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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제99주년 3·1절 특집

권숙월 기자 입력 2018.02.28 14:34 수정 2018.02.28 02:34

“김천지역 독립운동, 전국에 반향을 일으키다”
신간회 등 단체 통한 독립운동의 불길 ‘활~활~’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은 김천지방은 삼한시대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외침에 시달리면서 부침(浮沈)의 역사를 이어왔다.
감문국의 신라에 대한 격렬한 항전이 그러했고 여말선초에는 불사이군을 부르짖으며 무수한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김천으로 낙향해 은거하는 등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반골(叛骨)의 기상으로 무장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과 자부심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빛을 발했으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말의병운동, 일제강점기의 독립 항일운동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갖은 고초와 탄압을 무릅쓰고 국권회복을 기치로 다방면에서 활동하여 김천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과 관련한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수상자 56명을 배출하는 등 호국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99주년 3·1절을 맞아 본지에서는 김천지역 사회 저변에서 보이지 않게 독립운동과 항일활동을 전개한 각 단체의 처절한 활동을 발굴해 알리고자 한다. <편집자 주>
 
먼저 청국청원신사단(淸國請願紳士團)의 활동부터 살펴보자.
1895년의 민비 시해와 단발령 직후부터 전국 각지에서는 무력으로 일본을 몰아내자는 의병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는데 김천에서는 김산장의군에 가담했던 이병구(李炳九 조마면 대방 출신) 등이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청병을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자는 생각으로 청국청원신사단이란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청국이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패한 후 원한이 깊을 것이고 이홍장은 과거 조선을 도운 전력이 있으므로 민간에서 강력히 요청하면 기꺼이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청국청원신사단원은 걸어서 의주까지 가서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한국 관원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6개월간의 옥살이를 치른 뒤에 풀려났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충의사(忠義社)의 활동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충의사는 1895년 청일전쟁 후 강화조약이 맺어지기 직전인 3월 초에 김천 출신 인사들의 주동으로 서울에서 조직된 일종의 애국계몽단체이다.
여중룡(呂中龍 구성면 광명리), 여영조(呂永祚 구성면 금평리), 조상우(봉산면 인의리, 참봉), 박의현(조마면 신곡리, 찰방), 이병구(李炳九 조마면 대방리), 이승보(지례면 참사), 이경성(구성면 상좌원리) 등 애국지사들의 주동으로 전국의 유림 113명이 충의사에 가입했다.

이 단체의 취지는 청국과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그 피해는 우리가 입게 되고 세계열강이 몰려와 모든 이권을 차지하고 있어 이런 불리한 입장을 벗어나려면 우리 국민 스스로 대책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충의사의 목적으로는 “국가에 대해 권익을 향상케 하고 잔해는 철저히 배제하되 위급할 때에는 생명도 바친다”고 했고 회원의 자격으로는 “충신 정직하고 재지 겸비해야 목적을 극력 이행할 자로 한다”고 했다.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각 도와 군에 지부를 두기로 하고 재정은 회원이 30량 이상을 출자했다. 벌칙도 엄격해 “사규에 위반한 행위가 중할 시는 제명, 절교는 물론이고 법사가 교섭해 징치(懲治)케 한다”고 돼있다.
충의사가 뒤에 어떻게 운영되고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충의사에 관계했던 대부분의 인사가 훗날 김천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거나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항일 국권회복운동에 활약한 것으로 보아서 충의사의 존재 가치는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다.

비교적 전국적인 규모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 널리 알려진 신민회(新民會)의 김천지부 활약상도 빼놓을 수 없다.
1906년에 대한자강회가 장지연(張志淵) 등의 발의로 결성됐다가 이듬해에 강제 해산당한 후 대한협회가 오세창, 남궁억 등의 주동으로 발족해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대항했고 1907년 4월에는 비밀단체로 전국적 규모의 신민회가 안창호의 발의로 김구, 이상재, 노백린, 신채호, 유동열, 이승훈 등 의사가 주동해 조직했다.

