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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기획특집 - 김천의 재실을 찾아서(1)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4.01.25 10:37 수정 2024.01.25 10:37

조상을 향한 지극한 효와 가족 구성원의 상징
제사와 지역문중 역사 정체성의 집합소 역할
우리나라 특유의 제례문화 확인하는 계기 마련

유교사상의 근간에는 효(孝)가 있다. 유교에서의 효는 살아있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죽은자에 대해서도 공히 적용된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조상을 추모하고 섬기는 보본의식, 즉 제사를 외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건축물이 재실이며 사당, 사우라고도 불렸다. 생명의 계승을 효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보는 유학에서 재실은 단순히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장소를 넘어서 가족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징성을 갖는다. 특히 혼인이나 과거급제와 같은 가족 구성원의 중요한 의사 결정이 있을 때 협의와 보고를 드리는 회합장소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김천지역에는 40개 문중에 127개소의 재실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본지에서는 금년도 기획특집으로서 지역의 문중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재실을 월 1회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주>

상의사(尙懿祠)

상의사는 조마면 강곡리 진주강씨집성촌인 강바대 마을의 자양산(紫陽山)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김천에서 증산방면으로 들어가는 지방도를 따라 조마방면으로 들어가면 조마면소재지를 지나 강곡천을 따라 약 1킬로 정도 거리 우측에 강바대 마을이 있다.
마을위쪽에 자리잡은 자동서원(紫東書院)은 일반적인 서원형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자동서원
보통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로 되어 있으나 자동서원은 좌학우묘(左學右廟)형식이기 때문이다.
즉 “강학 공간인 강당이 좌측에 묘우가 우측에 있는 형태이다. 자동(紫東)이라는 의미는 주자(朱子)의 별호 자양(紫陽)에서 따 온 것으로 즉 “주자의 학문이 동방으로 건너왔다는 의미이다.
당초 자양서당(紫陽書堂)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상주 도남서원 원장인 김기찬(金驥燦)외 555명의 유림대표들이 1804년에 발의하여 1811년(순조11)에 완공하여 자양사(紫陽祠)로 승격하고 묘우를 세덕사(世德祠)로 하여 유지되어 오다가 1868년(고종5)에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명칭을 연봉서당(蓮鳳書堂)으로 변경하였으나 훼철되고 말았다.
그 후 1923년 복원한 후 자동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당초 강설(姜洙), 강여호(姜汝床)를 배향하고 있었으나 강석구(姜碩龜), 강이화(姜履和)를 추향하면서 묘우도 세덕사에서 상의사(尙懿祠)로 변경하였다.

▲상의사
상의사의 의미는 상(尙)은 숭상한다는 뜻이며 의(懿)는 훌륭하다는 뜻이니 곧 상의사란 훌륭한 선생를 숭모한다는 뜻이다.
상의사 앞에는 외삼문인 제명문(齊明門)이 있다.
제명은 사당에 출입할 때 몸을 정갈하게 하여 마음을 밝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이다.

▲제명문
외삼문을 들어서면 자연석 기단위에 원형주초를 놓고 원주를 받쳤으며 이익공에 모로단청으로 장식하고 원기둥 사이에는 전체 판문을 달았다. 정면3칸 측면2칸 맞배지붕양식이다. 매년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봉향하여오다가 2000년 이후는 3월 초정일(初丁日)에 후손들과 유림에서 선생의 학덕을 기리며 봉향하고 있다.
상의사에 배향된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설(姜蝶 1583~1651)
아버지 해로(海老)와 어머니 고성이씨 사이에서 충남 대덕군 회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김천찰방을 역임한 강부(姜符)이며 본관은 진주, 자는 정보(淨甫) 호는 남와(南窩)이다.
1612년(광해군4) 임자(壬子) 증광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부인은 구성 광명의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의 딸이다.
1628년(인조6) 처향인 김천 구성 광명(기를)으로 낙향하였으며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遂)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갔을 때 지인(知人)이 다가와 돈이 있으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고 공에게 접근하여 회유하기에 “벼슬이 사람을 욕 되게 한다. 청백리의 후예로서 시험에 응할 바가 아니다” 라며 그 길로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만 정진 하였다. 1634년(인조12) 향중의 유림들의 협조를 얻어 임란으로 소실된 김산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을 재건하는데 주역으로 일 하였으며 그 후 조부 강부(姜符)의 유훈을 받들어 경학(經學)공부에 전심하였다. 한편 대성전과 명륜당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작고하자 공의 아들들이 김산향교의 중수를 마침으로서 향교의 면모를 일신해 김천의 흥학(興學)에 크게 기여 하였다. 1780년(정조4)에 유림들의 청원으로 조마 강곡에 위치한 자동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행장은 입재(入齋) 정종로(鄭宗魯)가 쓰고 현손 학암(鶴巖) 석구(碩龜)가 묘갈명을 지었으며 묘소는 감천면 복호동 고당산 자락에 있다.

