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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조선 선조와 이순신 장군, 그리고 서애 류성룡

권숙월 기자 입력 2014.09.17 19:06 수정 2014.09.17 07:06

김용대(변호사․한국자유총연맹 김천시지회장
경상북도공직자윤리위원장)

ⓒ i김천신문
    선조는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태어난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서 원래 왕이 될 수 없었다. 명종이 죽고 후사가 없자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에 의하여 15세 때 왕이 되었다. 선조는 무능하고 의심증이 강하고 도량이 좁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선조 때 훈구파는 몰락하고 사림파가 조정을 장악했다. 

  선조 8년(1575년)에 이조전랑 자리 때문에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다. 율곡 이이 선생은 동인과 서인을 중재하려고 노력했지만 선조 17년(1584년) 선생이 사망한 후 당쟁은 본격적으로 격화되었다. 특히 선조 22년(1589년) ‘기축옥사’ 이후 서인 송강 정철의 처벌문제로 동인은 남인(온건파)과 북인(강경파)으로 분열되었다.
  임진년 1592년 4월 조선은 개국 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했다. 선조는 백성들 모르게 비를 맞으면서 대신 몇 명, 왕비․후궁들을 데리고 의주로 피신했고 명나라 요동으로 망명할 생각까지도 했다.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에 들어가 전각에 불을 질렀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 파직당하고 구속되고 백의종군하기도 했지만 23전 23승의 전과를 올렸다. 그 중에서 한산도해전(1592년 7월), 명량해전(1597년 9월), 노량해전(1598년 11월)을 장군의 3대첩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영화 ‘명량’의 관객은 1천700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군인에게 있어 의리(義理)는 백성을 향한 충(忠)이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왕이 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 “아직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통탄할 일이로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목숨에 기대지 말라. 죽으려고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은 왕(선조)이 아닌 백성을 위하여 죽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죽음의 목전에서도 장군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천행(天幸)이 왔을 것이다.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 장군은 우리 국민들 가슴 속의 영원한 지도자가 아니겠는가? 

  이순신 장군을 등용한 사람은 서애 류성룡이다. 그는 퇴계 이황의 제자였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1년 전에 좌의정 겸 이조판서였는데, 왜의 침략을 예상하고 이순신 장군을 파격적으로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선조는 임란왜란 이듬해에 류성룡을 영의정으로 등용했다. 그는 1598년까지 조정을 이끌면서 전쟁을 지휘했다. 

  그는 임진왜란 중 3대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평소 군역에서 면제된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과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그리고 양반과 노비의 혼성부대인 속오군(束伍軍)을 만들었다. 또 종군 노비에게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었다. 노비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면 양인으로 속량하고 벼슬까지 주는 면천법(免賤法)을 만들어 시행했다. 그래서 노비들이 의병에 대거 지원했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평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류성룡은 조세제도도 고쳤다. 가난한 사람이 더 내고 부자가 덜 내는 공납(貢納)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가구별 부과기준을 폐지하고 토지의 면적에 따라 부과하는 작미법(作米法)을 시행했다. 당연히 땅 많은 양반 지주들이 내야 할 몫이 커졌다. 양반들은 아우성쳤다. 

  종전이 가까워오자 상황이 급변했다. 선조는 남인 류성룡을 헐뜯는 서인들과 북인들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류성룡이 “서얼과 노비 같은 천한 신분을 발탁했다”고 탄핵했다. 류성룡은 선조 31년(1598년) 11월 19일 파직되었고, 그의 전시 개혁입법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같은 날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53세에 장렬히 전사했다.
  류성룡 선생은 파직된 후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로 쓸쓸히 낙향하여 초가집에서 기거했다. 선생은 1604년 임진왜란 회고록 ‘징비록’의 저술을 마쳤고 2년 뒤 64세에 사망했다.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은 억울하게 구속되기도 했고 류성룡 선생도 억울하게 탄핵을 받아 벼슬을 잃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조선을 구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선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사건 이후 혼돈의 상황을 체험하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문제로 국회의 기능이 4개월 이상 정지된 상태에 있다. 야당은 대통령과 여당이 국민들, 특히 세월호 유족들과 대화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야당의 리더십은 실종되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다. 여당은 사법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특별법을 만들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국가개조(혁신)을 향하여 전진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체되어 있다. 국민들도 극단적으로 분열하고 있다. 

  공자는 “내가 아는 게 있느냐, 아는 게 없다. 다만 누구라도 질문하면 그 양끝을 헤아려 힘껏 알려줄 뿐이다”(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논어’ 자한 편에서)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고기양단(叩其兩端)은 유명한 말이다. 고(叩)는 두드린다는 뜻이다. 양단(兩端)은 단순히 사물만의 양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자연, 사회현상과 가치의 양면성, 모순을 뜻한다. 우리들은 양단, 즉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쪽의 문제점을 찾고 이를 조화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위하여 고뇌하여야 하지 않을까? 양진영은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개혁적인 자세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 ‘명량’을 통해서 무능한 선조와 사림파의 분열, 그렇지만 나라를 구한 백성의 충신 이순신 장군과 서애 류성룡 선생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이들 구국의 영웅은 지금 우리들에게 어떻게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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