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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우리나라 왕실에서는 왕손의 태(胎)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히 보관해 왔다. 아기씨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왕실의 존엄과 국운 융성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안태(安胎) 풍습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생명존중 사상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의 근원인 태를 보관하기 위해 태실이 조성되면 훼손은 물론 주위에 벌목, 개간, 채석을 엄금했다(국역 태봉등록).
문헌상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태실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 태실이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 보존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왕과 왕세자의 태를 안전하게 보관해 왔는데, 조선 들면서 왕과 왕비, 공주, 옹주의 태실까지 만들었다. 태를 묻은 왕자가 등극하면 다시 전국의 명당을 찾아 옮겨 꾸몄는데 이 봉우리를 태봉(胎峯)이라 일컫는다.
조선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芳果)는 왕위에 별 뜻이 없는 인물이었다. 성품이 인자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났다고 역사에 전한다. 그는 1398년 8월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이 마무리되면서 세자에 책립됐다. 이미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방원(芳遠) 측 세력에 의한 것임은 물론이다. 방과, 영안대군은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태조가 양위하면서 조선 제2대 왕이 되었다(정종이란 묘호는 숙종 때에 부여됨). 즉위 후 보신책으로 사냥, 연회, 온천, 격구 등을 일삼다가 2년 2개월 만에 태종에게 양위했다.
그 정종은 즉위하던 해(1398)에 민제, 여흥백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보내 안태지를 물색하게 한 후, 1399년 4월 5일 함남 영흥에 있던 자신의 태를 중추원사 조진(趙珍)을 보내어 경북 황악산의 한 봉우리로 옮겼다. 직지사 동쪽 기슭이다(정종실록, 김천군지). 이로써 김산현이 김산군으로 승격되고, 나라에서는 직지사에 많은 땅과 노비를 하사했다(교남지). 이곳을 풍수지리상 사두혈, 그만큼 지형과 토질과 기후가 좋은 곳으로 본 것이다. 이 태봉 아래편에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선친 장승원 전 경상북도관찰사의 산소가 씌어 있다. 이곳에는 산소를 쓸 때에 산의 형세가 개구리 모양이서 위의 사두혈 침해를 피하기 위해, 산맥의 일부를 헐어내고 개구리가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만든 못이 북암지(北庵池)란 전설이 전한다. 지금의 사명대사공원 평화의 탑 앞못이 바로 그 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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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악산에 있는 조선 정종 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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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성주에는 월항면 선석산에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다. 용암면 조곡산에 태종태실, 가천면 법림산에 단종태실(세자로 책봉된 후 이전)도 있다. 특히 세종대왕자태실은 태실 보존 문화재로서, 역사테마 관광지로서 많은 주목을 받는다. 성주군에서는 그 옆에 생명문화공원, 태실문화관을 조성해 놓고 많은 관광객을 모으면서 유네스코 유형문화재로 등록 신청을 하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태실은 함남 영흥부 용연에 있었다. 이것을 즉위 다음 해인 1393(태조 2)년 1월 2일 전북 완산부 진동현으로 옮겼는데(태조실록), 이것이 1993년에 다시 옮겨져 현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만인산에 복원돼 있다. 황악산 정종 태실은 세종대왕자태실(1438∼1442 조성)보다 43년 앞선 것이다. 1928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조선왕조 54기 태실을 경기 고양 서삼릉으로 옮길 때 태항아리만을 빼내어 옮겨갔다.
정종 태봉에 지금 가보면 석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진입로는 잘 정비되어 있는데 정작 태실지에 도착해 보면 황량하기 짝이 없다. 원형 보존이 매우 중요할진대 난간석과 중등석, 연엽주석, 중수불망비 등은 직지사 경내의 성보박물관과 안양루 앞에 산재해 있다. 이들을 한곳에 모아 유형문화재로 원상 복원할 필요가 있겠다. 왕실의 생명존중 사상과 출산문화까지 살펴볼 수 있는 역사테마 명소가 될 수 있는 곳이다.
황악산 직지사 대웅전 뒷봉우리는 조선 최초의 왕자 태봉이다. 환경은 잘 보존돼 주변의 수목과 경관이 웅장, 수려하다. 고고학, 정치사, 풍수지리설, 시대사와 관련지어 연구된다면 더욱 주목받는 유형문화재가 될 것이다. 마땅히 복원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