▲강설 묘소

강여호(姜汝床 1620~1682)
본관은 진주, 자는 계숙(啓淑) 호는 기재(耆齋)이며 아버지 강설(姜漠)과어머니 성산여씨(星山呂氏)사이에서 3남으로 구성 광명(기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하였다. 1654년(효종5)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1675년(숙종1) 홍문록에 선발되어 예장원판결사(禮葬院判決事)를 지냈다. 외직으로는 진주목사, 나주목사, 횡성부사, 종성부사를 거치면서 백성들의 소송을 공정하고 바르게 처리하고 현민을 덕(德)으로 교화하여 현민들이 감화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횡성부사 재임시에는 집안에 혼사가 있어 쌀넉 섬을 변통 해 달라는 전갈을 받고 “사사로운 내 집의 혼사비용에 국고를 덜수는 없다” 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공은 또한 청렴결백하여 물품을 주고 받을 때에는 반드시 의(義)로 하였으며 봉급에 남는 것이 있으면 친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명예나 지위를 위해 애쓴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임금에게는 극간을 서슴치 않았다. 함경도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임금의 직언에 응해 시폐(時幣)에 대해 수천 언을 문장으로 진언하였다. 종성부사의 임기를 끝내고 돌아올 때 소지품이 침구 이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년에는 선친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김산향교 중건에 온 힘을 쏟아 완공하여 김천의 문풍쇄신과 흥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묘소는 감천면 복호동 고당산자락에 있으며 행장은 이광정(李光庭)이 묘갈명은 이헌경(李憲慶)이 지었으며 저술로는 『기재문집(耆齋文集)』이 전하여 오고 있다.