신민회는 애국계몽운동을 목적으로 국권을 회복해 자주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부를 공화제로 해 군주제를 폐지하고 이를 추진하는 민족운동을 벌인다고 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사업으로는 신문 잡지를 발행하고 계몽강연을 하고 학교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업을 진흥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의 기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 조직으로는 각 도에 도총감을 두고 의결기관으로 평의원을 뒀다. 군에는 군감을 두고 역시 평의원을 뒀다. 군감 밑에는 반을 편성해 회원 60명마다 도반장을 두고 20명마다 부반장을 뒀으며 5명마다 반장을 둬 신민회의 기본 단위로 했다.
이 조직을 종으로만 고리처럼 이어지게 해 당사자 2명 이상은 서로 모르고 횡으로는 누가 회원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신민회의 회원은 800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나 광복 때까지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됐음은 회원의 엄격한 심사를 거친 높은 자질의 소유자만이 가입됐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회원으로 밝혀진 인사는 300여명인데 김천 지방 관계자는 김태연(金泰淵 개령면 동부리), 편강열(片康烈 어모면 다남리)로 이들은 뛰어난 독립운동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 김태연(왼쪽) 편강열
ⓒ 김천신문

신민회와 함께 대표적인 결사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김천지역 활동도 재조명되고 있다.
3·1운동 이후 항일 민족주의 운동은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양 계열로 분열되어 무력화, 소극화됐으나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봉기한 학생들의 만세운동 이후 민중의 항일의식은 체계적인 단일 단체를 통해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신간회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결성된 항일 민족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였다.
신간회의 활동 범위가 확대돼 학생운동, 노동운동에도 적극 개입하게 되자 일제는 드디어 탄압을 가하게 됐다. 신간회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31년에는 전국지외 141개소, 도지회 연합회 2개소, 회원 총수 3만9천410명이었다.
김천신간회는 1927년 3월 21일에 전국에서 두 번째로 경상북도에서는 가장 먼저 조직됐다.

1927년 2월 18일 김인수, 박희수, 김상영, 황태성, 홍보용 등이 협의회를 갖고 김천지회 결성을 결의하고 3월 21일에 금릉청년회를 비롯한 3개 단체 대의원 38명이 모여 조직했는데 집행위원장에 심상문, 부위원장에 여환옥이 선출됐다.

1927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총회를 오후 2시부터 금릉청년회관에서 개최하고 지회장에 여환옥, 부지회장에 심상문, 간사에 홍보용이 선출됐으며 오후 9시부터 금릉회관에서 창립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고 연사에는 안재홍, 홍보용, 김장한 제씨로 대성황을 이뤘고 금릉유치원에서 다과회를 열고 밤 12시경에 해산했다”고 보도할 정도로 활발한 창립을 보게 됐다고 한다.
신문보도에서 지회장을 여환옥이라 한 것은 김천지회조직에 따른 비용의 대부분을 여환옥이 출연했는데 사전 조직에는 여환옥이 내정됐기 때문이나 그는 한사코 지회장을 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여환옥 생가
ⓒ 김천신문

1929년 2월 16일 제2회 정기총회를 가지는 등 김천지회가 전국 신간회 활동 중 가장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한일합방을 주도한 을사오적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도 김천지역 인물들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이 알려지자 이에 찬동한 대신들인 이른바 ‘을사 5적’을 처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황간 출신 이건석은 일본을 배척하라는 상소를 14차례나 올려 일본 헌병대에 구금됐다가 을사조약 체결의 소식을 듣고 단식으로 자진했다. 그 아들에게 남긴 유서가 발견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으며 아들 이응수(李應洙)도 뒤에 독립운동의 큰 업적을 남겼다. 이응수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황간에서 김천 봉산면 봉계로 이사했다.
5적을 처단하려는 계획이 여러 차례 있었으며 이완용의 집을 불사르고 권중현을 저격하기도 했다.

김천 출신 여영조를 비롯해 나인영, 이기,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민형식, 최동식 등이 을사 5적을 처단하려다가 발각돼 일본 헌병대에 체포, 7개월간의 구금 중에 심한 고문으로 인해 여영조는 좌측 늑골이 부러지기도 했다.
생소하지만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라는 결사단체에도 김천지역 인사들이 참가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독립의군부는 1913년 9월 임병찬(정읍 출신), 이인순(서울 출신), 전용규(서울 출신) 등이 주동해 조직한 항일결사단체이다. 
서울에 독립의군부 중앙순무총장을 두고 각도에 도순무장을, 군에는 군수, 면에는 향장을 둬 전국적인 조직체로서 조선총독 이하 전 관헌에 대해 국권 반환 요구서를 계속 발송함으로 총독의 조선통치가 어려움을 깨닫게 하려 노력했다. 또한 외국에 대하여서는 한국인이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우리 민족에게는 국권 회복의 여론을 고조하려는 ‘관견(管見)’이라는 인쇄물을 작성했다가 1914년 5월에 발각됐다.
김천 출신으로 독립의군부에 참여한 인사가 다수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여영조(呂永祚 구성면 금평동)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자료제공: 김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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