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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동 하로 출신으로 조선 전기 청백리에 오른 노촌 이약동 선생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이 하로서원에서 열렸다.
지난 2월 노촌기념사업회 출범으로 올해는 노촌 이약동청백리상이 춘향제에 앞서 수여하고 오전 11시부터 춘향제례가 하로서원 청백사에서 봉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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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헌관에 정근재 문화원장, 아헌관에 김재환 제주산천단 봉행위원장, 종헌관에 김상규 지례향교 전교가 제관으로 분향, 헌작했다.
뒤이어 열린 청백리 백일장에는 김천지역 초중학교 학생 150여명이 참가해 문예실력을 겨뤘다.
노촌 이약동 선생은 1416년 양천동 하로에서 해남현령을 역임한 벽진이씨 이덕손(李德孫)과 고흥유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춘보(春甫),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헌부감찰, 제주목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사간원대사간, 경주부윤, 호조참판, 전라도관찰사, 이조참판, 개성유수, 지중추부사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주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선생은 백성들에게는 인자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했는데 일생에 걸쳐 근검절약했고 관직수행과 관련해 공평무사한 처신으로 가는 곳마다 칭송이 이어져 훗날 나라에서 청렴결백한 관리에게 내리는 청백리에 올랐다.
특히 1470년 제주목사로 부임해 매년 2월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산신제로 인해 백성들이 동사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단을 산 아래로 옮겼다.
이임할 때는 관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남겨두고 말을 타고 나섰는데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문 위에 걸어 놓았다는 괘편암(卦鞭岩)전설과 배가 풍랑에 휩쓸려 뒤집히려할 때 부하가 몰래 받은 갑옷을 바다에 던져 풍랑을 잠재웠다는 투갑연(投鉀淵) 전설이 전해진다.
노촌 이약동 선생은 76세에 고향인 하로마을로 낙향할 때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는데 가난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손들에게 물욕을 경계하는 시(詩)를 남겨 교훈으로 삼게 했다.
<나문배 사진전문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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