▲강여호 묘소

강석구(姜碩龜 1726~1810)
본관은 진주, 자는 낙서(洛瑞) 호는 학암(鶴巖)이며 아버지 진환(震煥)과어머니 옥산장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구성 광명(기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나 보통의 아이들과는 특이함이 있었다.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아이들과 시냇가에서 놀다가 사람의 유골을 보고 모두 놀라다른 아이들은 달아났으나 공은 옷을 벗어 유골을 싸서 묻으니 그 말을 들은 이들이 크게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공은 특히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종일 독서를 하니 아버지 참판공이 병이 날까 두려워하며 책을 거두어 치우기까지 하였다. 1768년(영조44) 식년시(式年試)에 문과 합격하여 사헌부정언으로 재직하던 1786년(정조10) 홍국영(洪國榮)과 내통한 이담(李潭)에게 역적의 법을 소급해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이 해에 김천 향리에 머물면서 경상감사 홍억(洪檍)이 유생들에게 지나친 형률을 적용하자 탄핵 상소를 올렸고 한성우윤, 이조참의, 의금부동지를 역임하였다. 공은 대대로 양반의 가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소박한 살림을 즐기는 청백의 지조를 이루었다. 특히 영조임금으로 부터는 총애를 받아 영조가 75세에 어필을 하사받았는데 공이 직접 어필 하단에 발문을 썼다. 내용은 “임금의 어필을 감추었던 것을 9년 뒤인 병신년에 열람하니 임금님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있으나 선어(仙駅)를 잡아 보지 못하니 슬픔으로 눈물이 흐릅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기록하여 자손 백대의 보배로 삼는다” 라고 적고 있으며 또한 어필 좌측 상단에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또 다른 발문이 있어 더욱 가치를 더하고 있는 어필인데 지금도 후손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1789년(정조13)에는 서원을 함부로 세워 배성들의 폐가 많음을 상소하여 귀양을 가다 죽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의 죄를 풀어줄 것을 상소하기도 하여 공의 강직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796년(정조20) 정조임금이 재이(災異)로 좋은 말을 구하거늘 십조(十條)의 상소문을 올리니 처음은 정학(正學)을 밝혀 풍속을 돈독하게 함이요. 둘째는 과거(科擧)의 폐단을 고쳐 선비들의 풍습을 고치는 것이며, 셋째는 언로를 열어 시청을 넓히는 것이며 넷째는 공론을 심어 붕당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관원을 자주 옮기는 것을 경계하고 여섯째 수령을 가려 써서 백성의 생명을 보양(保養)하는 것이요. 일곱 번째는 군정(軍政)을 잘 수행하여 백성들의 병폐를없애고, 여덟번째는 도적을 잘 다스려 간악의 싹이 트지 못하게 하며. 아홉번째는 곡식의 나가고 들어옴을 살펴서 폐단을 없애고 열 번째는 기강을 세워 임금의 명을 높이는 것이니, 이 많은 말씀이 임금의 마음을 선함에 이르게 하고 세도(世道)를 바로잡는 급선무라고 진언하였다.
이에 정조가 특별히 비답(批答)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여 이르기를 “네가 정확히 밝히기를 청하였으나 정학이 밝아진 후에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정학(正學)이란 두 글자는 실로 급선무에 해당하니 내가 힘을 쓰야함이 여기에 있거늘 네가 능히 이런 뜻의 글 머리에 배풀어 말 하였으니 지극히 훌륭하고 말한바가 모두 옳구나. 함축하여 말한다면 모든 조목은 모두 국가에 기강이 있어야 함에 관계하니 이것 또한 애가 마음을 쓴 바이라” 하였다. 1797년(정조21) 봄에 임금의 명으로 〈향례합편(鄕禮合編)〉과 〈향약(鄕約)〉을 반포(頒布)하라는 윤음(綸音)을 모든 고을에 내려 고루 행하게 하여 극기를 다스리는 도움이 될 방법으로 삼으려 하였다. 또한 공은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녹봉 받기를 부끄러워 하였으며 공이 돌아가시자 임금이 “자손 대대로 청백리 집안으로 이어 가라” 면서제문과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였으며 1923년 유림들의 청원으로 자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유집으로 『학암문집(鶴巖文集)』이 있으며 행장(行狀)은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이 묘지명은 지애(芝厓) 정위(鄭煒)가 묘갈명은 매당(梅堂)이만좌(李萬佐)가 지었으며 글씨는 구성출신 여재동(呂載東)이 썼다. 묘소는 남면 초곡 봉화산 자락에 있다.

▲강석구 묘소

강이화(姜履和 1741~1828)
본관은 진주, 자는 자혜(子惠) 호는 호은(湖隱)이며 아버지 일복(日復)과어머니 아주신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구성 광명(기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관후하고 응중(凝重)하여 보는 이들이 크게 기대하였다. 효심이 깊어 조석으로 부모에게 문안을 드리는 등 어린 나이에 문장이 탁월하게 드러나 명성이 파다하였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와 도의로서 사귀었으며 성리학에 전념 하였을 뿐 출세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나 세 번에 걸쳐 현감으로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명승지를 유람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즐겼다. 『정주학논설』, 『천문지리』, 『명승지답사기』등을 저술했으며 유집으로 필사본의 문집이 있으며 간행되지는 못하였으나 후손가에서 현재까지 보관하여 오고 있으며 묘소는 증산 황항리 마을 앞산에 있다.

▲강이화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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