를 읽으면서 나는 간절함이 시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세상의 저급한 욕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골목이나 구석으로 하찮게 밀려난 것에 대한 애정의 언사(言辭)가 떠올린 붉은 노을이 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벽화 속 붉은 등대 꿈꾸는 봄날이 와도 메마른 유년 시절 낮달로 띄워놓고 오늘도 허기에 감겨서 병이 된 마음이여

사라진 희망처럼 싯누렇게 들뜬 벽지, 형광등 불빛으론 악몽을 지울 수 없나? 꿉꿉한 이승의 하루 자우룩 눈이 먼다

바닥을 쓸어안고 뭉게뭉게 피어나서 공중에 떠돌다가 독가촌이 된 구름이여 마지막 가닿을 곳은 그 어느 바다인가?
 
막막한 그림자를 앞섶에 깊이 숨긴 채 웃음을 삼켜 먹은 골목을 잊기 위해 날마다 방문을 닫고 오체투지를 떠나는

「쪽방촌 연대기」 전문

벽 속에 숨어버린 얼룩진 독거의 세상
 
행복했던 기억들은 미라가 되었지만

남겨진 꽃의 흔적이 허공을 물고 있다
 
그 아픔 증명하듯 누렇게 부푼 벽지

말할 수 없는 침묵 목숨처럼 그러안고
 
혼자 또 장편소설을 어둠에 새겼을까

화석 같은 외로움 안 아프게 매만져서
 
눌어붙은 한숨을 긁어내고 닦아내면

하얗게 피어난 벽이 햇살처럼 웃겠지

「도배를 하다」 전문

멋대로 쌓여있는 나뭇잎을 헤집듯이 구겨진 채 색 바랜 긴 밤 훌훌 감아올린 낯익은 수많은 상처가 가슴팍에 잠긴다

반만 읽다 덮어버린 첫사랑 눈빛 같은 비문에 막힌 문장 아린 숨을 쏟아낸다 시퍼런 울음소리가 공중으로 흩날릴 때

파도 없는 바다를 둥글게 떠올려놓고 무겁게 쌓인 적막 입김으로 닦아낸 뒤 남자는 또다시 노래한다, 마른침을 삼킨다

늙어버린 슬픔이 숨어 사는 구석에서 얼부푼 세상 속을 덤덤하게 바라본다 고단한 역마살의 하루가 귀가한 그때처럼

「겨울 벼룩시장」 전문

위 세 편의 작품은 한없이 쓸쓸한 풍경에 대한 형용사, 혹은 어둠 속에 잦아든 습한 악몽을 부둥켜안고 언중(言衆)들을 위한 위문(慰問)의 새김질이기도 하다. 문장이 부자연스럽거나 억지스럽지 않게 삶의 거친 발바닥에 짓눌린 현실을 잘 묘사하고 진술하고 있다.

자칫 시조의 형식으로 인해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낯익고 뻔한 관념에 매몰되지 않은 까닭에 행간을 붙안은 의식이 전혀 단조롭지 않다.

그 어떤 특별한 비약과 돌발이 없어도 환유하는 감각과 시선이 상투적이지 않은 것은 그만큼 시조의 형식과 정형성을 아주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일 터.

문학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밤하늘처럼 아득해질 수도 있고, 한없이 출렁거리는 만경창파(萬頃蒼波)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위의 시조들은 의미론적으로 매우 도도(滔滔)하다. 비유가 생경하지 않아 골똘한 생각과 의심 없이 친숙하게 읽힌다.

어쩌면 그것은 끝없이 무너져내려 비천할 정도로 가난해진 외로움과 쓸쓸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뜨거운 상징(象徵)을 위해 세상을 다채롭게 은유(隱喩)하는 선지자(先知者)이고, 진심을 형상화해 오랜 세월 어두워진 역사를 새롭게 떠올리는 아티스트(artist)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문학은 통섭(通涉)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개성적으로 모색하는 포스트모던(postmodern)한 예술임이 분명하다.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아무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입장에서 시조는 현실을 방관한 문학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 미학을 철학적으로 깊이 인식한 시조는 어떤 조형(造形)의 환상(幻想)을 무작정 숭배(崇拜)하거나 절연(絶緣)하지 않는다. 오늘의 시조는 언제나 겉으론 절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안으론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며 꽃숭어리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최광모의 시조는 대개가 그것을 향해 감각이 열려 있고, 쉽게 웃음이 사라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가장 민감한 눈시울을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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