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항거해 3·1운동이 일어난 7일 뒤인 3월 8일 대구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검거돼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65명. 김천 출신은 5명이며 판결문은 아래와 같다.
△김수길: 18세. 증산면 금곡동. 계성학교 학생. 도피해 궐석재판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박제원: 36세. 남산동. 전도사.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이승옥: 22세. 부항면 하대동. 계성학교 5학년. 징역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박만준: 24세. 남면 부상동. 성결학교 강습생. 징역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김봉안: 24세. 아포면 송천동. 농업. 징역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김수길(1902~1932)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추앙받아 마땅하리라.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대구에서는 기독교계와 계성학교, 신명학교 등의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계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수길은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시위대가 해산 당하자 일본 경찰을 피해 고향인 김천으로 왔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시위를 보고 귀향한 황금동교회 조사 김충한을 만나 김천에서의 시위를 계획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사전에 시위 계획이 발각돼 실패하자 다시 대구로 돌아가 신정(新町)하숙집에서 이영식, 허성도 등과 조선 상인들에 대한 철시투쟁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남산정(南山町) 박준이의 방에서 “죽음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관철할 것”이라는 내용의 ‘동정표시경고문(同情表示警告文)’을 인쇄해 시내 곳곳에 붙였다.
또한 대구경찰서장을 상대로 3월 8일 시위대 검거행위에 대해 비판하면서 “너희들과 같은 자는 암살당할 때가 있을 것이니 각오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보내 위협했다.
그해 4월 17일 김수길은 이영식, 최재화 등과 함께 ‘혜성단’이란 결사대를 결성했다. ‘혜성단’은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출판물을 통해 민중의 각성을 도모하고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도 모색했으며 최재화와 함께 인쇄 책임자로 활동했다.
4월 18일 김수길은 ‘근고동포(謹告同胞)’,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등의 선전문과 경고문을 등사해 시내 각지에 붙였는가 하면 각 관청의 조선인 관리들에게 보내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돼 대구복심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